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조각가들의 맞물린 사유, ‘집(ZIP)’
저는 한 사람의 작업 인생을 깊이 있게 고찰하는 개인전도 물론 좋아하지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아둔 단체전도 꽤 즐깁니다. 여럿의 목소리가 공명하고, 그 다채로운 목소리가 ‘오늘’을 입체적으로 예증하기 때문이지요. 아르코미술관에서 9월 8일까지 열리는 전시 <집(ZIP)>을 통해 단체전의 묘미를 다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80대의 1세대 조각가부터 20대 신인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 조각가들의 작품은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로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전시 제목인 ‘ZIP’은 다양한 조각가들의 실험적인 조형 언어를 ‘집 파일’처럼 모아놓고, ‘지퍼(Zipper)’처럼 연결하려는 의도를 은유합니다. 무엇이 담겨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압축 파일을 여는 순간, 각각의 자리에서 빛나는 인생이 빚어낸 작품의 면면이 선물처럼 펼쳐지는 거지요.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은 재료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우리 신체를 관통해 세상에 대한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나아갑니다. 조각을 둘러싼 다양한 재료와 방법론이 모여 이들이 물질과 사람,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죠. 세대별 조각가들의 활동과 고민이 무엇인지, 이들의 서사가 어디를 향하는지, 저마다 대면하는 한계를 어떻게 해결해가는지 등을 암시합니다. 그런 만큼 전시에는 각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물론이고, 어떻게 서로 어우러지도록 할지 면밀히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재료를 다루는 방식, 조형, 물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조각 매체를 통해 세계를 번역하고자 하는 열정 등 이질적인 각각의 조각이 만들어내는 상생과 조화의 에너지 덕분에 전시장에 머무는 순간이 즐거울 정도였어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 손꼽히는 1935년생 김윤신 작가가 평생 매진한 조각 옆에는 1984년생 작가 오묘초가 상상력으로 탄생시킨 ‘미래의 지성체’가 자리합니다. 1945년에 태어난 박윤자가 지금까지 수집한 재료를 아상블라주처럼 결합한 작업 너머로 디즈니 캐릭터 구피 봉제 인형을 확대하고 뒤집은 1981년생 정문경의 작품이 겹쳐지고요. 이 외에도 비누 작업으로 유물화된 예술품이 지닌 권위적 본질과 한계에 의문을 던져온 신미경(b. 1967), 브레이킹 동작 중 하나인 할로우 백을 시도하는 비걸(B-girl)을 추상화한 이립(b. 1990),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 양식과 이를 반영하는 형태인 사물의 관계에 주목해온 조혜진(b. 1986), 근대적 재료인 석고로 조각의 근본을 사유하는 홍기하(b. 1994)를 비롯해 한애규(b. 1953), 노시은(b. 1963), 김주현(b. 1965), 정소영(b. 1979), 김태연(b. 1987), 서혜연(b. 1994), 박소연(b. 1999) 등 여성 조각가들의 다채로운 작업은 ‘여성’과 ‘조각’, ‘한국 여성 조각가’라는 거대한 담론을 살갑게 펼쳐 보입니다. 이들이 모든 걸 대표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각각의 시대와 상황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합니다.
오프닝 자리에서 전시 총괄 기획을 맡은 조각가 최태훈이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조각가로서 내가 보고 싶은 전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말이죠. 조각을 다룬 전시에서 재료, 조형, 물성이라는 조각의 기본 요소를 탐구하는 건 당연지사지만, 그의 소회는 전시의 전형성을 걷어내고 기대감을 더합니다. 이 조각가는 다른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을 관찰하고 섭외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술가로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그의 말보다 이 전시를 더 잘 설명하는 문장이 있을까 싶더군요. 어느 조각가의 사심 가득한 전시에서는 조각이라는 방식을, 조각가라는 이들을, 여성 조각가의 사유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집니다. 전시장을 찾은 김윤신 작가가 인공지능을 결합한 노진아(b. 1975)의 거대한 두상 조각에 가만히 귀를 갖다 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정말이지, 작가도 관객도 서로에게 귀 기울이게 되는 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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