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에드가 존스, 적막과 절정의 순간을 오가는 법
재난 영화 〈트위스터스〉로 돌아오는 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흔적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추적했다. 언제나 그렇듯 폭풍 전야에도 단단하게 공명하는 그녀만의 고유한 리듬.
하늘이 유난히 높고 맑은 로스앤젤레스의 허허벌판 한가운데 데이지 에드가 존스(Daisy Edgar-Jones)가 가냘프지만 단단한 몸으로 서 있다. 평화로운 이곳에 갑자기 토네이도가 닥친다면? 마침 그녀의 새 영화 <트위스터스>가 재난 영화이기에 해본 상상이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소설을 기반으로 탄생한 드라마 <노멀 피플>(2020)과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에서 그녀가 보여준 평온하고 진중한 얼굴이 난데없는 비극을 맞닥뜨린 재난 영화에서는 어떻게 변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트위스터스>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에드가 존스의 호기심을 확신으로 바꾼 인물이다. 서정성 강한 가족 드라마 <미나리>(2021)에 이어 그가 1996년 작품 <트위스터>를 기반으로 한 재난 영화를 차기작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나리> 마지막 장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재 시퀀스를 촬영한 경험이 정말 황홀했거든요. 치솟은 불길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크고 눈부셨죠. 그 장면을 찍으며 저는 무참히 무너지는 광경으로 뒤덮인 영상물이면서도 인간적인 이야기를 품은 영화 프로젝트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트위스터스>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것이야말로 제가 찾던 영화라는 확신이 들었죠.” 에드가 존스의 대표작 <노멀 피플>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뿐 아니라 <프레시>(2022)와 <천국의 깃발 아래>(2022)까지, 그녀가 등장한 휴먼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본 정이삭 감독은 큰 고민 없이 <트위스터스>의 주인공 케이트 쿠퍼 역할에 에드가 존스를 낙점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케이트 쿠퍼는 아주 연약하고 인간적인 영웅입니다. 이 영화는 재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쿠퍼의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여정을 다룬 휴먼 드라마이기도 해요. 깊이 있고 지적이며 강인하면서도 여린 사람, 열린 마음으로 관객이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데이지야말로 <트위스터스>에 꼭 필요한 배우라고 느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평균 1,150회 이상 토네이도가 발생한다. 다행히 <보그> 촬영일, 로스앤젤레스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물론 토네이도는 이런 날씨에도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가운데,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닌 에드가 존스가 등장하자 일순간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구찌의 관능적이고 서정적인 의상과 까르띠에의 클래식한 주얼리를 착용한 그녀에게서 편안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매력이 느껴졌다. 인터뷰는 <보그> 촬영이 있고 나서 며칠 뒤에 이뤄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메일로 다시 인사를 건네온 그녀에게서 변함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보그> 촬영 후 런던으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어떤 분위기에서 이 질문에 응하고 있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에서 사흘간 몸을 흔들고 막 돌아온 참이다.(웃음) 지금은 북런던에 자리한 우리 집 부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주 아늑한 분위기에서 이메일을 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한 <보그> 촬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
사진가 강혜원의 창의성과 실험 정신이 기억에 남는다. 당연히 결과물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구찌의 카디건과 스커트 콤보는 이번 촬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룩이었는데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지 아주 궁금하다!
런던에서 펼쳐진 구찌의 2025 크루즈 컬렉션에서 레더 코트를 미니 드레스처럼 스타일링한 모습도 근사했다. 이번 촬영에 함께한 구찌와 까르띠에의 룩은 어떤 점에서 당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고 여겼나? 당신만의 스타일 원칙도 궁금하다.
사바토 데 사르노는 매끄럽고 절제된 스타일을 구사하면서도 구찌만의 재미를 보여주는데 그 점이 매력적이다. 덕분에 지난 2년간 이어온 구찌와의 여정이 점점 더 즐거워지고 있다. 또한 까르띠에가 지닌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행운으로 느껴진다. 나와 내 스타일리스트 대니 미셸은 항상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그 점을 보여주기에 이 두 하우스보다 더 탁월한 브랜드는 없을 것이다.
<트위스터스>가 미국에선 7월, 한국에서는 8월 개봉한다. 새 작품을 공개하기 직전엔 주로 어떤 감정을 느끼나?
언제나 조바심에 사로잡혀 흥분하곤 한다. 배우 생활을 오래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즐겨 본 재난 영화가 있나? 1996년 작품인 <트위스터>를 기반으로 탄생한 새 영화 <트위스터스>는 원작과 어떤 점이 다른가?
나 역시 원작 영화의 열렬한 팬이다. 재미와 모험심으로 가득하면서도 여전히 상존하는 위협을 다룬 <트위스터>는 불후의 명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트위스터스>의 시간적 배경은 2024년이다. 그에 걸맞게 폭풍을 포착하고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과 수단이 더러 등장한다. 토네이도를 뒤쫓는 유튜버도 있고, 고프로도 나온다. CGI 기술 역시 훨씬 발전했기 때문에 토네이도의 압도적인 스케일이 더 실감 나게 담겼다.
당신이 연기하는 케이트 쿠퍼가 원작 영화에서 ‘조’가 입은 화이트 탱크 톱과 베이지색 팬츠 차림으로 나온다. 토네이도를 관측하는 기계 ‘도로시’도 다시 등장하는 등 반가운 오마주 요소가 눈에 띈다.
원작 팬을 위한 이스터 에그를 곳곳에 숨겨놓았다. 하지만 팬들은 토네이도를 추적하는 그 세계관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경험 자체를 반가워하지 않을까? 영화에 나오는 토네이도 추적 커뮤니티는 기상 현상에 미친 괴짜들과 아드레날린 중독자들로 가득한 정말 재미있는 집단이다. 원작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어떤 것에 미쳐 있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전염성이 강한 경험일 것이다.
또 다른 주연으로 열연하는 글렌 파월은 <트위스터스>에서 보여준 액션 연기가 ‘자신의 역대 최고 액션 시퀀스’라고 증언했다. 당신은 어땠나? 제대로 도전해본 적 없는 액션 연기를 이번 기회에 충분히 즐겼나?
촬영하면서 평생 맞을 비를 다 맞았다.(웃음) 글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제껏 맡아온 모든 배역 중에서 가장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작품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엔 살면서 맛본 것 중 가장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정이삭 감독의 재난 영화라는 것도 호기심을 키운다. 그의 전작은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가족 영화 <미나리>였으니까. 이 영화에서 정이삭의 창의성과 강점이 어떻게 발휘되었나? 평소 여러 인터뷰를 통해 연출에 대한 의지를 밝혀왔는데 그의 연출법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우선 <미나리>와 <트위스터스>가 정말 다른 영화라는 것이 좋았다. 어떤 감독이 장르를 넘나들며 틀을 깨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다. 정이삭 감독은 내가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나 역시 틀에 갇히는 배우가 되길 원치 않는다. 다양한 장르와 규모를 오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의 강점은 영화 규모, 액션과 상관없이 자신이 매만지는 모든 영역에 깊이와 진정성, 세상(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여느 재난 영화 주인공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고심한 지점이 있나?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이삭 감독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나?
쿠퍼의 다사다난한 삶에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느꼈다. 그녀의 여정은 비극을 극복하고 삶의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변화와 함께 진행된다. <트위스터스> 같은 규모와 주제를 지닌 영화가 심금을 울리는 여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 정이삭 감독의 의지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이삭 감독은 새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에드가 존스와의 우정으로 <보그>가 건넨 몇몇 질문에 직접 목소리를 더했다.)
정이삭 시나리오를 읽으며 케이트 쿠퍼에 대한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러면서 <트위스터스>가 아주 색다른 액션 영화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영화의 중심에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쿠퍼의 여정을 배치한 이유다. 그녀를 구심점으로 모든 행위가 이뤄지고, 심지어 토네이도라는 자연현상마저도 그녀 주위를 맴돈다. 이를 통해 쿠퍼가 재난에 가려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연출했다. 데이지는 진정한 예술가다. 그녀는 쿠퍼에게 어떤 정서적인 고민과 변화가 필요한지, 관객은 쿠퍼에게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연기했다. 데이지가 쿠퍼와 거의 혼연일체가 됐을 때 나는 중요한 대사의 일부를 직접 수정하거나 덧붙여보길 제안했는데 그런 모든 협업 과정이 정말 크리에이티브했다.
역할에 어떻게 접근하나? 극 중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기술적으로 다가가는 것 가운데 더 선호하는 연기 방식은?
확실히 나는 기술적인 배우에 더 가깝다. 어릴 때 극단에서 연기할 때처럼 여전히 열심히 연기를 연습하고 배역을 연구하지만, 촬영이 끝나면 모든 고민은 촬영장에 남겨두고 집으로 향하길 원한다.
쿠퍼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 토네이도 연구에 몰두하는 담대한 과학자다. 신기하게도 당신은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을 자주 연기해왔다. 그 인물들이 당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 부분이 있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해왔으니 아무래도 다음에는 가벼운 코미디물을 선택해야겠다!(웃음) 하지만 그런 역할이 더 이해심 많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는 데 기여한 부분이 분명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실제 삶에서 타인과 교감하고 교제할 때 그 점을 염두에 두게 됐다.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배우로 사는 삶의 가장 좋은 점은 “스스로를 조금 떠나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말한 적 있다. 지금 느끼는 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대에 올라 나에게 집중하는 관객 앞에 서는 순간의 고요함을 정말 사랑한다. <노멀 피플>을 통해 마주한 감동적인 순간에도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탈리아의 드넓은 언덕에서 진행한 마지막 촬영이 끝나자 모든 스태프가 울기 시작했는데,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경험을 했다는 것에 감사했다.
<미나리> 초반부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 “토네이도가 오면 이런 집은 그냥 날아가거든.”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아주 하찮은 존재 아닌가.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존재인가?
자연, 특히 폭풍이 인간의 예술에서 중대한 메타포로 작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심기 변화를 기후 변화에 빗대기도 하고,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는 일이 폭풍 속을 질주하는 것에 비견되는 것처럼. 그러나 자연의 가장 큰 역할은 우리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천지를 뒤흔드는 토네이도의 위력과 마주할 때,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면도 있다. 정이삭의 <트위스터스>는 지구와 기후, 폭풍을 향해 띄우는 인간의 연서인지도 모른다.
정이삭 자연을 보며 느끼는 경외감은 개인적인 감정 혹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몰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재난 영화의 유익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쿠퍼가 차를 몰고 토네이도의 중심으로 달려가 경이에 찬 눈빛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트위스터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무시무시한 토네이도가 그녀를 웃게 한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다독가로도 유명하다. 혹시 한국 소설을 읽어본 적 있나?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 크리스털 하나 킴의 <스톤 홈(The Stone Home)>, 한강의 <희랍어 시간>,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등은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내가 읽어본 게 하나도 없다니! 남아 있는 온라인 서점 바우처로 당장 구입해야겠다. 어디선가 접해본 적 있는 <대도시의 사랑법>부터 시작해야겠다. 내 리스트도 몇 개 공개하자면 가장 꾸준히 좋아해온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다. 그리고 <노멀 피플>을 쓴 샐리 루니의 모든 책을 추천한다.
이동할 일이 많은 삶을 즐기는 편인가? 그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일 덕분에 여행할 수 있어서 즐겁다. 특히 촬영을 위해 몇 달씩 낯선 장소에 머물 때면 그곳에 대해 세세하게 알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워낙 ‘집순이’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런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에 와본 적은?
아직 못 가봤다! 그래서 <트위스터스> 홍보차 한국을 방문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살면서 거대한 돌풍에 휩싸인 것 같은 경험을 한 적 있나?
코로나19가 세상을 바꾸었고, 팬데믹 시기에 공개된 내 작품 <노멀 피플>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트위스터스>를 통해 그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몰입감도 결코 놓치지 않기를!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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