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저항하는 최정예 군단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인스타그램에서 낯선 계정 하나를 보았다. 계정 주소는 @poemmag. 이름은 포엠매거진. 시 잡지인 걸까?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전국에 시 전문 잡지는 이미 많은데.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현대시> <시와 세계> <시와 반시> 등이 있다. 그런데 계정 분위기를 보니 기존 잡지와는 사뭇 다르다. 상단에 핀 고정된 게시물은 최근에 치른 백일장 수상작이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이 맨 앞 장에 놓여 있고, 사진을 넘기니 그제야 수상작이 등장한다. 제목은 〈뒤집은 컵을 뒤집을 때 다시 다짐한 마음이 있어〉(김태현 지음). 이걸 정식 등단이라 할 수 있을까? 구시대적 질문은 접어두고 일단 읽어보기로 한다. 의심할 구석 없이 좋은 시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과 뒤집힌 컵과 깨지기 쉬운 마음이 시 안에서 사이좋게 포개지고 있었다. 백일장답게 심사 평도 있었는데, 이런 문장이 눈에 띈다. “시가 이렇게 재밌는데, 사람들은 왜 모를까?”
정말이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사람들은 시에 대해 대체로 이렇게 여기는 듯하다.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시는 예술이고 문학이다. 시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다. 시는 어려운 것이다. 시는 고리타분한 것이다. 시는 누군가는 읽겠지만 나는 읽지 않는 그 무엇이다. 시는··· 하지만 포엠매거진의 인스타그램에서는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건 문학적인 시도나 문예사조의 전환 같은 대문자로서의 가능성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보이는 가능성은 개인의 취향이 모여 하나의 군락을 이루는, 소문자로서의 가능성이다. 이 소문자들은 알고리즘이 정해주는 취향의 방향성에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엠매거진은 행궁동 팝업 숍에서 티셔츠를 3만원에 팔았을 뿐 아니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문학동네와 협업해 일약 크나큰 관심을 받는 굿즈를 내놓았다. 무릇 티셔츠는 앞면의 그림이나 텍스트로 골라서 입는 자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법이 아닌가. 문제의 티셔츠 앞면에는 이런 문구가 투박한 서체로 적혀 있다. “외계인 침공시, 시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
시가 달라지고 있다. 시가 달라졌다는 것은 시인과 작품만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대하는 독자의 태도와 자세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시대에 ‘굳이’ 문학을 찾는 독자는 스마트폰을 들지 않고, OTT 리모컨을 내려둔 채 ‘굳이’ 책을 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확고한 취향의 소유자다. 문학은 대중적인 취향의 한 장르로서 존재감을 이미 잃었고 앞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만 더 확실하게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이는 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아니다. 이미 공통의 취향보다는 각자의 취향에 골몰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다 보니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게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은 그 함정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줄 동아줄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독서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가 사실로 드러나는 동시에 서울국제도서전 같은 행사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리고, 전국 각지에 개성 있는 큐레이션의 동네 서점이 생기며 독립 출판물이 꾸준히 생산되는 이치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좋아하는 특별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 그것이 당신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특별한 사람. 그리하여 외계인에게 나중에 잡아먹힐 것이다.
요즘 출판 현장에서 시집은 기본적인 판매 부수가 유지되는 편이다.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도 탄탄한 마니아층이 좋은 시집을 단박에 알아본다. 또한 그들은 이전의 경력이 없는, 새로운 시인에게도 자주 눈길을 준다. 임유영의 <오믈렛>,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 차도하의 <미래의 손>, 박참새의 <정신머리>, 조성래의 <천국어 사전>, 마윤지의 <개구리극장>, 한여진의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배시은의 <소공포> 등등. 이렇듯 독자의 사랑을 받은 신인 작가의 첫 시집이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시를 좋아하는 일이 그 시를 지은 시인에 대한 애정으로 직결되는 경우도 많다. 새로운 독자들이 소규모 낭독회나 온라인 라이브 방송, 독서 모임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다. SNS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취향의 미묘한 통일성에서 벗어나, 취향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요즘 출판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오히려 잘 들어맞는 면이 있다. 그중 창작자의 세대교체 주기가 빠르고 (기존 문인들도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하며) 그 결과 수많은 작품이 생산되어 특정 취향인을 위한 마르지 않는 후보군을 제공하는 지금의 한국 문학사는 낯선 외계인에게 용기 있게 대거리할 수 있는, 취향의 단독자인 당신을 위한 단단한 갑옷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잡아먹히지 않거나 끝내 잡아먹히더라도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이가 될 것이다. 진짜 외계인들 혹은 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이라는 외계인으로부터 말이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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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서효인(시인)
- 사진
- @poemm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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