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 포인트

한여름 밤을 추억하는 다섯 작가의 에세이

2024.07.05

by 김나랑

    한여름 밤을 추억하는 다섯 작가의 에세이

    누구나 잊지 못할 여름이 있다. 뜨겁게 달궈졌다 식은 밤에 지난날을 아련히 추억하다, 그것이 꿈처럼 아름다운 한낮이었는지, 진짜 꿈이었는지 몽롱해진다. 당신의 이 계절은 어떤가.

    ‘Nabi 09’, 2015, C-print, 90×120cm

    여름밤은 지나가고

    지금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너는 물었다. “너희 동 옆에 있는 벤치에서 잠깐 보자.”

    나는 전화기를 든 채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후 9시였고 이제 막 밤이 된 듯 가로등 옆으로 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직 열대야가 시작되지 않아 공기가 선선했다.

    종강한 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매일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여름방학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떠오르면 소설 쓰는 노트를 꺼내서 몇 줄 썼고, 진짜 쓰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다시 몇 줄을 지웠다. 대학에 입학한 뒤 한 학기가 지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공 공부는 재미없고 시시한데 위대한 작가는 너무 많고 읽을 책은 그보다 더 많았다. 시도 소설도 뜻대로 써지지 않았고 마음을 끄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 보니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버렸다.

    그래, 잠깐 보자, 하고 시원스럽게 대답하지 않은 채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집 앞에 나가는데 씻고 옷 갈아입는 것도 귀찮고 그냥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내일 보면 안 될까, 하고 말하려는데 네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잠깐 얼굴만 보자고 했다. 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고 무거웠고, 그게 웃겨서 나는 “야, 너 군대 가냐?” 하고 물었다. “그건 아닌데, 그냥, 우리 본 지도 오래됐잖아” 하며 네가 조금 웃었다. 알았다고, 벤치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묶은 뒤 입고 있던 민소매 티셔츠 위에 칠부 셔츠를 걸쳤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계단 창 너머, 가로등 옆 벤치에 앉아 있는 네가 보였다.

    너와 나는 어릴 때부터 한 아파트에 살았고 초등학교 동창이었지만 한 번도 친구인 적은 없었다. 그저 아파트와 학교를 지나다니며 안면이 익은 정도였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야 둘 다 아는 친구의 소개로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걸어서 등교하는 동안 너와 나는 종종 아파트 후문에서 마주쳤다. 네 입장에서 나를 만나는 건 지각 위험신호였고 너를 보면 난 지각은 면한 것 같아 안도하며 여유롭게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5분 동안 우리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덕분에 금방 왔다” “사실 어제 기분 나쁜 일 있었는데 많이 괜찮아졌어” 같은 말을 나눈 뒤 각자 교실로 들어갔다.

    대학생이 된 뒤 네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모인 뒤로 종강까지 둘 다 바쁘게 지냈다. 그때 생일 모임이 끝나고 집 앞까지 같이 걸어왔을 때 너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술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

    “많이 기다렸지?”라고 묻자 벤치에 앉아 있던 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 앉으려는 나를 보더니 오래된 벤치 위를 손으로 여러 번 쓸어내렸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밝은 달과 옅은 어둠 속에 잠긴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하며 너는 목덜미를, 나는 다리를 긁적거렸다. 우리는 모기를 피해 좀 걷기로 했고 아파트 정문으로 나가 고등학교 앞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아파트 쪽으로 돌아왔다. 등굣길에 만나 같이 얘기를 나누던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대학 생활은 시시하고 우리는 초라하고 청춘은 짐작과 달랐다. 그때 우리가 꿈꾸던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때 너는 헤어지기 아쉽다고 했고, ‘나는 내일 할 일도 없는데 놀자’ 싶은 마음이 들어 우리는 새벽까지 영업하는 상가 레스토랑으로 갔다. 메뉴판에 돈가스와 정식 같은 식사류도 있고 커피와 홍차 같은 음료와 병맥주도 있는 오래된 레스토랑이었다. 환한 곳에서 보는 네 얼굴은 고등학생 때보다 야윈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인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콜라를 마시며 너는 다음 주부터 며칠 동안 농활을 갈 거라고 했고, 군대는 언제쯤 갈 거고 제대하면 복학해서 어디를 목표로 준비를 하고, 같은 얘기를 했다. 그런 뒤 나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며칠 뒤에 시작할 아르바이트 외에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내 말을 들은 네가 “방학 때 여행 안 가? 연애는? 사랑 안 할 거야?”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내가 손사래를 치자 “학교에서만 찾지 말고 두루 살펴봐” 하며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래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 봄부터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나는 모든 연애에 냉담해진 상태였다. 내 마음에는 봄도 여름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천천히 젓자 너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 네가 생각한 나에 대해, 나를 떠올리면 마음에 생기는 어떤 파문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했다. 나는 등굣길에 만나 얘기를 하던 우리, 같이 걷고 장난을 치고 가끔 진지한 편지를 주고받던 우리, 생일에 친구들과 모여 농담을 주고받던 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작은 얼음 알맹이만 남은 컵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잘 모르겠어”라고 하자 네가 내 쪽으로 뻗었던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고 레스토랑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이 그 순간을 채웠다. 그날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무슨 얘기를 하며 집까지 걸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의 분위기는 레스토랑에 들어가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농활 잘 다녀오라고 했고, 너는 아르바이트 잘하라며 응원해주었다.

    여름방학 동안 이어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던 밤에 나는 우리 동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너를 보았다. 너는 긴 머리에 잔꽃 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 친구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천천히 아파트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어떤 웃음소리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실려왔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현관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보았을 때 너는 그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다정하고 하나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인생에서 어떤 여름밤이 지나가고 있음을,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그렇게 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유미 소설가

    Decoding Scape 20’, 2011, C-print, 160×125cm

    촉각적 날들의 토끼 굴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따지자면 석 달에 한 번 정도? 그마저도 뻔하고 시시한 내용이라 남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깃거리가 못 된다. 꿈은 상상력의 원천이라는데 그처럼 중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다니,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꽤나 아쉬운 일이다. 스티븐 킹은 여행 중에 비행기에서 꾼 악몽을 바탕으로 <미저리>의 초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열아홉 살의 메리 셸리 역시 꿈에서 본 기이한 괴물을 소재로 <프랑켄슈타인>을 썼다. 이런 일화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된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바랄 법한 요행이 현실로 이루어진 느낌이랄까? 잠들어 있는 사이에 웬 우렁 각시가 찾아와 나 대신 뚝딱 글을 완성한 것이다. 우렁 각시를 어시스턴트로 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다니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성실한 소설가의 뇌는 24시간 풀가동 상태인 것이다. 비행기에서 선잠이 든 동안 작가의 무의식이 그를 대신해 꾸역꾸역 글을 쓸 만큼.

    내게도 비슷한 꿈을 주기적으로 반복해 꾸는 하찮은 재능이 있긴 하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온 다케노우치 유타카를 기억하는지? 그처럼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배우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로 스킨십을 나누는 꿈이 바로 그것이다. 스킨십 상대는 매번 바뀌는데 하나같이 송충이 눈썹에,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올드패션드 미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외모지만 그렇듯 꿈에서나마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상대가 완전히 달라 보이면서 애정이 마구 샘솟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상태가 1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파트너가 등장해 그 자리를 홀랑 넘겨받는다. 이 꿈의 문제는 잘 나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깨어난다는 데 있다. 이제 좀 재미있어지나 싶은 찰나에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놀라울 정도로 매번 똑같은 결말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나의 상상력 부족 탓이 아닐까 싶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것일 테니까···

    꿈을 적게 꾸는 일상과는 반대로, 요즘 들어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장면을 꿈처럼 느끼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그때 내가 정말 거기 있었나?’ ‘그런 행동을 했던 사람이 진짜 나였나?’ 하면서 지나간 일을 아슴아슴 떠올리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즐거운 추억이 불쾌한 사건으로 바뀌기도 하고, 오랫동안 쥐고 있던 의문이 차츰 풀리기도 한다. 아마도 소설을 쓰면서부터인 것 같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억의 구슬’에 저장된 슬픔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으로 바뀌듯, 시차를 두고 과거를 더듬는 과정에서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겪는 것이다. 최근 소설을 쓰면서 무심결에 건드린 기억의 구슬은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작업실로 향하는 서른다섯의 나’이다. 뭐랄까··· 그해 여름은 정말이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다.

    2017년 7월 나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고 있었다.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아직 한국에 수입되기 전, 일복이 터지다 못해 장마철 계룡산 계곡물처럼 철철 넘쳐흐르던 시절이었다. 그런 처지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작업실을 얻은 건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매체에 싣는 글과는 별도로 좀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기는 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꿈 말이다. 그렇다고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고, 다른 에디터들처럼 출판사로부터 그럴싸한 기획의 단행본 출간을 제안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때 내게는 작업실을 얻는 것이 마치 고기를 구워 먹고 후식으로 냉면을 시키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7월호 마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녘 택시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결심한 것이다. 그래, 내일 당장 냉면을··· 아니 작업실을 얻어야겠어!

    다음 날, 나는 다소 고전적인 방법으로(‘피터팬’의 도움을 받아) 형편에 맞는 작업실을 구했다. 다 무너져가는 상가 건물 3층에 자리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 사무소를 연상케 하는 넓고 삭막한 공간이었다. 책상, 냉장고 등 최소한의 가구와 가전이 구비된 작업실 한쪽에는 질긴 천으로 짠 무지개색 해먹이 사선으로 걸려 있었다. 앞선 세입자가 침대 대신 사용하던 물건을 주인이 그대로 남겨둔 듯했다.

    이후 아무도 모르는 나의 은밀한 작업실 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매일 저녁 퇴근 후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작업실이 있는 종로5가로 향했다. 불 켜진 술집과 모텔 골목을 지나 상가 계단을 오를 때면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에어컨이 없는 여름의 작업실은 밤에도 온실처럼 덥고 습했다. 나는 그곳에서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음을 들으며 고집스럽게 더위를 견디다 자정 무렵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노트북을 열고, 일기 비슷한 글을 타이핑하면서. 기록적인 폭염으로 역대 최고기온을 연일 갈아치우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해 여름은 시각적 풍경이 아닌 촉각적 감각으로, 찌는 듯한 더위와 기묘한 외로움의 시간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작업실에서 쓴 글은 지금도 내 비공개 블로그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스쳐가는 생각의 파편을 옮겨 적은 메모 같은 글들에 불과하지만, 그런 기록마저 없었다면 나는 그 시절을 정말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겼을지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가 예전에 쓴 글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부끄럽지만 그때 쓴 글을 하나만 공개해보겠다. 제목은 ‘지금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 내용은 이렇다. “평생 무식하게 살다가 죽을까 봐 불안하다. 이 나이에 운전은커녕 자전거도 못 타는 게 불안하다.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갈수록 못생겨지는 게 불안하다. 건강검진을 다음 해로 미룬 게 불안하다. 시대에 뒤처지는 기분이 들어 불안하다. 회사가 망할까 봐 불안하다···” 이처럼 한심한 글만 끼적이다가 허무하게 끝난 작업실 생활이지만, 얼마 전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면서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3개월 남짓 머물던 그 시공간이야말로 소설이라는 이상한 나라로 나를 빨아들인 최초의 토끼 굴이었다는 것을.

    여담 하나. 작업실에서 쓴 마지막 글의 제목은 ‘해먹에 누워 자다가 하늘을 나는 꿈을 꾼 날’이다(고뇌하는 예술가처럼 미화된 기억 속 나와 달리 현실의 나는 책상에서 부지런히 글만 쓰진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꿈만큼은 지나칠 만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허공을 가르는 몸의 감각이랄지 공중으로 솟구칠 때 얼굴을 때리던 바람 같은 것을 지금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근사한 ‘인생 꿈’이었다고 할까. 얼마나 좋았으면, 깨자마자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까지 했을 정도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곳이다(세상에는 그처럼 쓸모없는 공동체도 존재한다). 꿈에서 다케노우치 유타카를 다시 만나는 법 같은 것도 누가 공유해주면 좋겠는데. 강보라 소설가

    ‘Nabi 13’, 2015, C-print, 120×160cm

    아빠 꿈

    “아빠, 왜 우리는 대화도 없이 수십 년을 살았을까.” 아빠 손을 잡고 산을 오르며 내가 말했다. 아빠가 무슨 대답을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걸어서 산을 올라갔다. 아빠의 두 다리는 튼튼하고, 두 손도 움직인다. 그건 아무렇지 않은 사실이다. 아빠가 건강했을 때 아빠는 그렇게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혼낼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산을 오른다. 함께 산에 온 건 처음이다. 아빠는 땀을 흘린다. 아빠는 여름 산을 좋아한다. 땀이 많이 나니까. 아빠는 그걸 즐거워한다. 주말마다 친구들과 산에 갔었다. 친구들보다 산에 잘 오른다는 것은 아빠의 자부심이었다. 우리는 정상에 도착했다. 지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빠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유연하고 강하게. “아빠 멀리 가지 마요. 빨리 가지도 마요. 제가 슬플 거 같아요.” 바람이 몰려오자 아빠는 멀리 가버렸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날 수 없다. 아직은. 아빠가 사라진 건 슬프지만 아빠가 자유로워 보여서 좋았다. 태양이 뜨겁고, 뜨거운 태양을 아빠가 좋아해서 더 좋았다.

    아빠는 3년 전 3월에 쓰러졌다. 여름을 병원에서 보내고 가을에 퇴원했다. 아빠가 병원에 있던 여름에 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아빠가 퇴원해서 다시 친구들과 산에 가는 희망. 아빠가 아빠의 삶을 이어가는 희망. 나와 함께 무엇인가 하는 모습은 떠올리지 않았다. 함께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어서. 퇴원을 하고 아빠는 나와 친구가 되었다. 나는 아빠가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느꼈다. 그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아빠의 세계는 아파트 303동 입구에서 놀이터까지, 100m로 바뀌었다.

    “다다다다 발소리 내며 아빠가 달려오는 모습을 자주 상상하는데, 그런 꿈을 꾸는 건 미안한 일이잖아”라고 혼잣말한다. 하지만 뭐가 미안한지 잘 모르겠다. 어느 새벽에 정말로 그 꿈을 꾸었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눈물이 나야 할 것 같은데 슬프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그런 모습을 본 거니까. “아빠, 아빠가 다다다다 달려오는 꿈을 꾸었어요”라고 말하자 아빠가 울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를 안으며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아빠를 안은 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처음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아빠가 우는 걸 본 것도. “뇌졸중의 영향이에요.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지신 거예요.” 의사가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아빠가 솔직해졌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자주 아빠 꿈을 꾼다. 계절은 여름. 기온이 매우 높은 날. 아빠는 팔뚝이 보이는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다. 힘줄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강의 줄기 같다. 젊은 시절의 아빠인데 놀랍게도 외모가 지금과 비슷하다. 잠에서 깨면 나는 꿈의 장면들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예언처럼 느껴져서. 아빠에 대한 예감은 대부분 슬프다.

    두 달 전, 같이 놀이터로 운동을 하러 갔는데 아빠가 말했다. “이 나무가 무궁화야. 꽃 피는 걸 볼 수 있을까. 그 전에 내가 죽지 않을까.” ‘아빠 그런 말 하지 마요’라고는 못하고, 아빠 손을 세게 잡았다. 날아가지 못하게. 며칠 전, 그 위치에 다시 갔는데 파란 잎이 돋아 있었다. “아빠, 여름이 빨리 왔네요. 곧 무궁화에 잎이 가득하겠어요. 금방 꽃도 필 것 같고.” 아빠는, 아빠가 한 말을 기억할까? 아빠와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20분쯤 있다가 집에 온다.

    ‘저는 아빠가 보고 싶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요.’ 아직 이런 말은 속으로만. 어릴 때 가족이 여름 피서를 갔었다고 한다. 엄마 말에 의하면, 아빠가 배낭과 수박을 들고 엄마는 나를 업고 형은 걸어서 계곡으로 가고 있는데, 형이 “아, 씨발, 왜 이렇게 멀어”라고 했다고 한다. 가족이 함께 여행한 기억 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고, 나에겐 그저 이 말만 남아 있다. 그래서 꿈을 꾼다면 그날의 오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태양이 아령 같은 빛을 쏘아대고 아빠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앉아서 쉰다. 음, 넷이 말은 별로 하지 않을 것 같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잠을 잘 것 같다. 재미는 없겠다. 그래도 아빠가 잘 움직이니까 기분은 좋겠지. 하지만 굳이 이런 꿈을 꾸고 싶지는 않다. 아빠가 정말로 잘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날이 더워져서 요즘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아빠랑 목욕을 한다. 겨울엔 한 번 혹은 두 번 했다. 아빠 목욕을 도와드리는 건 힘들지만, 아빠랑 목욕을 하는 게 싫지는 않다. 해보니까 꽤 재밌다. 아빠는 “물이 너무 뜨겁다” “너무 차갑다” “머리가 가렵다” “비누가 눈에 들어갔다” 등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한다. 씻고 나오면 수건으로 아빠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입혀드린다. 아빠는 한쪽 다리와 한쪽 손이 불편해서 무엇이든 딱 반만큼만 한다. 아빠는 잠들기 전에 드라마를 보며 울고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며 말을 건다. “아빠, 지금 슬픈 장면 아니잖아?” 아빠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움직인다. 생각하는 것이다. 왜 우는지. 아빠가 우는 건 당연하다. 삶의 많은 것이 갑자기 멈추었으니까. 나는 울지 않지만 우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슬픈 날들이 아니다. 아빠가 옆에 있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산책을 하고 목욕도 하니까. 가끔 이게 꿈같다. 영원히, 정말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이 계절의 뜨거운 꿈. 이우성 시인

    ‘Private Sacred Place P #8’, 2009, C-print, 160×120cm

    사막의 밤

    와디무사 여행 마지막 날, 나는 함께 발렌타인 인에 투숙 중이던 보스니아 출신 20대 청년과 마주 앉아 있었다.

    잡지사 기자로 일한다는 청년은 동유럽에서 요르단을 지나 이스라엘로 향하는 세 달짜리 여행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고릴라 같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손가락과 목에는 장신구가 가득했다. 하나같이 큼지막한 것들로 고목나무에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았다. 우리는 말보로 한 갑을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셨다. 1시간이 지난 뒤에야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내 성을 들으면 절대 까먹지 못할걸. 청년이 말했다. 코마네치나 게오르규, 이바노비치 같은 가문 출신이었다면 지금쯤 청년의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끙끙대고 있을 것 같다. 놀랍게도 청년의 이름은 드라큘라였다. 그러니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은 미스터 드라큘라였다.

    “드라큘라의 피를 물려받았단 말이야. 아이러니하지 않아?”

    호스텔 투숙객들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옮기며 대화 상대를 찾아다녔다. 파친코 가게에서 일한다는 오사카의 가토 씨는 40대가 되어 처음으로 해외에 나왔다고 했다. 하와이안 티셔츠 단추 사이로 얼룩덜룩한 그림이 보였다. “당신은 야쿠자입니까?” 농담을 좋아하는 나는 서툰 일본말로 물어보았다. 크게 웃으며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한 가토 씨는 역시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야쿠자가 아닙니다. 나는 야쿠자였습니다.”

    두바이 호텔에서 일한다는 깡마른 일본 대학생, 학교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 중이라는 독일인, 환경 운동가인 동년배 칠레인이 차례로 테이블에 합류했다. 다시 맥주 몇 병이 오갔다. 말보로는 던힐이 되었다가 카멜로 바뀌었다. 누군가 잠자리에 들면 새로운 이방인이 나타나 빈자리를 채웠다.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던 드라큘라 앞에서 가토 씨도 지지 않고 문신 자랑을 시작했다. 잉어가 영어로 뭔지 몰랐던 가토 씨는 내 몸에 새겨진 피시를 좀 보라고 했고, 드라큘라는 너희 나라에서는 어쩌자고 마피아들이 몸뚱이에 물고기를 새겨 넣냐며 응수했다. 나중에 돌아보니 두 사람은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떠들썩한 식당에서, 언젠가부터 구석에 자리 잡은 두 남자만 딴 세계인 듯 고요했다. 한 명은 짙은 눈썹과 뾰족한 수염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빼닮은 외모였고 다른 한 명은 부드러운 금발의 곱슬머리였다. 둘은 가운데 놓인 맥주 한 병을 차례로 나눠 마셨다. ‘연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붉은 사막에서 두 사람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같은 투어 팀에 속해 있었다.

    토요타 트럭이 롤러코스터처럼 사구를 오르내렸다. 스카프로 입을 가려도 모래가 연신 들이쳤다. “창문을 닫아.” 베두인 가이드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창문 손잡이가 고장 난 것만 아니라면. 나는 조수석, 발렌타인 인의 말수 적은 두 남자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더운 날씨에도 바싹 붙어 앉은 두 사람을 보고 ‘역시 연인이구나’, 생각했다.

    둘은 청각장애인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엄청나게 수다스러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베를린의 미용사, 금발은 모스크바 레스토랑의 웨이터라고 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손짓으로 전달하기에는 난도가 높은 질문이었다. 대체로 ‘어떻게’ ‘누구와’ ‘무엇을’ 등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포기해야 했다. 가이드가 오후 이동을 낙타로 할지 자동차로 할지 물어보았을 때 모스크바의 금발 웨이터는 차를 타고 가다 낙타 고기를 먹자는 거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막 한가운데 설치된 천막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지내게 될 숙소였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남자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신을 노르웨이 출신 사진작가라고 소개한 남자는 10년 전만 해도 엘리베이터 수리공으로 일했다고 했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나만큼이나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다.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 사람이지 아마?” 내가 물었고 사진작가는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두세 번 이어졌다. 우리는 사막을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와디 럼 사막은 원래 이름보다는 붉은 사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마션> 촬영지로 더 유명할 것 같다. 석양이 오렌지빛으로 사막을 물들였다. 부드러운 모래가 바람에 날아다녔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사체가 드러났다. 숨어 있던 곤충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천막을 나오니 비로소 사막의 밤이었다. 바위 동굴에서 빠져나온 박쥐가 주위를 배회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려면 20분 정도 걸려.” 노르웨이의 사진작가가 말했다. “그동안은 밝은 빛을 보면 안 돼.”

    우리 넷은 말없이 차가운 모래 위에 누웠다. 드라큘라와 전직 야쿠자를 양쪽에 두고 대화하던 밤과는 평온해서 낯선 시간이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뺨에 닿는 기분이 좋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20분 동안 아무 생각이나 했다. 직장, 가족, 연애 같은 것. 고민, 과제와 명분. 어떤 생각은 끈질기게 들러붙어 한참을 괴로워하게 만들었고 어떤 생각은 신발 속에 들어간 돌멩이처럼 같은 자리를 쿡쿡 찌르곤 했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죄책감과 해방감, 그 사이 애매한 위치에 나는 놓여 있었다. 분명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고,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그걸 고칠 방법은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사진작가의 말에 눈을 떴다. 그곳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듯한 별들이 가득 떠 있었다. 지평선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였다. 은하수 한가운데로 기다란 별똥별이 지나갔다. 네 사람이 연이어 소리를 질렀다. ‘아, 소원을 못 빌었네.’ 생각하던 순간 내가 아는 모든 사람과 내가 가진 모든 고민을 위해 기도해도 좋을 만큼의 별똥별이 쏟아져 내렸다. 연신 탄성이 이어진 후 시선은 말없이 하늘을 향했다. 천체가 느린 속도로 회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름이었고, 밤이었다. 누구도 말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고요했다. 노르웨이의 사진작가가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소리가 사라진 사막의 밤이 깊었다. 기온은 조금 더 내려갔다. 담요를 끌어 올렸다. 하승민 소설가

    ‘Mythic Scape 15-Tree of Life #3’, 2007, C-print, 90×120cm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지 못했지만, 이런 제목을 쓴 이유는 정말 밤의 해변에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 속 김민희 배우처럼 헝클어진 듯 정돈한 머리와 우아한 몸짓은 아니고, 1인용 텐트에서 패딩을 입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늦여름이었지만 밤의 해변에서 노숙하기는 꽤 추워 겨울옷 가져온 나를 칭찬하면서.

    여름철 피크가 지난 포항의 작은 바닷가 마을은 민가 몇 채만 있고 조용했다. 유일한 횟집은 폐업해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숨은 서핑 스폿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파도가 귀한 한국에서 서퍼들이 모르는 지역이 남아 있을 리 없는데 말이다. 역시나 서핑한답시고 입수해 오후 내내 파도에 메다꽂히기만 해 일찌감치 텐트에 들어갔다. 친구가 관 사이즈냐고 놀린 작은 텐트였다. 높이가 낮아 앉을 수도 없어 계속 누워 있었다. 해가 져도 딱히 무섭지 않았다. 내가 독립적으로 느껴져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덥다고 현관문을 열고 잤던 스무 살의 여름을 회상하면 지금은 뜨악하지만 그때는 자연스러웠다. 유년의 고향 집에서는 그랬으니까. 포항의 그 여름도 당시의 내겐 자연스러웠다.

    한밤, 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술 취했나 보군. 우는 주사라니 최악이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통곡은 계속됐다. 듣다 보니 울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았다. “OO야! OO야!” 슬슬 걱정이 됐다. 친구끼리 술 먹다가 한 명이 바다에 빠졌나. 그래서 저리 애타게 찾는 건가. 소란스러우니 누군가 나오겠지.

    하지만 밤의 해변엔 그녀와 나만 있는 것처럼 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당시 텐트 안에선 시간 개념이 모호해져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여자의 울음은 분명 꾸준하고 지속적이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계속될 것처럼. 하지만 나는 텐트에 누워 귀만 더 기울일 뿐 꿈쩍하지 않았다. 그게 나란 인간이다.

    아침의 해변. 버너에 라면을 끓이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 얘기를 소설로 써야지. 그런 내가 섬뜩해지면 그 여자는 술 취했을 뿐이라고, 정말 뭔 일이 났으면 사이렌이 울렸을 거라고 자위했다. 그저 나는 이 기묘한 경험을 소중히 여기며 언젠가는 써먹어야지, 이런 경험은 흔하지 않으니까라고 여겼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에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했다. 픽션이라기보다 겪은 일을 극적으로 보이려고 애쓴 우스운 습작이었다. 단편은 끝맺지 못했다. 그 뒤로도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나란 인간은 소설을 쓸 자격이 없다고 무언가가 막는 것 같았다.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주제의 에세이를 준비하며 그녀가 다시 떠올랐다. 강렬한 여름밤이기도 했거니와 ‘가짜의 삶’을 생각하던 중이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 대단할 줄 알았다. 회사 일이 많고 체력이 달려서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귀한 일을 해낼 것 같았다. 그것은 스스로 만족하는 소설을 완성하거나, 리치 언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잡지에 실릴 한 편의 칼럼도 진실로 쓰지 않았다. 그 자각이 올여름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다.

    유재석의 유튜브 채널 뜬뜬의 ‘가짜의 삶은 핑계고’를 봤다. 패널로 참여한 홍진경은 왜 자신이 ‘가짜의 삶은 핑계고’ 콘텐츠에 섭외받았는지 의아해했다. 매니저는 홍진경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누나,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역시 홍진경은 웃겨(언니인데 죄송합니다). 그렇게 넘겼는데, 이번 출장에서 ‘가짜의 삶’이란 문구가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아는 척하다 무식을 들킨 날이었다. 너그럽게 넘어가준 동행들이 고마우면서도 어찌나 창피한지 숙소에서 뒤척이다가 눈물까지 났다. 나는 왜 가짜로 살고 있을까.

    마흔을 넘어가면서 인생 두 번째 챕터를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다 소용없이 느껴졌다. 가짜가 고민해서 뭐가 나오겠나. 나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나 가짜 같니?” 그는 잘은 모르지만 자각했다는 자체가 큰 성과라고 회신해주었다.

    다음 날 나는 자각을 잊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카페에서 노트북을 켰다. 환경미화원이 진짜로 길을 쓸고, 바리스타가 진짜로 커피로 내리고 있었다. 이번 글은 가짜를 좀 걷어내자. 여름밤 해변에서 울부짖던 여자는 이 글만큼은 완결하게 해주었다. 그 여름의 일화는 내가 가짜로 산다는 증거로서 기능했다. 글을 쓰는 중에도 내가 카페 주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가짜로 갔다가, 솔직하게 글을 쓰려는 진짜로 왔다가, 글에 있어 보이는 양념을 칠까 고민하다, 내내 흔들렸다.

    이번 여름은 ‘가짜의 삶’을 되뇌려 한다. 지난 시간을 가짜로 보냈다니 슬퍼지지만 내가 감당할 몫이다. 답을 찾다 몇 번의 여름이 지날지 모른다. 솔직히 명쾌해지리란 기대는 없지만, 적어도 이전과는 다른 계절이 되기를.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VK)

    아티스트
    이정록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