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에서 부활한 SF 영화 속 패션
영화의 재미 중 하나는 패션을 보는 맛입니다. 멋도 멋이지만 등장인물과 서사를 파악하는 데 좋은 열쇠가 되어주죠. 그 재미를 극대화하는 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입니다. 우리는 생경하고 신기한 옷차림을 보며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 세기 뒤의 풍경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이런 영화는 다가올 미래를 그려내는 것이 숙명인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땔감이 되어줍니다. 납작한 화면 속에만 존재했던 미래의 패션은 이들의 손길을 거쳐 한층 구체화되죠.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래를 현실로 소환하는 겁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SF 영화 속 패션과 이를 영감으로 삼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모았습니다. 시대별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르더군요. 영화 속 여성상이 여성복을 비롯한 패션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메트로폴리스 | 1927년, 프리츠 랑
최초의 SF 영화죠. 영화의 배경은 2026년, 노동자들은 지하 세계에, 자본가들은 지상 세계에 살고 있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이야기는 주요 캐릭터, ‘마리아’라는 여성과 똑같이 생긴 인조인간이 탄생하면서 진행됩니다(최초로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인조인간의 몸체는 차갑고 딱딱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로봇이지만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여성임을 명백히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죠. 단단한 금속으로 조각된 여성의 실루엣은 여성복 디자이너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었습니다.
티에리 뮈글러의 1995 F/W 컬렉션 룩이 대표적입니다. 얼마 전, 젠데이아가 <듄: 파트 2> 프리미어에 입고 나오기도 했죠. 영화에서처럼 여성의 신체를 강조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갑옷’입니다. 같은 컬렉션에 등장한 금빛 보디수트도 같은 맥락이고요. 이후 사이보그를 연상시키는 금속 보디수트는 꾸준히 디자이너들의 런웨이에 등장해왔습니다. 우리의 몸과 과학기술의 거리가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죠.
2012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의상 디자인상을 수상한, 1920년대 배경의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2012 컬렉션에는 유독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룩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리카르도 티시는 아예 지방시 2012 S/S 꾸뛰르 컬렉션을 해당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밝히기도 했죠. 탱크 톱 위를 주얼리로 장식한 룩을 영화 속 노동자의 옷차림과 비교하면서요. 한편 SF의 미학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장 폴 고티에는 2012 F/W 꾸뛰르를 통해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단순히 영화뿐 아니라 재즈 시대였던 192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를 섞었거든요. 물론 거의 마지막에 등장한 금빛 보디수트가 가장 인상적이긴 했지만요.
바바렐라 | 1968년, 로제 바딤
제인 폰다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영화죠. 영화도 영화지만 41세기의 우주 여전사 역을 맡은 제인 폰다의 패션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플라스틱, 모피, 금속 등 독특한 소재, 기하학적이면서 보디라인을 강조한 핏 등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느낌이 강하죠. 장난스럽고 낙관적인 동시에 우주 시대를 연 1960년대 패션이 충실하게 반영된 건데요. 그 유명한 초록색 드레스는 우주 시대 패션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 파코 라반이 디자인했습니다(영화의 의상 디자이너는 자크 폰테레이(Jacques Fonteray)입니다). 암울한 미래를 그린 여타 SF 영화와 달리 만화적이고 엉뚱한, 긍정적인 미래를 담았죠.
런웨이에서는 1960년대 우주 시대 패션을 차용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모티브가 되어주었습니다. 제레미 스캇 2016 S/S 컬렉션의 알록달록한 투피스와 드레스에서는 바바렐라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헤어스타일까지 쏙 빼닮았거든요. SF적 요소로 가득한 장 폴 고티에 2009 F/W 꾸뛰르의 바바렐라 코르셋은 너무나도 유명하죠. 다면적 구조로 미래지향적인 여성미를 강조한 실루엣, 그 위에 걸친 풍성한 모피 아우터까지, 낭만적인 우주 여전사 그 자체였습니다. 라반의 디테일은 말할 것도 없고요.
블레이드 러너 | 1982년, 리들리 스콧
2019년을 배경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는 미래주의 패션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자체에 더 집중한 모습이었죠. 프리스의 펑크 패션, 조라의 비닐 옷 등 아이코닉한 패션이 많지만 가장 인상 깊은 건 배우 숀 영이 맡은 레플리칸트, 레이첼의 의상입니다. 의상 디자인을 맡은 마이클 카플란은 대본을 읽고 이 영화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제작된 어둡고 타락한 세계를 담은 영화적 스타일을 일컫는) 필름 누아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영화 의상 디자이너였던 아드리안(Adrian Adolph Greenberg)의 맞춤형 수트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텍스처의 원단, 강조된 어깨 라인, 로봇처럼 날카롭게 재단한 파워 수트, 과장된 실루엣이 특징인 레이첼의 의상이 탄생하게 됩니다. 강인하면서도 불안하고, 미래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죠.
가레스 퓨, 올리비에 테스켄스, 프라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많은 디자이너가 영화 속 레플리칸트의 요소를 차용했습니다.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건 알렉산더 맥퀸이었죠. 그는 지방시 1998 F/W 컬렉션을 대담한 동시에 공격적인 뉘앙스의 룩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수트가 아주 많이 등장했지만 매니시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한 여성의 이미지가 더 강했죠. 분노와 불안이 응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옷의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습니다.
매트릭스 | 1999, 워쇼스키 자매
미래지향적 패션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어준 영화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레더 & 블랙 룩에는 당시 시대상도 담겨 있는데요. 2000년대를 앞둔 1990년대 말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마음과 당시 성행했던 미니멀 패션을 매트릭스의 암울한 세계관에 녹여냈습니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분위기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죠.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코트도 인상 깊은데요. 의상 디자인을 맡았던 킴 바렛(Kym Barrett)은 한 인터뷰를 통해 움직일 때마다 흩날리는 망토 효과를 내기 위해 선택했다고 밝혔어요. 신화 속 영웅처럼요. 더불어 캐리 앤 모스가 분한 트리티니의 가죽 코트와 타이트하고 매끈한 PVC 질감의 룩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셀럽들을 통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림자처럼 잘 보이지 않고, 잘 달리거나 잘 싸우기 위한, 오직 실용성을 목적으로 한 옷이었죠. 트리니티의 강한 신념과 독립적인 캐릭터를 단번에 납득시킬 수 있는 패션이었습니다.
존 갈리아노는 영화가 개봉한 지 몇 달 만에 디올 1999 F/W 꾸뛰르 컬렉션을 매트릭스의 요소로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왁싱 처리한 패브릭과 가죽을 양껏 활용하며 어딘가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무드까지 추가했죠. 이후 매트릭스는 패션계에서 하나의 미학이자 장르로 자리 잡습니다. 모두가 가죽 트렌치 코트와 팬츠, 투박한 부츠와 선글라스, 올 블랙의 시크하고 섹시한 면모에 빠져들었죠. 이 매트릭스 친화적 미학은 뎀나의 손길을 거친 발렌시아가와 베트멍 2017 F/W 컬렉션을 시작으로 2017년과 2018년에 한 번 더 굳히기 작전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페미니즘 운동까지 맞물리며 모두가 장식적이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실용적이고 파워풀한 여성복을 내놓기 시작했죠. 같은 시즌 발망과 알렉산더 맥퀸의 런웨이에서도 비슷한 실루엣이 포착되었고요. 알렉산더 왕은 2018 F/W 컬렉션을 통해 워킹 걸과 매트릭스 스타일을 영리하게 결합해냈습니다. 한마디로, 매트릭스 미학은 패션계에서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스타일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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