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패션사 수업: 유틸리티 수트, 뉴 룩
1940년대 패션에서 가장 핵심적인 스타일은 무엇일까? 패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전쟁 중 원단을 최대한 아끼고 고쳐 입는 방식으로 시작해 ‘뉴 룩’, 즉 멋 그 자체를 위한 스타일의 탄생으로 마무리된 10년이었으니 말이다.
1943년 2월 1일 발행된 <보그>의 우울한 발췌문이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번 호가 발간될 즈음에는 미국에 새로운 종류의 화폐가 유통될 것이다. 플라스틱 동전도 아니고 새로운 지폐도 아니다. 바로 배급 쿠폰이다.” 여기서 배급 쿠폰은 정부가 전시 또는 긴급 상황에서 국민에게 부족한 식량이나 생필품을 배급하기 위해 발행한 일종의 카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전역에는 복구를 위한 다양한 조치가 내려졌다. 특히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에서는 꾸뛰르 산업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영국에서는 가죽 소재를 제한했다. 반면 미국에선 면화 생산으로 원단 부족을 피해 갈 수 있었다. 1940년대 초반의 가장 큰 트렌드는 유틸리티 스타일이었다. 단순히 장식 없는 패션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의 독자적인 의류 카테고리로 자리매김한 스타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정부의 유틸리티 의류 제도(CC41)를 통해 하디 에이미스(Hardy Amies), 딕비 모턴(Digby Morton),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 에드워드 몰리뉴(Edward Molyneux) 등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에게 캡슐 컬렉션을 디자인하게 했다. 물론 제한된 패션 규정을 준수한다는 조건에서였다.
파리 해방 이후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다시 패션의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은 18세기를 연상케 하는,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직물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렇게 실용주의는 점차 잊혀갔다. 패션의 변덕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10년이었다.
#1940년대 여성 트렌드
유틸리티 수트의 부상: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여성용 스커트 수트
전쟁이 시작될 무렵, 1930년대를 대표하던 바이어스컷, 새틴, 시폰 등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실크와 인견조차도 전쟁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대신 실용을 내세운 패션이 주를 이루었다. 생산 과정에서 소재 낭비도 거의 없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성용 울 스커트 수트다.
스커트 수트, 새로운 패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은 강렬한 테일러링만큼은 신선했다. 전체적인 실루엣은 좁고 슬림했다. 어깨는 강조되었지만 과장되진 않았고, 허리는 살짝 잘록하게 표현되었다. 장식은 벨트와 가슴 포켓 등 밀리터리 디테일로 대체되었다.
1942년 1월 15일 <보그>는 이 ‘1942 유니폼’에 ‘테일러드 수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 “직장과 가정을 오가는 바쁜 일상에서 종일 입기 좋은 수트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평을 남겼다.
셔츠 웨이스트 드레스의 유행: ‘키티 포일 드레스’의 인기
‘뉴 룩’이 등장하기 전 1940년대를 풍미한 실루엣을 꼽으라면 바로 무릎까지 오는 셔츠 웨이스트 드레스다. 대조적인 칼라 디자인과 소매의 캡이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이 드레스는 영화 <키티 포일>(1940)에서 진저 로저스가 입고 나오며 인기를 얻었다. ‘키티 포일 드레스’도 이때 붙은 별명이다.
비용 대비 효과가 뛰어난 드레스였다. A라인으로 퍼지는 실루엣은 볼륨감이 거의 없었음에도 세련됐고, 칼라는 추가 소재 없이도 시각적으로 충분히 흥미로웠다. 단정하고 실용적이며 엄숙하던 시대적 분위기에 제격인 드레스였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 당국이 권장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1943년 3월 15일 <보그>의 ‘셔츠 웨이스트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올봄 셔츠 웨이스트 드레스는 더없이 옳다. W.P.B.도 사랑하는 이 드레스, 당신도 빠져들 것이다”라는 카피가 실렸다. 참고로 W.P.B.는 1942년 1월 진주만 공습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전시 생산국(War Production Board)을 뜻한다.
작아진 모자, 늘어난 신발: 독창성이 깃든 액세서리
전쟁 중 패션에 사용할 원단이 부족해지면서 디자이너들은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집에서 재봉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자는 여전히 여성에게 필수 액세서리이긴 했지만 크기는 작아졌다. 비스듬한 각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 모자는 펠트부터 스트로까지, 다양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스누드와 터번도 인기를 끌었다. 실용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공장에서 일할 때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드레스와도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신발은 튼튼했다. 앞코는 둥글고 뒷굽은 넉넉했다. 가죽이 부족했기 때문에 코르크 같은 대체 소재로 만든 에스파드리유 등이 유행했다. 1944년 1월 1일 <보그>에는 ‘배급이 필요 없는 라피아 신발’ 같은 홍보 문구가 쓰였다.
자재가 부족하던 시기, 새로운 소재는 계속 발견되었다. 구찌오 구찌가 그 유명한 곡선형 대나무 손잡이 가방을 선보인 것도 바로 이때 1947년이었다.
미국 디자이너의 부상: 뉴욕, 패션 지도에 점을 찍다
1941년 2월 1일 <보그>를 보면 당시 패션계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파리는 함락되었지만, 그간 파리가 선보인 근사한 컬렉션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지난 7개월 동안 미국의 의류, 패브릭, 신발, 모자, 주얼리 디자이너들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배웠고, 초반의 긴장감도 내려놓았다. 우리는 여전히 몰리뉴(Molyneux)와 크리드(Creed) 같은 영국 디자인을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 패션의 발전은 미국, 우리 스스로의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패션계는 프랑스가 아닌 국내에서 그 방향성을 찾았다. 노먼 노렐(Norman Norell), 보니 캐신(Bonnie Cashin), 톰 브리건스(Tom Brigance), 루디 건릭(Rudi Gernreich), 길버트 에이드리언(Gilbert Adrian), 클레어 맥카델(Claire McCardell) 같은 디자이너들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클레어 맥카델의 ‘팝오버’ 드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 7달러짜리 유틸리티 의류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이 드레스는 클레어 맥카델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시에 미국 특유의 편하고 실용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스포츠웨어의 시발점이 되어준 드레스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트렌드를 이끌다: 바지 입은 캐서린 헵번
1940년대 내내 할리우드는 패션의 향연이었다. 잡지만큼 눈이 즐거워지는 경험이었다.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 <길다>(1946), <명탐정 필립>(1946) 같은 영화 캐릭터의 의상은 사람들에게 쇼윈도 마네킹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리타 헤이워드, 베로니카 레이크, 로렌 바콜,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배우들은 길버트 에이드리언, 에디스 헤드(Edith Head), 오리 켈리(Orry-Kelly), 진 루이스(Jean Louis) 같은 의상 디자이너의 옷을 입곤 했다. 패션사에 길이 남을 협업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1942년 영화 <여성의 해>의 캐서린 헵번이었다. 길버드 에이드리언의 턱시도를 입고 나온 그녀의 모습이란! 여성 지위와 패션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장면이었다.
전쟁이 끝난 파리의 부활: ‘테아트르 드 라 모드’의 모든 것
독일의 파리 점령 기간 동안 파리 패션은 나치에 의해 봉쇄되었다. 해방 이후 파리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다시 옷을 만들 준비가 되었다는 걸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당시 파리 꾸뛰르 의상 조합 회장 뤼시앵 를롱은 원단이 비교적 적게 들어가는 인형 패션쇼를 준비한다. 이 쇼를 위해 발렌시아가, 스키아파렐리, 파캥(Paquin), 장 파투, 에르메스, 마담 그레(Madame Grès), 니나 리치 등 40명의 꾸뛰르 디자이너가 협력했다. 그렇게 탄생한 패션쇼 ‘테아트르 드 라 모드(Théâtre de la Mode)’는 파리가 파리에 보내는 일종의 러브 레터였다. 쇼는 바르셀로나, 런던, 리즈, 코펜하겐, 스톡홀름, 빈,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전 세계 도시를 순회하며 종전 시대의 패션을 미리 엿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모든 것을 바꾼 뉴 룩: 전 세계에 울려 퍼진 1947년 디올 컬렉션
크리스챤 디올은 전후 패션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전시에는 뤼시앵 를롱의 직원으로 일했고 1946년에 독립해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했다. 1947년 공개한 데뷔 컬렉션에서는 당시 유행과 완전히 반대되는 옷을 선보였다. 스커트 원단은 풍성했고 어깨 라인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실용성은 버리고 아름다움을 살렸다. 당시 <하퍼스 바자>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는 이 컬렉션을 ‘뉴 룩’이라 명명했지만 실제 이름은 ‘코롤(Corolle)’이었다. 이 컬렉션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템은 바 수트였다.
‘코롤’은 오늘날 패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컬렉션 중 하나다. 패션 역사학자들은 이 컬렉션을 두고 “기존 실루엣을 과장했다. 전쟁 시대에 미국, 영국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던 스타일과 정반대 룩을 추구했다”고 묘사한다.
이 룩은 몇 년간 패션계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해 가을 텍사스 출신의 윌리엄 J. 우드워드 부인(Mrs. William J. Woodward)은 디올의 ‘낭비적인’ 스커트 스타일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리틀 빌로우 더 니 클럽(Little Below the Knee Club)’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여성들은 전시의 궁핍함에서 벗어나 1950년대의 호황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디올 혹은 디올풍 옷을 입고서 말이다.
비키니의 등장: 루이 레아르와 자크 하임의 투피스 경쟁
비키니는 미국이 핵폭탄 실험을 진행한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Louis Réard)와 자크 하임(Jacques Heim)은 이 문제의 투피스를 두고 작은 전쟁을 벌인다.
1946년 5월 자크 하임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영복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토메(Atome)’라는 이름으로 비키니를 내놓았다. 그리고 3주 후 루이 레아르는 ‘비키니’라는 이름과 함께 배꼽을 드러낸 끈 비키니를 선보였다. 비키니 환초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더 폭발적인 아이템이라는 의미였다.
루이 레아르의 비키니는 1946년 7월 5일 파리 공공 수영장인 피신 몰리토르(Piscine Molitor)에서 공개되었다. 모델은 미슐린 베르나르디니(Micheline Bernardini), 전문 모델이 아니라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의 19세 누드 댄서였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과감한 노출을 감행할 수 있는 패션모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키니는 공개와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추문을 떨쳐내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 클레어 맥카델, 보니 캐신, 톰 브리건스, 루디 건릭, 하디 에이미스, 노먼 하트넬(Norman Hartnell), 에드워드 몰리뉴, 엘사 스키아파렐리, 딕비 모턴, 크리드, 찰스 제임스(Charles James), 멩보쉐(Mainbocher), 뤼시앵 를롱, 파캥, 잔느 랑방(Jeanne Lanvin), 찰스 프레드릭 워스,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 마르셀 로샤스(Marcel Rochas), 니나 리치, 자크 파스(Jacques Fath), 발렌시아가, 마담 그레, 해티 카네기, 길버트 에이드리언, 폴린 트리제르(Pauline Trigère), 노먼 노렐, 네티 로젠슈타인(Nettie Rosenstein) 그리고 베라 맥스웰.
#1940년대 남성 트렌드
1940년대 초, 남성 수트는 의류 배급에 맞춰 슬림핏 트렌드를 따랐다. 1920~1930년대에 유행한 더블 브레스트 수트는 싱글 브레스트 수트로 바뀌었고, 웨이스트 코트는 불필요한 요소로 여겨지며 거의 폐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43년 여름 주트 수트(Zoot Suit)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일반 수트에 비해 과도한 원단을 사용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주트 수트는 1930년대 할렘 무대에서 공연자들이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입던 드레이프 수트에 뿌리를 둔다. 이 스타일은 자신의 체형에 맞는 수트를 찾을 수 없어 따로 재단사를 찾아야 했던 흑인, 멕시코계 미국인, 라틴계 남성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당시 사랑받던 미니멀리즘과 상충된 패션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리고 1943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선원, 해병, 경찰 그리고 주트 수트를 입은 사람 간의 인종 갈등이 고조되었고, 일명 주트 수트 폭동(Zoot Suit Riots)’이 일주일간 일어났다.
#1940년대 문화적 배경
1940년 2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해티 맥다니엘이 흑인 배우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음악 신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냇 킹 콜이 재즈와 스윙 히트곡으로 차트를 석권했다. 1947년 11월 20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노먼 하트넬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Lieutenant Philip Mountbatten)와 결혼식을 올렸다. 1948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영화 속 패션의 역할을 강조하며 최우수 의상 디자인상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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