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통한다는 걸 내가 먼저 증명하겠다” – 지용킴의 김지용
젊은 디자이너들이 짓는 미래, ‘2024 LVMH’ 디자이너 5인과의 인터뷰
이들이 꿈꾸고 만드는 것이 곧 패션의 미래가 된다. 2024 LVMH 프라이즈 세미 파이널에 선정된 5개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을 만났다. 브랜드를 만들고 키우며 자신만의 길을 가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패션과 미래.
태생적으로 큰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브랜드 ‘지용킴’의 창립자이자 디렉터, 김지용이 그렇다. 지용킴은 우연히 탄생했다. 문화복장학원을 거쳐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재학 중 일본의 대형 편집숍인 ‘GR8’로부터 졸업 컬렉션 전부를 바잉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뒤 부랴부랴 론칭한 게 시작이었다. ‘선 블리치(Sun Bleach)’라는 전례 없는 기법으로 세상 하나뿐인 옷을 만드는 그는 론칭 3년 만에 LVMH 프라이즈 세미 파이널에 이름을 올렸다. ‘빛바랜 옷’의 인식을 바꾸고, 패션계가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첫 컬렉션을 선보인 지 약 2년 반 만에 아시아 전체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석사 공부를 하고 있을 때부터 브랜드를 운영했으니,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더더욱!
지난 12월에는 삼성 패션 디자인 펀드를 수상했고, 2024 LVMH 프라이즈에서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최종 20인에 선정됐다.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느끼나?
길에서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꼭 상을 받아서는 아니고, 꾸준히 달려온 덕인 것 같다. 전시회를 개최하며 직접 만나뵌 분들도 많고.
외부인 입장에서 바라본 지금까지의 지용킴은 ‘탄탄대로’ 그 자체다.
나를 포함한 스튜디오의 모든 인원이 하루를 이틀, 삼일처럼 살고 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브랜드를 시작하다 보니 모르는 부분이 정말 많았다. 직접 부딪히며 배우는 시기를 지나 지금의 지용킴이 된 것 같다. 운이 많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쇼룸을 열 자본조차 없었던 브랜드 론칭 초기 팬데믹이 겹쳤고, 많은 바이어와의 줌 미팅으로 이어졌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다.
처음 패션과 사랑에 빠지며 꿈꿨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지금 그 꿈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꿨다. 실제로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니, 앉아서 디자인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지만! 꿈을 이뤘지만, 꿈꿔왔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한국의 패션계, 그리고 글로벌 패션계에 대한 지용킴의 생각이 궁금하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출신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주는 이점은 거의 없다. 영국과 프랑스, 심지어 일본과 비교하면 젊은 디자이너들을 이끌 만한 윗세대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2024 LVMH 프라이즈 쇼룸에서도 한국인 심사 위원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세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패션 시장의 파이를 키워나가는 것이 지용킴의 궁극적인 목표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슈퍼73과의 협업 기념 팝업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을 생각하고 런던이나 파리에서 쇼를 선보일 계획이 있는지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서울이 너무 좋아요”였다.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맞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 패션쇼를 선보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패션쇼란 엄청나게 비쌀뿐더러,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보며, ‘어떤 디자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데, 지용킴의 옷을 봤을 때는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패션에 푹 빠져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는 어떤 디자이너를 좋아했나?
듣기 좋은 칭찬이다.(웃음) 실제로 특정 브랜드나 개인의 디자인을 참고하는 걸 굉장히 경계한다. 어렸을 때는 디자이너보다 특정 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복식사도 공부하고, 워크 웨어나 데님, 군복 등을 모으는 취미도 있었고.
선 블리치 기법을 빼놓고는 지용킴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품이 탄생하나? 해가 잘 드는 장소를 찾아, 일정 시간 이상 옷을 햇볕에 노출시키는 식일까?
정확하다. 선 블리치를 하는 지용킴만의 장소가 있다. 원단 자체를 햇볕에 노출시킬 때도 있고, 옷을 완성한 상태에서 할 때도 있다.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다 보니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옷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한 달이 걸린다.
‘이 부분쯤에 색이 빠지면 좋겠다’와 같은 의도를 갖고 디자인을 하나? 아니면 모든 걸 태양에 맡기는 식인가?
정확히 반반이다. 물론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도 있지만! 최근 발매한 팩 티셔츠가 완벽한 예다. 햇빛에 노출하고 싶은 단면이 위로 향하도록 포장한 뒤, 팩을 진공상태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팩에 주름이 생기고, 주름 밑에 놓인 원단은 물이 빠지지 않게 된다. 이 팩 티셔츠처럼, 지용킴의 모든 옷에는 의도성과 의외성이 공존한다.
워낙 수고스러운 과정이다 보니,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맞다. 지금은 비공개 장소에서 선 블리치를 진행하지만, 오픈된 장소에 옷을 걸어놓았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근처에서 공사를 하시던 분들이 실수로 옷이 걸린 펜스를 건드려, 옷이 완전히 못 쓸 정도로 손상된 적이 있다.
결국 그 옷들은 폐기했나?
버리지는 않았다. 스튜디오 어딘가에 잘 찾아보면 있을 거다.(웃음)
제2차 세계대전 군복 등 다양한 빈티지 아카이브를 수집하고 있다고 들었다. 선 블리치라는 독특한 기법 역시 시간의 흔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성향에서 비롯한 걸까?
그런 성향에서 온 것도 분명 있다. 하지만 선 블리치 기법은 ‘세상에 없었던 옷을 선보이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했다. 나처럼 편집숍에서 옷을 구매하지 않는 사람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처음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전례가 없는 것은 물론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속 가능하다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한다면?
처음에는 업사이클링과 빈티지 원단만 활용했다. 유럽에 살 때는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장 등에서 쓰던 대형 벨벳 커튼을 구해 옷을 만들곤 했다. 빈티지 단추를 구매해 옷에 달기도 했고. 프린팅이나 염색은 물론 어떤 후가공도 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킬 일이 없다. 지용킴의 목표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대부분은 빛바랜 옷을 ‘못 입는 옷’이라 생각하지 않나. 지용킴의 옷을 보며 빛바랜 것도 멋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으면 한다.
빈티지를 판매하는 것과 다름없다. 빈티지를 소비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지용킴의 옷을 입는 것을 보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지용킴의 옷이 ‘보편적인 매력’을 지니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모든 옷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점 때문이다. 패션을 사랑한다면, ‘희귀성’에 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덧붙이자면, 지용킴의 최우선순위는 언제나 ‘제대로 된 옷’을 만드는 것이다. 선 블리치 기법은 다음이고.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점 역시 매력 포인트다.
전시장에서 색이 잔뜩 바랜 책, 물이 멋스럽게 빠진 거대한 패브릭 등이 있는 걸 봤다. 다른 사람이 만든 옷을 보며 영감을 받는 디자이너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옷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핏이나 실루엣보다는 그 이미지 자체를 참고하려고 한다. 잡다한 것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보니, 의외의 물건에서 영감을 받을 때도 있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을 만나며, 그들의 전통 의복을 접한 것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과거 인터뷰에서 여러 번 ‘오리지널리티’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이며, 그 관념은 지용킴의 옷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나?
내가 생각했을 때 멋있는 일을 하는 것이 곧 ‘오리지널’이다. 지용킴은 레퍼런스를 찾을 때도 늘 그 기원을 찾아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의복에는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하니까.
옷을 만드는 일, 직접 옷을 입는 행위, 그리고 내가 만든 옷을 누군가가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이 중 어떤 것이 가장 디자이너 김지용을 즐겁게 하나?
내가 만든 옷을 누군가가 입고 있는 것을 보는 일. 셀럽보다는 길에서 지용킴을 입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특히 그렇다.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고,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다. 일본의 한 세컨드 핸드 매장에서 지용킴의 옷을 입고, 우리가 룩북에 매치했던 슈즈를 신고 있는 점원을 마주친 적도 있다.
동료 디자이너, 혹은 업계의 친구와 최근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옷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아내가 9월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지금의 패션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명은 무엇일까?
시즌을 지속하는 것.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월세를 밀리지 않는 것. 정상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사명이다. 도매시장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폐업하는 리테일러도 너무 많고. 최근 런던을 방문해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지용킴의 옷이 궁극적으로는 패션업계, 그리고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면 하나?
사람들의 인식을 바꿨으면 한다. 나중에는 한국의 후배 디자이너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국 출신 디자이너가 이름을 내걸고 브랜드를 시작해도 해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내가 먼저 증명하고 싶다.
#THE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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