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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의 생동을 느낀다

2024.06.29

by 정지혜

    내내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의 생동을 느낀다

    안희연의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시인선, 2024)를 읽는 내내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의 생동을 느낀다. 그 자신이 돌 모양의 초인 줄도 모르고,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참아내는 돌의 우직함, 초의 연약함, 그러한 모양을 한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간섭>).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반건조 살구>) 축조하는 시간의 힘을 기꺼이 믿어보고 싶어진다. 슬픔의 순간에도, 슬퍼지려 할 때조차도 시인의 시선에서 사는 일은 기어코 약동과 진동으로 뭉근하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 활력에 기대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당근밭 걷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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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연, ‘당근밭 걷기'(문학동네시인선, 2024)

    자라는 것, 그것을 기르는 사람. 그 사람은 ‘각자의 우산이 있었음에도/하나를 나눠 쓰자 청’(<긍휼의 뜻>)하는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라도 새로 산 우산의 쓸모를 구하다 보면/걸음이 나란해지고/서로의 몸속에서 피가 도는 박자를 알아봐주면//단 한 사람/멀리서 구하지 않아도 이미 도착한 것일지 모른다고//그때 알았네/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계속 계속 우산을 사는 사람은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긍휼의 뜻> 중

    자라는 것, 그것을 기르는 사람. 그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내 안에서 이야기가 될 수 있게/기다렸어//한 존재를 안다고 말하기까지/매일매일 건너왔고’(<자귀>)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라는 것, 그것을 기르는 사람. 그 사람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창밖을 보려면 창문에 비친 나부터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놓여 있는 모양 그대로/바라보기/조각내지 않기//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청귤>) 그것에 골몰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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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사람은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자신부터 돌아보는 사람. 그렇지 않고서야 ‘너는 나의 가장 무른 부분/나는 너의 가장 탁한 부분//억지로 꿰매지 않고/다만 갈 뿐’(<점등 구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체온을 잃어가는 일, 뜬눈으로 굳어가는 일’(<확대경>)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볼 줄 안다. 그런 사람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해 4월의 차가운 바다, 사그라든 이름들을 떠올리고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이들이 우르를 몰려온다. 여길 봐, 여길 봐 하며. 어떤 아이들은 귀가 없고 어떤 아이들은 입술이 파랗다.//잠 속에서 물크러진 흔적. 같은 높이여야만 보이는. 너희의 안부가 궁금해서 떠돌던 빛을 데려왔어. 너희는 수중식물처럼 여전히 싱그럽구나.’(<확대경>)

    그런 사람은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내겐 그것이 중요하다’(<굉장한 삶>)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이가 내미는 손, 건네는 말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 켜질 시간이에요//그만 깨어나주세요//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기록기>)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 마세요/어떻게 살아 있을 거냐고 물으세요//오늘도 무사히 하루의 끝으로 왔다//나의 범람,/나의 복잡함을 끌어안고서’(<물결의 시작>)

    그런 사람,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살아 있다고,

    그런 사람 덕분에 살아 있다고.

    <당근밭 걷기>가 내게 다정히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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