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이영애처럼 해주세요”를 만든 사람, 이희_보그 미장원 특집

2024.08.02

“이영애처럼 해주세요”를 만든 사람, 이희_보그 미장원 특집

2024년 대한민국에 있는 미용실은 약 11만3,000곳. 1933년 최초의 조선인 미용사 오엽주가 종로 화신미용부에서 신여성에게 내린 미용의 씨앗은 명동 미스코리아의 대모, 청담 여배우의 유행 스타일 메이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글로벌 K-팝 트렌드세터로 이어진다. 화학과 물리, 스승과 제자, 장인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교차하는 이 특별한 공간을 관통하는 〈보그〉의 미용 장인 이야기.

여배우는 불멸의 스타일 아이콘이다. 1990년대 이래 ‘청담 여배우 미용실 지도’의 큰 축을 담당하는 헤어 디자이너 이희는 아직도 트렌드의 최전방에 있다.

2017년 <보그> 21주년, 청담동 ‘뷰티 빅마마’가 한곳에 모인 적이 있었다. 김청경, 이경민, 이희, 조성아, 정샘물! 분장사가 아니라 메이크업 아티스트, 헤어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낸 이 ‘원조 원장님’들은 대한민국 뷰티 트렌드 역사의 산증인이다. 이들의 토털 뷰티 살롱에는 항상 ‘00 원장 사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원장님을 중심으로 여배우와 가수들이 결속을 다졌고 고객은 동경하는 연예인에 따라 숍을 선택하기도 했다. ‘청담 뷰티 빅마마’ 중 이희는 유일하게 헤어에 ‘오리진’을 둔 아티스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여배우가 광고 촬영 스태프로 지정하는 트렌드 최전방 현역이기도 하다. 사실 광고 스태프 구성의 행간에는 여러 조건이 존재한다. 셀럽의 믿음과 광고주의 인정,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의 소통 등 모든 박자가 잘 맞아야 ‘다음’이 있다. 단순히 의리 때문이 아니라 뇌의 감각이 유지되고 그것이 손끝으로 구현돼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치열하고 냉정하다. 이희 원장은 명동과 압구정, 청담동 미용실을 잇는 시대를 살아왔다. 미스코리아 배출의 양대 산맥이었던 세리 미용실 출신으로, ‘한일 짤순이’가 처음 나왔을 때 더 이상 수건을 짜지 않아도 돼서 너무 기뻤다는 ‘라떼’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희 원장이 1990년대 청담동에 자신의 살롱을 오픈한 후, 그녀의 감은 한 번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영애, 김희애, 전도연, 박지윤, 엄정화, 고현정, 배두나, 공효진, 이소라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셀럽이 그녀를 거쳐갔고 그중 많은 수가 여전히 곁에 남아 있다. 명성이 청와대까지 미친 시절이 있었음은 물론 지금도 그녀의 미용실은 재벌가 사모님의 아지트다. 이 어마어마한 내공을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이 단어가 좋겠다. ‘어른’! 그녀의 미용실은 아주 좋은 어른들의 놀이터다.

1990년 만나 오늘까지 이희는 이영애의 등 뒤에서 일하며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드레스는 실방 에스트랑(Sylvain Estran at Mariebelle).

이영애 배우와 어제 귀국했다고 들었다. 이번 작업도 만족스러웠나?

좋을 수밖에. 알고 있지 않나, 영애 꼼꼼한 거.

너무나! 컨셉 이해도가 너무 높고 디테일까지 강하다. 예전부터 그랬나?

그렇다. 잔머리 각도까지 의논한다. 배역에 따른 스타일을 기획할 때는 더하다. 머리를 맞대고 열정적으로 토론한다. 돌아보니 그렇게 함께한 세월이 35년이다.

사실 이 히스토리 북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데뷔작인 1990년 ‘투유 초콜릿’ CF부터 최근 브랜드 행사장 포토월 사진까지 이영애의 모든 룩이 스크랩돼 있다.

담당하는 연예인별로 기록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꺼내 본다. 자가 복제하고 싶지 않으니까. 배우들은 배역을 해석하고 그것을 새로운 룩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기에 기존 이미지와 겹치는 스타일은 없는지, 반응이 좋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TPO에는 적합했는지 계속 복기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영애 배우의 룩은 무엇인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쇼트커트와 드라마 <불꽃>의 단발 펌.

나도 ‘이영애 단발’을 따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하니 그냥 삼각김밥이 됐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특히 고객이 드라마 여배우의 머리 모양을 샘플로 가져왔다. 히트시키는 맛이 있었다.

소셜 미디어나 OTT가 없던 시절이라 어제 본 드라마 여주인공이 어떤 스타일을 하고 있었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한 원장님의 작업은 장진영 배우와의 작업이다. 영화 <소름>의 쇼트커트 기억하시는지? 생쥐가 갉아먹은 듯 들쑥날쑥 뻗쳐 있던 텍스처와 휑한 목덜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남루한 인생이 읽히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그게 ‘처연미’로 다가오며 아름답게 보였다는 거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룩이었다.

좋은 배우고, 멋진 사람이었다. 영화 <싱글즈> 속 아멜리에 단발로 로맨틱 코미디의 히로인 이미지를 만든 것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역할을 함께 고민하고 캐릭터를 부스팅해주는 것은 헤어 디자이너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현실 지각과 공감 능력만큼 반보 앞선 트렌드 캐치가 중요하다. 현재 또래들은 대부분 크리에이티브 일선에서 물러났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스타일 메이커로 남을 수 있었나?

모든 여배우는 ‘오늘의 아이콘’이길 원한다. 자신의 모발과 취향을 가장 잘 아는 사람과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가장 새롭게 보이게 만들어줄 사람을 갈구한다. 배우들도 나도 나이를 먹어가지만 새로운 세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욕심을 채우려면 노력하는 수밖에. 미친 듯이 트렌드를 업데이트하려고 노력한다.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감 떨어지는 거다. 시간에 지기 싫지만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지 않나?

선천적인 부분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감각도 근성이다.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타고난 재능을 유지할 수 없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관찰’한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나 무대, 오디션 프로그램까지 챙겨 본다. 참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좋아해야 한다. 이영애 배우와 ‘꿍짝’이 잘 맞는 것도 이런 점이다. 그녀도 자녀와 관심사를 공유하기 위해 참 열심히 세상을 모니터링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취향이 오히려 더 힙해진 것 같다.

원장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해가 지나도 감각이 죽지 않는 데다, 기민하고 겸손하다. 모두가 예민하고 방어적인 촬영장에서조차 “내가 뭘 더 할까요” “언제든 수정할 거 있으면 말해주세요”라고 먼저 존대해주면 파트너 입장에서 굉장한 안정감을 얻는다

서비스 직종이니까. 본질은 실력이지만 애티튜드 또한 내 직업의 본분 중 하나다. 시술 이전에 소통이 우선돼야 한다고 믿는다.

연예인에게만 잘하는 아티스트도 많다.

우리가 화보와 광고 촬영장에서 자주 만났지만, 나의 본업은 매일 고객과 소통하는 헤어 디자이너다. 대화로 마음을 풀어가는 사이 그 사람의 얼굴형, 이마 라인, 목과 어깨를 관찰한다. 그렇게 살피다 보면 그이의 마음도 그려진다. 달라진 헤어스타일로 숍을 나설 때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어른과 함께 일하고 있어 감사하다. 여배우들이 원장님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뒤를 맡길 수 있어서가 아닐까라고 여긴 적이 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얼굴을 마주하고 일하지만 헤어 디자이너는 등 뒤에서 그녀와 같은 곳을 보며 일하지 않나? 나의 등을 맡길 수 있다는 건 신뢰의 상징과도 같다.

많은 의미가 담긴 이야기다. 글쎄, 이것만은 확실하다. 헤어 디자이너는 고객이 확인할 수 있는 앞모습뿐 아니라 거울에 보이지 않는 옆모습과 뒷모습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런 나의 책임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떠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커리어에서도 인생에서도.

    포토그래퍼
    정우영, 최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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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현(디자인 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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