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각성과 SF적 상상력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무진형제(Moojin Brothers: 정무진, 정효영, 정영돈 세 명으로 구성된 미디어 작가 그룹)는 지난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지역네트워크교류전 <자연사람>(2023. 11. 3~2024. 2. 25)에 출품할 ‘한낮의 무리(Herd of the Day)’ 작업을 위해 인공지능 챗봇에게 “기후 위기와 관련해 동물 이름 365개를 지어줘(Give 365 names to animal in relation to the climate change)”라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챗봇은 앤젤루스, 에코모션, 플라니보스, 아이포퓨볼, 오레이, 피어, 솔라리스, 미디언, 시너제, 코멧라이즈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각각의 이름은 모두 고유의 성격을 지녔다. 예를 들면 기후 위기에 대한 새로운 수호와 지지를 상징하는 이름, 기후 위기에 대한 새로운 세계와 연결된 이름, 환경 보고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역할 강조 등··· 다양한 의미와 이름을 지닌 드로잉은 365개 형상의 동물로 탄생했다. 개나 고양이, 멧돼지나 늑대처럼 보이지만 규정할 수 없는 형태의 드로잉은 어딘가로 향하듯 전시장 벽면을 둘러쌌다. 전시장 가운데 기념탑처럼 세운 곳에 설치된 애니메이션을 통해 달려가는 듯하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이 등장한다. 365개의 동물이 한 마리가 되어 끊임없이 걷는데 배경은 검은색이다.
무진형제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검은 배경은 서아시아의 여름과 파키스탄의 몬순, 남미의 겨울과 제주의 봄 바다와 연결될 수도 있다. 그 검은 배경에서 하얗게 빛나는 동물의 움직임은 전 세계적인 기후 재난 속에서 그럼에도 뭐라도 해보려는 인간의 공통 의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 전시 현장에서 눈에 띄는 건 기후 변화에 따른 각성을 요구하거나, 대응하지 못해 인류가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SF적 상상력이다. 2019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된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다(Nothing Twice)>(2019. 2. 26~6. 9)에서는 퇴적된 플라스티글로머럿(Plastiglomerate)이 보존된다면 인간의 영향이 커진 지질 시대, 즉 인류세(Anthropocene)의 지표석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인간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크기를 넘어서서 작동하는 것,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에 직면했다. 가뭄, 홍수, 기후 변화 등 생태 위기는 깨졌고, 방사능 물질 유출 등 인간이 만든 인재에 노출되어 있다. 전시 제목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ława Szymborska)의 시 ‘두 번은 없다’의 한 구절에서 빌려왔다. 생태계 파괴와 공동체의 모색을 다룬 전시 경향은 팬데믹을 지나면서 ‘실천’을 촉구하는 쪽으로 확장됐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2023. 9. 2~2024. 1. 7)는 한스 하케, 알렌 세쿨라, 방정아 등 미주, 유럽,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해 기후 위기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다루었다. 자본주의적 삶의 변화 촉구와 함께 ‘동시대 미술은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가’라는 미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댄 퍼잡스키(Dan Perjovschi)는 대형 드로잉 작품 ‘기후 드로잉-휴먼 네이처’(2023)를 미술관 야외 유리 벽면과 내부 난간 전면을 활용해 선보였다. 이는 작가가 2013년부터 지속해온 ‘기후 드로잉’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다.
다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로 돌아가보자. “오늘은 언제나 내일이면 사라집니다”라는 시구절에 눈길이 머문다. 팬데믹 전후로 기후, 생태, 환경을 둘러싼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전시는 꾸준히 열리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젠가 지구가 소멸할 것이 자명하지만 그 시간을 앞당기는 유해한 존재, 인간종에 대해 고찰한다는 것이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2024. 6. 4~8. 4)에서는 ‘시간(타임)의 티(T for Time)’를 볼 수 있다. 43대의 모니터에 개별적으로 재생되는 ‘타임피스’ 영상은 각각 1초, 1분, 24시간, 약 165년(해왕성의 공전 주기) 등 다양한 주기로 반복 재생된다. 동서양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시간의 사유와 측량, 계량 등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시간과 근대성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타임피스’ 중 ‘15. 정물화’는 바니타스(Vanitas)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16~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오늘날 우리가 겪은 팬데믹처럼 중세 유럽의 흑사병과 무관하지 않다. 바니타스는 ‘공허한’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바누스(Vanus)가 어원이다. 세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전에서는 시공간과 우주를 주제로 한 작업을 대거 선보였다. 작가는 60여 년간 미국의 사회, 경제, 과학, 우주, 실존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박희정 세화미술관 부관장은 “‘본질적 존재’라는 유작인데요. 작가는 세계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존재하고, 흐르고 있다고 여겼어요. 가운데 움직이는 거울은 결국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거울에 비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라고 덧붙였다.
물리학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빈 무대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진형제는 인간의 의지를 믿는다. 호추니엔은 시간의 본질을, 제임스 로젠퀴스트는 본질적인 존재를 인식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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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천수림(미술 저널리스트)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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