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트렁크 팬티가 유행하는 이유
트렁크 팬티·복서 쇼츠는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스타일리시한 이들이 입는 패션 아이템이 되었죠. 단숨에 급부상한 이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1990년대로 시곗바늘을 돌려야겠습니다. 이를테면 케이트 모스가 캘빈클라인 1993 S/S 쇼에서 헐렁한 바지 위로 브리프를 드러낸 채 런웨이를 가로지르는 순간으로요.
1990년대 힙합 문화와 도시 미학은 복서 쇼츠 패션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습니다. 투팍, 스눕 독, 제이 지 같은 아티스트는 배기 진을 한껏 내려 입어 속옷을 드러내는 스타일을 대중화시켰죠(2024 S/S 스타일링이기도 하죠?). 제법 반항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죠. 스케이트 문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헐렁한 반바지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있다는 사실은 칼 라거펠트의 샤넬 1996 S/S 컬렉션을 통해서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대담하고 매혹적이지만 하우스 특유의 개성은 잃지 않은 컬렉션이었죠. 당시 칼은 다양한 라운지 웨어 룩을 무대에 올렸는데요. 언더웨어와 파자마를 오가는 실루엣으로 우아함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그웬 스테파니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아티스트가 언더웨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브라렛을 블라우스 위에 입고, 끈을 과감히 노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즐겼죠. 20년 후 이 스타일은 헤일리 비버, 두아 리파 같은 셀럽을 매료했습니다. 패션의 세계에서 브라렛은 블라우스 안에 받쳐 입는 ‘언더웨어’가 아닙니다. 모든 의상의 중심이 될 수 있죠. 샤넬의 쇼를 보면 알 수 있듯 복서 쇼츠도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템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랜 역사가 있는 건 알겠습니다만, 왜 하필 지금 다시 트렌드가 된 걸까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패션의 특수성을 언급할 수밖에 없겠군요. 패션은 순환적입니다. 한 지점에서 출발해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죠. 원을 그리듯이요. 물론 충분한 설명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죠. 팬데믹입니다.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삶의 불확실성을 깨달은 시기였습니다. 납작한 화면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죠. 사무실은 사라졌고 재택근무는 당연해졌습니다.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가 곧 회의실이었죠. 우리는 머리를 매만지고 깨끗한 셔츠를 갖춰 입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봅시다. 바지는 뭘 입고 있었나요? 아마 대부분이 파자마나 조거 팬츠를 입고 있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덕분에 편안한 라운지 웨어의 미학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조합이 ‘공식적인’ 옷차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시작한 거죠. 애슬레저 패션은 가장 스타일리시한 셀럽의 일부가 되었고, 옷으로 성별을 구분 짓는 건 낡은 생각이 되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자 자유를 향한 갈증은 극에 달했습니다. 과감한 노출로 자신감을 드러내는 네이키드 드레스부터 젠더리스 디자인, 정형화되지 않은 루스한 핏 등 팬데믹 내내 억눌려 있던 모든 것을 대담한 패션으로 해소하기 시작했죠.
트렌드가 확산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셀럽에 있습니다. 벨라 하디드, 켄달 제너 같은 패션 셀럽의 입김이 셌죠. 슈퍼모델들은 티셔츠와 오버사이즈 셔츠 아래 속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섰습니다. 여기에 테니스 스니커즈, 발레 플랫, 바이커 부츠 등 각종 신발과 함께하며 트렁크 팬티를 비롯한 언더웨어의 반경을 넓혀주었죠.
스트리트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도전 정신 투철한 패션 인플루언서들은 너도나도 복서 쇼츠를 입고 거리를 누볐습니다. 스타일도, 조합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복서 쇼츠는 언제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걸 앞다투어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이요.
미우미우와 로에베를 비롯한 수많은 하우스가 여러 시즌에 걸쳐 밖에서도 바지 없이 걸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마이크로 쇼츠, 복서 쇼츠, 타이츠 등 많은 아이템이 하의의 대체재로 떠올랐죠. 선택지는 넘쳐나지만 입는 법만은 확실합니다. 애써 숨기지 않는 것, 그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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