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이 ‘여장 남자’란 유구한 소재에 신선도를 더한 방법
*이 글에는 영화 <파일럿>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장을 한다. 목적은 취업이다. 유구하다는 표현도 가능할 만큼 오래된 설정이다. 영화 <파일럿>은 이 유구한 설정을 따르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추억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약 40년 전에 나온 <투씨>(1982)다. 단역배우로만 20년 넘게 살았던 남자가 여장을 하면서 스타덤에 오르지만, 다른 여자 배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진실을 밝힌다는 내용이다. 20년 전, 30년 전 영화도 아니고 40년 전 영화가 떠올랐을 정도니 <파일럿>의 설정이 얼마나 케케묵은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제작진이 몰랐을 리 없다. 아는데도 가져왔다는 건, 40년 전에나 신선했던 이 설정이 지금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전형적인 웃음 코드로 가득하지만, 적어도 <파일럿>은 지금도 ‘여장 남자’ 서사가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설득한다.
주인공 한정우(조정석)는 능력 있고, 인기도 많은 여객기 기장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해고당하고, 모든 항공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버린다. 회식 도중 여성 승무원들의 외모에 대해 한 발언이 유출되면서 항공사 이미지에 먹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승무원들의 외모를 칭찬한 것도 문제인가!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인가! 재취업을 시도하던 그는 한 항공사의 여성 대표가 자신의 입지를 위해 파일럿의 성비를 50:50으로 맞추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여장을 하고 여동생 한정미(한선화)의 신분을 이용해 여성 파일럿으로 항공사에 지원한다. 이게 말이 되냐는 의문이 들 것이다. 아무리 영화라도 항공사에서 파일럿을 뽑는데, 그렇게 허술할 리 있냐는 의심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파일럿>은 그런 의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취업 과정은 적당히 보여주고, 조정석의 여장 연기에는 공을 들인다. 이미 뮤지컬 <헤드윅>으로 유명한 조정석의 ‘여장’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설득력이다.
이후의 전개는 역시 40년 전 <투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투씨>의 도로시(더스틴 호프만)가 1980년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성차별과 고충을 겪었던 것처럼, <파일럿>의 한정우도 여성 신분으로 취업하는 동시에 온갖 험한 일을 경험하고, 그런 에피소드는 당연히 유머로 묘사된다. 남성의 신체에 없는 것을 더하고, 있는 것을 감추고, 그것이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웃픈’ 행동이 공식 그대로 자리한다. 또 역시 도로시처럼 실제 여성이 아니고, 여성으로 가장한 남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처가 일으키는 웃음의 공식도 비슷하다. 콕핏에서 집적이는 남성 기장의 말과 시선을 묵살하거나, 클럽에서 무작정 손부터 잡고 가려는 남자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이 또한 전형적인 ‘미러링’의 형식이지만 <투씨>와 다른 점이 있다면, <파일럿>은 ‘미러링’을 풍자의 방식만이 아니라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투씨>의 도로시가 전 국민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사랑’이었다. <파일럿>에서는 명확한 ‘반성’과 ‘사과’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 ‘여장 남자’의 서사가 이 영화에 필요했던 이유일 것이다. <파일럿>은 거기에서 한 뼘 더 뻗는 시도를 보여준다. 여성의 입장을 체험하는 역할에 국한하지 않고, 젠더 이슈 자체에 파장을 일으키는 존재로 ‘여장 남자’를 드러내는 것이다. 능력보다 성비를 우선시한 채용, 진정성 없이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영화 속 상황에서 한정우의 진실은 풍자의 대상을 확장한다. 단순히 성차별 의식으로 가득한 남성만을 저격하는 것이 아닌, 그런 남성들을 비난하는 흐름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부류까지 꼬집는 것이다. 40년 전 영화가 떠오를 만큼 오랜 설정을 가져오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의도 때문일 듯. 이 시도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의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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