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계의 RT와 시야 전환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무용도 ‘박스 오피스’가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부터 공연 티켓의 온라인 예매 정보를 의무적으로 전송해야 한다. 온 나라 무용 정보가 한곳에 모여드니 트렌드가 읽힌다. 재밌는 점은 통계에서가 아니라 전송자의 ‘오류’에서 유행이 감지된다는 점이다.
이 데이터를 검수하며 내가 최근 가장 많이 바로잡은 것은 의외로 ‘장르’다. 국내 무용은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세 조각으로 나누곤 한다. 그런데 한국무용 단체가 티켓을 오픈하면서 자신들의 공연을 ‘현대무용’이라고 체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대무용’이란 말이 하나의 장르 혹은 현대적인 춤을 모두 뜻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다. 분명한 것은 전통 춤에 뿌리를 두고도 자신이 ‘컨템퍼러리 댄스’를 한다는 인식이 단순 침투를 넘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헤리티지보다 새로움을 추구한다. 발레라고 다르지 않다.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인 서울시발레단이 8월에 첫 공연을 연다. 트렌드의 외관은 컨템퍼러리. 그렇다면 내용물은 어떨까? 예술가가 주도하는 흐름, 그리고 후원자가 주도하는 또 다른 트렌드를 살펴본다.
첫 번째가 힙한 무생물과 RT(Relation Technology)다. 안료를 직접 만들어 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당대부터 물감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어느 석학은 “그의 화학적 지식이 더 진보했더라면!” 하고 탄식하며, 예술이 당대 모든 기술을 사용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했다. 무용계가 요즘 의식하는 기술은 단연 ‘로봇’과 ‘인공지능’이다. 스페인 출신 블랑카 리가 로봇과 춤추는 작품이 프랑스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에서 10년 전에 초연됐지만, 선구적인 작업과 더 넓은 범위의 확산은 다른 차원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앞에서, 표현의 매체로 ‘몸’을 사용하는 무용가들이 느끼는 위협감은 생각보다 크다. 정교한 로봇은 신체적 움직임, 인공지능은 지적으로 동작을 만들고 배열하는 무용가의 능력에 대해 이른바 ‘현타’를 일으킨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화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사진기가 나오면서 모네가 ‘빛’을 이용한 사진기의 방식을 받아들였듯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그 힙한 무생물이 못하는 것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이다. 3년 전 부산에서 방탄소년단의 춤을 추던 로봇 개가 최근 무용 작품에 연달아 등장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현대무용 <야라스>와 발레 <비전>은 로봇 개를 오브제로 각각 가상 원시 문명의 관점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로봇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습을 조명했다. 거꾸로 인공지능이 갖지 못한 것. 생명체의 몸과 감정에 주목하는 주제도 늘었다. 그런데 이때 춤은 IT 기술 자체가 아니라 신체와의 ‘관계’를 탐색한다. RT, 즉 관계 기술은 ‘신체성’의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어령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만든 신조어다. 가상의 몸과 실재하는 몸, 로봇의 몸체와 무용수의 신체, 인공지능의 안무와 사람의 안무를 함께 두고 그 관계성에 주목하는 무용적 방식이 늘고 있다.
두 번째는 ‘감자를 노래하라’다. 얼마 전 ‘춤의 쓸모’라는 제목의 학술 대회가 열렸다. 공연 현장을 넘어 학회까지도 춤의 쓸모를 논한다. 가곡 ‘로렐라이’ 가사를 쓴 하이네는 “시인들아, 장미를 노래하지 말고 감자를 노래하라”고 했다. 무용가로 살아남는 일. 생활의 야만성과 공포를 경기 악화가 더욱 부추긴다. 순수예술인 무용을 선 밖으로 밀어내 ‘사회 경제적 도구’로 봉헌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 학회에선 1년 전부터 ‘무용을 통한 인지 훈련’ ‘움직임 심리 치료’ ‘댄스 웰니스’ ‘무용 경영’ 등 춤의 사회 경제적 확장 가능성을 살펴왔다. 아울러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무용 프로그램 ‘댄스 포 피디(Dance for PD)’, 시각장애인을 위한 ‘무용음성해설가’ 자격증을 받는 무용가도 늘었다.
공연 현장에선 이 때문에 대세가 바뀌고 있다. 꽤 오랜 기간 ‘개인의 암울한 내면’이 탐구 주제로 각광받았다면 점차 안에서 밖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늘고 있다. 젊은 층이 참여하는 무용 공연 중 지난 4월 열린 한국무용제전은 한국 춤 창작의 주제를 ‘생태’ ‘연대’로 정했다. 7월, 전체 장르를 포괄하는 크리틱스초이스댄스페스티벌은 자유롭게 열어두었음에도 사회현상을 다루는 신작이 주를 이뤘다. 국어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늘어난 ‘어른이(어른+아이)’ 증가, 은둔·고립 청년 문제, 미래 인류의 언어 퇴화, 인공지능(AI)과의 경쟁 심리 등이 있었다.
양적 공리주의처럼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한 야외 공연도 많아졌다. 지난가을부터 노들섬 잔디마당의 ‘한강노들섬발레’, 석촌호수의 서울발레페스티벌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현대무용단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야외 페스티벌 등이 관객을 만났다.
셋째는 스폰서가 주도하는 지속 가능성과 배리어프리다. 예술의 역사는 (거의) 후원의 역사다. 특히 무용은 스폰서 없이 이뤄지기 힘들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스폰서는 국가와 지자체이고, 시장경제와 무관한 수준인 순수 무용은 특히 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2050 탄소중립’ 선언 때문에 지원금을 받는 무용 공연, 축제 등의 평가 지표에는 지속 가능성을 위한 노력이 들어간다. 국공립 무용단도 물론 동참해야 한다. 국립발레단과 한국춤협회는 올해 다 쓴 토슈즈, 포토월 등을 잘라서 키 링으로 만들었다. 대한민국발레축제는 남은 포스터(종이)로 의상을 만들기도 했다. 연간 무용 공연이 가장 많이 이뤄지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은 극장 내 포토존, 배너 등 홍보 출력물을 친환경 소재로만 만들도록 제한했다. 심지어 대관 신청서에 지속 가능성에 대한 글을 논술 평가처럼 쓰게 한다.
시그널이 전해지니 공공 기관이나 재단 지원금 신청 때 환경 문제를 다루겠다는 안무가들이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물론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무용가는 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원자의 막대한 선호 표시가 촉매가 되었음은 자명하다. 배리어프리 공연과 장애 무용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책적 관심과 예산이 쏠리면서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결국 무용 트렌드는 이것이다. 인간의 신체성을 최신 기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탐구하는 RT,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만큼 힘든 ‘무용계에서 살아남기’를 위한 시야 전환, 무용 스폰서가 주도하는 지속 가능성·배리어프리까지··· 그런데 대세를 따르기만 하는 예술은 재미없다. 다수의 흐름에 딴지 거는 유니크함, 새로운 물결을 부르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늘도 극장을 찾는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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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윤대성(<댄스포럼> 편집장)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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