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시대의 인물이 된 ‘산드라 휠러’
산드라 휠러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언제나 맡은 배역을 치밀하게 탐구한다. 직감과 연기력, 타고난 판단력을 모두 갖춘 동독 출신의 이 배우가 <추락의 해부>를 거쳐 자신이 그토록 피하려던 시대의 인물로 등장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난도 높은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산드라 휠러(Sandra Hüller). 독일에서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인 그녀는 온 세상이 그녀를 주목하기 직전인 2019년, 보훔(Bochum) 극단의 연극 <햄릿>에서 햄릿으로 등장했다. 현대식 의상을 입고 독일어로 진행한 연극의 첫 장면에서 그녀는 양손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힘없이 내리깐 모습으로 무대에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친구 호라티오를 위해 썼던 오리지널 대사를 읊조린다. “혹 너의 한을 풀어주고, 내게 득 될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하라.” 휠러가 눈물을 참기 위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여기 있네요. 여기 있어.” 햄릿이 혼령과 직면하는 순간, 으스스한 배경음이 울려 퍼지며 휠러의 날숨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급격히 한 옥타브 낮아진다. 그녀는 더 이상 햄릿이 아니었다. “나를 동정하지 마라!” 혼령에 빙의된 휠러가 눈을 강하게 뜨며 빠르게 말했다. “나는 네 아비의 혼령이다. 밤에만 걸어 다닐 수 있고, 낮이면 화염 속에 갇혀 살아생전 저지른 내 죄가 불타 사라지기만 기다린다.” 휠러가 연기한 햄릿은 단순히 혼령을 목도한 게 아니라 혼령에 완전히 잠식된 모습이었다. 이전까지의 나긋나긋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노로 씩씩대는 휠러의 새로운 영은 아들에게 복종할 것을 종용하며 “Hör, hör, o, hör!(듣거라, 들어, 오, 들어라!)”라는 독일어 대사를 토해내듯 외친다.
이 장면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서웠으나 더없이 심오하기도 했다. 선대의 과오가 후대의 육신을 말 그대로 ‘좀먹는’ 모습을 통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죄와 부패를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그랬다. 독일 평론가들은 특히 무대예술의 역량을 한 차원 끌어올린 휠러의 연기가 보여준 날카로운 통찰력을 극찬했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 겔(Der Spiegel)> 역시 햄릿과 혼령을 오가는 휠러의 연기가 “일종의 퇴마 의식을 보는 것 같았다”고 언급했다.
얼마 전 만난 휠러는 <햄릿>을 준비하기 위한 시절로 돌아간 듯 망설임 없는 말투로 당시를 회상했다. “셰익스피어는 피의 복수가 만연하던 시대의 끝에서 그 희곡을 썼어요. 특히 결말부에서 아주 괴상한 방식을 택했죠. 끝에 가서 모두가 죽어버리잖아요. 결과적으로 이 극은 ‘이런 식은 옳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봐요.” 햄릿과 라에르테스가 결전을 벌이는 클라이맥스에서 보훔 극단의 햄릿은 물리적인 폭력을 피해 간다. 어느 쪽도 선뜻 먼저 공격하지 못한다. 대신 휠러와 라에르테스 역을 맡은 도미닉 도스 라이스(Dominik Dos-Reis)는 상대방, 그리고 피의 결투에 대한 요구와 싸우며 “Fang an(시작)”이라는 말만 번갈아 외칠 뿐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은 셰익스피어의 원문처럼 예상치 못한 용서의 제스처를 취하며 끝이 난다. “둘은 죽기 전 악수를 하고 ‘우린 우리 아버지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해요. 제게 그 장면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해당될 수 있는 모습 같아요.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모습이기도 하고요. 선조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반복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 그 과오의 고리를 끊는 것 말이에요.”
휠러는 최근 평단의 찬사를 받은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독일을 넘어 세계에서 인지도가 부쩍 높아졌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폭력과 폭력을 표현하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다룬 영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 쥐스틴 트리에(Justine Triet)의 <추락의 해부>에서 휠러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산드라 보이터’ 역을 맡았다. 보이터보다 덜 성공한 작가인 남편 사무엘이 알프스에 있는 집의 열린 창문 아래에서 사망한 모습이 시각장애가 있는 이들의 사춘기 아들에 의해 발견되고, 보이터는 남편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다.
<추락의 해부>는 휠러와 휠러가 연기한 보이터가 유창하게 말하는 영어로 이끄는 법정 드라마 형식을 띤다. 그러나 보이터가 남편을 죽였는지는 우리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미끼에 불과하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추락의 해부>는 보이터의 유무죄보다 결혼 생활에서의 비난과 상호 의존이라는,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에 더 관심을 가진다. 휠러는 보이터를 불안정한 복잡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고, 카메라는 종종 장난기와 반항심, 회피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그녀의 얼굴에 머문다. 오프닝 신에서 보이터는 와인 잔을 들고 의자에 기대앉아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젊은 여성에게 자신의 예술적 욕구에 부합한다면 얼마든지 그를 소설의 한 페이지에 매어둘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매력을 발산한다. 이 유혹으로 가득한 파워 플레이는 보이터가 혼외 관계를 가져왔으며, 그중 여성과의 관계도 있었음을 교묘하게 드러낸다. 이는 법정에서 더욱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묘사된다. 이후 보이터의 냉정하리만치 침착한 모습이 결혼 생활에서의 주된 갈등 원인이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다. 추후 재판에서 증거물로 채택된, 부엌에서 있었던 부부 싸움 녹음본에서 사무엘은 보이터를 외조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며 불평을 쏟아낸다. 처음에 보이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뜩 화가 난 남편과 그의 피해 의식 가득한 마음을 달래며 애정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말싸움은 점점 거세져 결국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고, 아버지의 혼령에 잠식당한 과거의 햄릿처럼 보이터 또한 분노에 이성을 잃고 만다. 이 부부 싸움의 절정은 소리로만 전달되는데, 녹음본을 듣는 사람들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저 아슬아슬하게 상상할 뿐이다.
휠러가 연기한 보이터가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여부를 판가름할 열쇠로 제시된 이 부부 싸움은 보기보다 복잡하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을 다룬다. 바로 보이터가 정말 남편의 인생에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휠러는 지금껏 보이터 같은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에, 진실에서 등을 돌려 남편을 두둔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몇몇 여성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 용기 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트리에 감독이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 생각은 틀렸어. 당신이 고통스러운 건 내 책임이 아냐. 그건 당신 책임이지’라고 쓴 것처럼요.”
몇 해 전, <시빌>이라는 어두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휠러를 신경질적인 영화감독 역할로 캐스팅했던 트리에 감독은 이번에는 휠러를 떠올리며 보이터라는 인물을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휠러에겐 그런 특별함이 있어요.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여성스러운 모습 없이도 그녀가 영화에서 빛을 발할 거라는 걸 전 알아요. 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당당한 분위기가 풍겨요. 그런 모습 때문에 ‘휠러라면 이 여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아이디어를 계속 밀어붙일 수 있겠다. 어찌 됐건 관객은 이 여자 말을 믿고 이 여자를 끝까지 사랑할 테니까’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모든 여배우가 이런 특별함을 지니지는 않아요. 지나치게 연극적이거나 기교를 너무 많이 부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추락의 해부>는 일반적인 추리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명백한 해답을 내주지 않으면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며 능청을 떤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은 여전히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버지를 잃고서 어머니의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렸다는 걸 깨닫게 된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불안할 정도로 책임을 묻기 애매한 인물을 연기한 휠러는 최근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그 죄가 너무나도 명백한 인물을 연기했다. 영국 출신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Jonathan Glazer)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영화는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의 동명의 역사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휠러는 수년간 아우슈비츠의 사령관을 맡은 루돌프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 역을 맡았다. 글레이저 감독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세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부지 밖에 위치한 회스 가족의 잘 가꿔진 가정집에서 이뤄진다. 그곳에서 헤트비히는 다섯 아이를 키우며 공들여 꾸민 정원을 가꾸고,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살아간다. 그러다 루돌프가 베를린 북부로 발령받자 헤트비히는 분개하며 아우슈비츠에서의 안락한 삶을 두고 떠나기를 거부하고 남편 혼자 떠나게 한다. 그곳에서의 풍요로운 생활에 눈이 먼 헤트비히는 집 근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지옥 같은 불길과 시커먼 연기를 애써 못 본 척하고, 경비견들이 사납게 짖는 소리, 쉴 새 없이 가동되는 화장터의 굉음, 간간이 울려 퍼지는 총소리, 수용자들의 비명 같은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현실로부터 귀를 틀어막는다.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 제작 과정이 비디오와 오디오로 된 영화 두 편을 각각 제작한 뒤 하나로 합치는 과정과도 같았다고 밝혔다. (영화의 소름 끼치는 사운드 디자인은 조니 번(Johnnie Burn)이 담당했다.) 스타일 면에서나 산드라 휠러라는 배우를 활용하는 면에서나, 이 영화는 <추락의 해부>와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글레이저는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애쓰기보다, 카메라를 가만히 고정해두거나 연극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처럼 프레임을 잡아서 영화 내내 관객과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무대 위로 커튼이 내려오는 것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 중반부의 터닝 포인트에서 화면이 갑자기 검은색이나 빨간색으로 채워지는 부분도 있다. 이런 효과는 휠러가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유럽의 아방가르드한 연극 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휠러는 정교한 입의 움직임과 눈썹 한쪽을 올리는 독특한 표정으로 <추락의 해부> 속 산드라 보이터의 심리 상태를 표현해냈지만, 헤트비히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더 폭넓은 몸의 언어가 필요했다. 곧바로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터득한 기술을 총동원했다. “대사란 무대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수단이에요. 궁극적으로 모든 이야기는 몸짓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죠.”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휠러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이지만 헤트비히를 묘사하기 위해 어깨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양발은 옆으로 쩍 벌리며 걷는 어정쩡한 걸음걸이를 취했다. 헤트비히의 몸짓은 휠러가 먼 친척의 몸짓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농장에서의 생활과 거듭된 출산 등 그의 아우슈비츠 이전의 삶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코스튬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산드라의 옷은 너무 길거나 혹은 너무 작거나, 너무 크게 디자인했어요. 아름답긴 하지만 몸에 딱 맞지 않게 만들었죠. 헤트비히는 우아한 모습을 원하지만 그 옷은 그렇지 못해요. 산드라가 움직일 때 그녀의 몸가짐 역시 우아하지 못하죠.” 휠러는 이런 말을 했다. “헤트비히가 지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짓밟고 서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사실이 몸가짐과 몸짓에 다 드러나는 거죠. 자신이 채 느끼지도 못하는 그 죄책감의 ‘무게’가 몸에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사실 맨 처음 휠러는 헤트비히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독일인으로서 저는 늘 파시스트 역을 맡는 걸 거절해왔어요. 독일 여배우이다 보니 특히 국제적인 프로덕션으로부터 그런 역할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종종 들어오곤 했거든요.” 휠러가 열두 살 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라이프치히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휠러는 현재 아이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만난 곳은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으로, 메인 거리인 카를 하이네 슈트라세로 나가면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생전에 살았던 건물 앞의 길 위에 추모 동판이 박힌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분위기 좋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휠러의 반려견이 그녀가 집에서 가져온 담요 위에 앉아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개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족이 키우는 애완견으로도 등장한다.) “그런 식으로 나치 유니폼을 입거나 그런 식으로 독일어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당시의 그런 악한 에너지에 가까워지거나, 연기를 위해서라도 그런 삶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싫었죠.” 휠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배역을 연기하면서 실제로 재미를 느꼈다는 동료들도 봤어요. 그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 전 세대의 것들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르죠. 말하는 방식도 바꾸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꽤 즐기더군요.” 휠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강하고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왜들 그러는 걸까요?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말하면 될 텐데요.”
휠러는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파시즘과 큰 상관없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그 어떤 시도도 반대해왔다. (넷플릭스 신작 감성 드라마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그런 작품의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그녀였기에 글레이저의 대본에는 드라마가 일절 없다는 사실도 흡족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지시 아래 가동되는 살인 장치가 더욱 무섭게 돌아가는 동안 화면 밖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일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전하고 싶어 하는 이 이야기에 담긴 함정에 대해 조나단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실은 이야기랄 것도 없죠. 어떤 부부가 있는데 한 사람은 떠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아 하는 상황인 거예요.” 휠러가 말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추락의 해부> 모두 휠러가 기존에 영화 배역을 맡을 때와는 사뭇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보통은 그 배역에 완전히 푹 빠져들어요. 어떤 상황에서 그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지 다 알죠. 그 인물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추락의 해부>엔 치명적인 불명확함이 있었다. 트리에 감독은 휠러에게 그녀가 연기하는 배역이 결백한지 아닌지에 대해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감독이 준 유일한 연기 지시는 보이터가 “결백한 것처럼” 연기해달라는 것뿐이었기에 실은 보이터가 아주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일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휠러는 보이터를 “아주 좋은 친구지만 속내를 다 보여주지 않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연기했다. 반면 헤트비히 회스는 휠러가 결코 동일시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치를 연기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휠러는 그 배역에 자신의 인간성을 내주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배우로서 저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이 배역에 사랑이나 즐거움, 성취감, 공감을 느낄 만한 그 어떤 능력도 주지 않으려 했어요. 모든 인간다움을 다 빼앗아버린 거죠. 이야기를 최대한 지루하게 만들자는 계획이었어요. 즐거움과 행복을 최대한 주지 않는 거였죠.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데, 자신들은 그걸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알죠.”
실제 루돌프 회스는 1947년 전범 판결을 받고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헤트비히 회스는 남편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에 있었던 생존한 아우슈비츠 공무원들의 재판에서 증언을 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 법정 밖에서 찍힌 사진에는 갈색 코트에 하이힐을 신고 머리카락을 말끔히 뒤로 빗어 넘긴 헤트비히가 싸늘한 눈빛으로 사진기자를 노려보는 모습이 담겼다. 휠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헤트비히의 증언 녹음본을 듣고서 그 목소리를 따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헤트비히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높았고 어린 소녀 같았기 때문이었다. “헤트비히가 누군가를 혹은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휠러가 말했다.
헤트비히 회스는 1989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의 남편은 헤트비히도 자신과 동료들이 자기 집 담 너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시체 태우는 고약한 냄새가 났기에 “그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은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휠러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헤트비히도 알고 있었겠죠. 자기도 직접 봤으니까요.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인 양 ‘연기’를 한 거예요.” 휠러는 부정하게 얻은 영토를 당당하게 활보하면서 너무나도 평범한 말투를 구사하는 나치 아내를 연기함으로써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공범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1978년에 태어난 휠러는 튀링겐 산악 지역의 프리드리히로다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이곳은 그녀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동독에 속한 곳이었다. 그녀는 두 자녀 중 맏이였고, 부모님은 교육자였다. 휠러가 맨 처음 배운 외국어는 러시아어였고, 그녀의 가족은 체코슬로바키아나 기타 공산주의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어떤 사회주의 강령은 불합리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휠러 가족의 삶은 대체로 안정적이고 공평하게 느껴졌다.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넉넉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살지 않았어요. 우유도 한 종류, 빵도 한 종류, 모두가 똑같이 누리며 살았죠. 특별한 걸 원한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어요. 그렇게 기다리고 나서도 바로 앞에서 물건이 동날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게 바로 인생이죠.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으니까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루돌프 회스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리에델(Christian Friedel) 또한 동독에서 자랐기에 “당시 사회 체계는 ‘나’보다는 ‘우리’의 개념이 강했어요”라고 증언했다. 휠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가 배운 건 공동체의 힘이었어요. 모두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안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며, 함께하면 더욱 강하다는 것이었죠.”
휠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끝난 시기를 1989년으로 기억한다.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어른들의 진짜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 한몫했다. “기뻐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어요. 거리에서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이제부터 사회가 어떻게 작동할지, 사람들의 직업은 어떻게 될지, 집과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몰랐죠.” 그녀가 말했다. 동독 사람들이 서독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 전까지 안정적인 고용에 만족감을 느꼈던 수많은 동독 사람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이 가진 기술이 변덕스러운 시장의 냉혹한 재판대에 오르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요구는 마렌 아데(Maren Ade)의 훌륭한 영화 <토니 에드만>의 배경을 형성했다. 영화에서 휠러는 성공에 집착해 그 어떤 낙도 없이 루마니아에서 일하며, 사업주에게 수익 증대를 위해 직원을 해고하라고 조언하는 비즈니스 컨설턴트 ‘이네스’로 변신했다. 이네스의 평범한 일상은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음악 선생님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우울한 워커홀릭이 되어버린 딸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네스의 아버지는 방귀 쿠션부터 우스꽝스러운 가짜 치아까지, 별의별 시답잖은 장난거리를 준비해 딸에게 퍼붓는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 덕에 이네스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은 유해지다 못해 점차 과감해져, 끝내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선보인다. 클라이맥스에서 이네스는 팀워크 강화를 위한 생일 축하 브런치라며 자신의 집에 동료들을 초대하는데, 사람들이 도착해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꽉 끼는 원피스를 다 입지 못하자 갑자기 옷을 벗어버리고는 즉흥적으로, 하지만 민망함을 꾹 눌러 참으며 상사에게 이 파티는 “나체 파티”라고 말해버린다.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동시에 애정 가득한 딸인 이네스는 밉상이면서도 왠지 마음이 가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그 역을 맡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어요. 이네스는 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많이 하거든요. 하지만 그건 이네스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할 말은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처럼요.(웃음)”
고교 시절 처음 연기를 접한 휠러는 베를린의 에른스트 부슈 연극예술학교에 지원하면서 오디션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을 연기해야 했던 순간 역시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실 그 인물이 제게 별로 와닿지 않았어요.” 휠러는 줄리엣이 로미오가 자신을 데리러 와줄 거라 믿고 어두운 지하 묘지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독백 장면을 연기했다. 줄리엣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약을 마시기 전, 깨어났을 때 당황해서 조상의 뼈로 “내 한심한 뇌를 두드려 깨워야 하면 어떡하냐”면서 조바심을 낸다. 이 장면에서 휠러는 무대 지시처럼 독백 이후가 아니라 하기 전에 약을 마시고, 약에 취한 환각 상태로 병적인 망상을 펼치는 것으로 표현했다. 교수들은 그녀의 대담한 선택을 인상 깊게 봤고, 그렇게 학교에 입학한 휠러는 베를린으로 가게 됐다. 휠러는 과거 동독에 속했던 프렌츨라우어 베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고향 친구와 한동안 함께 살았다. 1996년에 그 지역은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파트 난방이 석탄이나 나무를 때서 쓰는 난로 하나뿐일 정도로 주거 환경은 열악했지만, 동네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정말 많았어요. 버려진 집도 많았고요. 어디서나 파티가 열렸죠.” 휠러가 당시를 회상하며 즐거워했다. 반면 에른스트 부슈 연극예술학교는 엄격한 분위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느 교수는 휠러에게 손을 써서 표현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말라면서 의복 때문에 손이 자유롭지 않은 수녀를 연기해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학교 졸업 후 휠러는 베를린이 문화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났다. “긴장감을 견딜 수 없었어요. 거기서는 거리에 나서면 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거나 가면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죠. 한 번도 편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휠러는 라이프치히 남서부에 있는 극단에서 2년을 보낸 뒤 스위스의 바젤 극단에 들어갔다. 2003년에는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줄리엣을 연기해 <테아터 호이테(Theater Heute)> 선정 ‘올해의 청년 여배우’에 이름을 올렸다. 연극에서 휠러는 줄리엣의 독백을 환각에 빠진 모습으로 표현한 자신만의 해석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줄리엣이라는 인물이 자기가 가늠하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였다는 걸 깨닫게 됐다. “당시 줄리엣 역 오디션을 보기 직전에 머리를 아주 짧게 밀었어요. 거의 삭발 상태로 오디션을 보러 갔고, 결국 그 모습 그대로 무대에 올랐죠. 연기하면서 줄리엣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됐고, 줄리엣이 아주 현대적인 인물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극 초반에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별다른 구애를 하지 않잖아요. 전 항상 줄리엣이 착하고 사랑스러운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줄리엣이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로미오는 어찌 됐든 줄리엣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로미오는 사랑에 빠진 눈으로 날 볼 거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대로 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로미오는 날 사랑할 테니까.”
바젤에서의 성공은 휠러에게 첫 영화 출연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녀는 간질 발작과 환각 증세를 가톨릭 신자 가족들에 의해 악령에 씐 것으로 오해받았던 아넬리제 미헬(Anneliese Michel)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레퀴엠>의 주인공을 맡았다. 미헬은 수차례 퇴마 의식을 치른 후 먹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6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레퀴엠>에서 신부 역을 맡은 옌스 하르저(Jens Harzer)는 휠러가 영화 촬영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장면을 완벽하게 ‘지배’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휠러는 자신이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확실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연기를 펼쳤어요. 그리고 저에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이 연기로 휠러는 <타임스>에서 “놀라운 몸 연기”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텅 빈 공간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창조해야 했던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이 배역을 위한 좋은 훈련이 돼주었다고 밝혔다. “어떤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설정과 배경을 굳이 눈으로 볼 필요가 없어요. 눈앞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의미를 궁리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충분하니까요.”
독일 북부에서 <레퀴엠>을 촬영하는 동안 휠러는 수시로 스위스로 돌아가 바젤에서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밤에 연극 무대에 선 뒤 가끔은 5시간씩 차를 타고 아침까지 영화 촬영장에 돌아와야 했어요.” 휠러가 당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독일 공연 예술 분야의 환경은 배우들로 하여금 연극 무대와 더 높은 개런티를 받는 영화 연기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국의 모든 극단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으며 배우들은 정직원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보다 훨씬 덜 불안한 환경에서 배우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이는 연극 연출자들이 상업적인 시스템에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예술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휠러는 2018년 보훔 극단의 일원이 된 후 정규직 배우로서가 아니라 게스트로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비록 보훔 극단은 라이프치히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4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먼 거리에 있지만 말이다. “요한 시몬스 감독이 이곳에 있기로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선택권이 없어요.” 네덜란드 출신으로 오페라와 연극에서 과감한 무대를 선보여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는 시몬스 감독은 벌써 1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휠러와 합을 맞춰왔다.
지난해 가을 휠러는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학살의 천사>를 자유롭게 각색한 작품으로 보훔 극단 무대에 자주 섰고 나 역시 그곳을 방문하는 동안 이 작품을 관람했다. 이곳에서 백금발 가발을 쓰고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을 유쾌한 왈가닥 목소리로 열창하는 휠러는 노래 실력도 대단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유명 독일 인디 밴드 노트위스트(The Notwist)의 트랙을 녹음한 적이 있고, 몇 년 전에는 영어로 부른 오리지널 곡이 담긴 EP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휠러의 노래 실력보다 더 뛰어난 건 그 대단한 노래 실력을 꽁꽁 감추는 능력이 아닐까. <토니 에드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부쿠레슈티에서의 한 어색한 모임 자리에서 아버지가 이네스에게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르라고 부추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민망함을 가득 안고 시작한 휠러의 노래는 갈수록 뻔뻔해지고, 음정 역시 제멋대로 널뛴다. <학살의 천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코미디적 기교가 연극 무대에 걸맞은 더 과장된 설정으로 삽입됐다. 하이힐을 신고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휠러는 온 정신을 집중해 정신 줄을 놓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아주 이상하면서도 무척 재미있었다. 분명 <햄릿> 같은 진지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모든 연극이 그렇게 될 수도,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연극 일을 계속해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휠러는 이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연극은 영화와는 다른 종류의 예술적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대부분은 독립적이고 개성 강한 감독들이 이끄는 작품이다. 휠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클라이스트, 입센의 작품을 연기할 때는 제 생각대로 연기를 펼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 새로운 작품을 쓴 경우라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기꺼이 그 대본에 쓰인 내용 그대로 연기할 생각이 있는지를 먼저 결정해야 하죠.” 휠러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의 시녀 ‘이르마’로 출연한 시대극 <엘리자벳과 나>에서 함께 작업한 프라우케 핀스터발더(Frauke Finsterwalder)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연극배우 출신 배우들과 일할 때 연극에서처럼 과한 연기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할 때가 종종 있어요. 하지만 산드라에겐 ‘너무 과해요’ 같은 말을 할 일이 전혀 없죠. 영화라는 매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엘리자벳과 나>에서 이르마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 아마추어 연극 공연에 참여하는 장면이 있다. “산드라는 대체 어떻게 그 연기를 그렇게 완벽히 해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연기를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한 번도 무대에 서보지 못한 사람을 연기했거든요.” 핀스터발더 감독이 말했다. “휠러는 독일어권에 있는 모든 큰 무대에 서본 사람이잖아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연기했고요. 그 장면을 촬영하는 내내 계속 제게 ‘너무 민망해요’라고 하더군요. ‘이르마가’ 민망해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인물의 감정에 몰입한 나머지 자기 스스로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느낀 거죠.”
휠러는 영화 촬영을 할 때도 보훔 극단 시몬스 감독의 연극 연기 수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그분은 무대 위의 모든 상황이 내 머리, 내 몸, 내 마음속에서 진짜로 일어난다고 여기라고 가르치는 분이에요.” 시몬스는 휠러가 햄릿을 연기했던 시절에 햄릿이 슬픔으로 엉망이 된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휠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연극은 이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러니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죠.” 시몬스의 말이다. 연극 도중 20분간 인터미션이 시작됐을 때도 휠러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한 지점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곧 관중도 하나둘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햄릿의 치열한 심적 갈등, 그리고 생각에 잠긴 휠러를 지켜보기 위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공식 명칭)에서 성장한 휠러는 언뜻 평화로운 시골 풍경처럼 보이던 그곳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파티가 열려 사람들이 모일 때,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사람들이 창문을 닫았던 게 기억나요.” 라이프치히에서 만났을 때 휠러가 말해줬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처럼 휠러 역시 독일 통일에서 그 도시가 맡았던 특별한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인터뷰 후 휠러는 내게 라이프치히 중심에 위치한 고딕 양식 교회인 니콜라이 교회를 방문해볼 것을 권했다. 1989년 민주화 시위로 발전한 주간 기도회가 열린 곳이 바로 그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한 달 전, 7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그곳에 모여 폭동 진압 경찰대에 맞서 행진하며 평화적 개혁을 요구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있었던 가장 큰 시위였다.
지난 몇 년 사이 구 동독 지역에서는 극우주의가 부활했다. 지난해 6월에는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독일대안당(AfD)에서 시장에 준하는 지위인 첫 지방행정관이 선출됐다. 휠러의 고향 튀링겐주에 있는 조네베르크에서였다. 휠러는 구 동독 지역의 시민들이 유독 국가주의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난다고 했다. 최근 헤센주와 바이에른주에서 AfD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 휠러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독일 전역에서 그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요. 독일의 탈파시즘화라는 환상은 결코 현실이 되지 못했다고 봐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파시즘적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게 또다시 가능해진 세상에서 살게 됐죠.”
그런 분위기인 만큼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파시스트 가족의 내면을 탐구하기에는 더더욱 예민한 시점이었다. “헤트비히와 루돌프 회스를 떠올리면 실은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저 농부가 되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 했죠. 그러다 어떤 생각을 접하게 됐고 그 길로 가기로 결심한 거예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바로 옆에서 다른 이들이 희생되는 대가로 호화롭고 아름다운 생활과 자신들의 안위를 선택한 거예요.”
홀로코스트를 다룬 많은 영화가 그 리더들을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인물로 주로 묘사한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나치 친위대 장교는 강제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한 자기 집 발코니에 느긋하게 서서 재미로 수감자들에게 총을 쏜다. 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대량 학살자이기는 하나 온화하고 가정적인 남자임을 시사한다. “아이들한테 아빠가 집에 돌아올 거라고 했어?”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근 명령을 받은 그가 초조한 목소리로 전화통을 붙잡고 헤트비히에게 했던 대사다. 헤트비히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얼굴엔 빨리 전화를 끊고 싶다는 짜증이 가득하다. 뉴욕영화제의 질의응답 시간에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루돌프 회스가 “꽃 따는 걸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 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 그런데 일순 그 옆에 앉아 있던 휠러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순간적으로 차오른 혐오감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일었던 것이다.
휠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출연을 결심하기 전 전쟁 중 자기 가족의 역사에 대해 탐색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갔다가 러시아에서 수감 생활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외증조할머니가 10년간 자식 둘을 홀로 키우셨고요.”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온 휠러의 외증조할아버지는 감옥 생활에 대해서는 평생 말을 꺼내지 않았다. “러시아 군대가 외증조할머니가 두 아이와 살고 있던 마을을 샅샅이 뒤진 적도 있었다고 하니, 할머니도 충격적인 경험을 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도 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죠.” 휠러의 친할아버지는 1938년 나치가 점령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온천 마을 출신으로, 그 가문에는 나치에 저항했던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친할머니는 자식들에게 히틀러가 머리를 빗은 반대 방향으로 반드시 머리를 빗으라고 하셨대요.”
학창 시절 휠러는 바이마르에 있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아우슈비츠에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의 모습이 담긴 홀로코스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랐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위해 글레이저 감독은 세트장을 폴란드 남부의 실제 수용소가 있던 곳 바로 앞에 지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회스 가족이 살았던 집도 아직까지 그곳에 있지만, 제작진은 1940년대 초에 갓 지은 집 분위기를 내기 위해 그 집의 모형을 지어 세트장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이 세트 덕에 글레이저 감독은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다. 실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장면은 무인 카메라로 촬영했기에 배우들은 언제 자신들의 모습이 촬영되는지 알 수 없었다. 휠러는 나치를 연기하는 배우가 빛을 더 잘 받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는 면에서 어느 정도 불쾌감도 있었다고 느꼈다. “우리는 연기를 하면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고, 계단에 앉기도 했어요. 어디에서든 다 촬영이 이뤄졌으니까요. 거기엔 연극 무대에는 존재하는 입구랄 게 따로 없었어요. 그냥 계속 거기 ‘있는’ 거죠.”
글레이저 감독이 감시 카메라를 활용한 데는 형이상학적 측면이 존재한다. “촬영 내내 우리를 보는 눈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단순히 카메라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요. 촬영장에는 엄청나게 무거운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어요. 전 세대의 과오에 대해 책임진다는 의미가 절로 느껴졌죠.” 루돌프 회스로 등장하는 프리에델은 매일 그 경험의 강렬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리에델은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우리가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수용소 바로 옆에서, 과거의 망령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을 때도 있었죠. 그럴 때면 ‘지금 수용소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돼. 이 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다’며 스스로를 다잡곤 했죠.”
휠러는 이번 영화에서 헤트비히를 연기했던 것보다도 자신을 도덕적으로 더 힘들게 했던 것이 있었다고 밝혔다. “정말 힘들었던 건 실제로 아우슈비츠 안에 들어갔던 경험이었죠. 그것도 아주 긴 시간 말이에요.” 휠러가 덧붙였다. “헤트비히 회스를 연기하는 건 독일인으로서 그 장소에 들어가 이 역사적인 범죄를 마주하는 엄청난 과정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과 제작진은 가이드를 따라 아우슈비츠 투어를 다녀왔다. 과거에 사용되던 막사와 화장터를 방문했고, 가죽 구두, 의수와 의족, 안경 등 나치가 압수한 산더미 같은 물건들이 담긴 진열장도 보았다. 영화의 미학을 담고 있는(의학적인 관점에서는 공포스러운) 그 진열장 안 물건들은 영화에 그대로 등장한다. 휠러는 그 투어를 이렇게 회상했다. “자연스럽게 그곳을 찾으면 어떤 카타르시스적 순간을 맞이할 거라 여겼어요. 참 낭만적인 생각이죠. 독일인으로서 아우슈비츠를 찾아왔으니 갑자기 내 조상들이 저지른 책임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 말이에요. 다 이해하고, 그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그런 기대요. 과거의 망령은 사라지고요.” 휠러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맨 처음 깨달은 건 아우슈비츠를 찾아간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진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아우슈비츠는 이렇게 말해요. ‘당신은 영원히 이 죄를 마주하며 살아야 해. 인류는 영원히 이 죄를 떠올리며 살아야 해. 거기서 벗어날 길은 없어.’”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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