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여행자들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여행을 사랑해서 몇 권의 여행 에세이를 출간하고 여행책을 자주 출판하는 회사 대표로 일하는 내게 여행의 의미가 어쩐지 점점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여행을 삶처럼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신슬기 작가 역시 현재 여행 중이다. 정확히 말해서 신혼여행으로 2년째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혼여행 먼저, 결혼은 나중에’가 여행 테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예비 남편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SNS에 올린다. 무슨 돈으로 2년씩이나 여행을 하느냐고? 그녀는 여행 크리에이터다. 여행지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거기서 발생한 수입으로 여행을 한다. 그녀는 고등학생 때 <우물 밖 여고생>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가는 대신 동남아 여행을 선택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째 책 <스무 살은 처음이라>를 썼다.
안시내는 여행을 하고,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여행을 독려하는 강연을 하며 산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모은 350만원으로 6개월 동안 세계를 누볐다. 그러다 여행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곧바로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안시내는 1세대 여행 크리에이터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행을 계속하며 글을 쓸 수 있었다. 학교는 더 이상 그녀의 꿈을 키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고 본격적인 여행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에겐 여행이 직장이자 학교였다.
꿈도 취미도 없이 강의실 뒷자리만 전전하던 스물한 살, 홍시은 작가는 시험장에 백지를 내고 학교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 후 2년 동안 전 세계 오지를 떠돌았다. 우간다의 어느 고아원에서 학교를 지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이집트 다합에서는 다이빙에 도전했으며 기타도 배웠다. 인도 바라나시의 강가에서 시신이 타는 것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골몰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도 여행이 학교이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스승이었다. 홍시은은 그렇게 자신만의 색깔과 꿈을 찾고 돌아와 지난해 <학교 넘어 도망친 21살 대학생>을 출간했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진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세 사람의 공통점은 대학을 가지도, 마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학력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현실로 보면 이들은 몹시 우려되는 청년들이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스펙을 쌓아도 모자랄 판에, 이 청년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행에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걸까.
나 역시 두 번의 산티아고 순롓길을 다녀왔다. 첫 번째 순롓길은 암 수술, 이혼, 사업 실패로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였다.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낯선 곳에 나를 던져보기로 했다. 살고 싶어서였다. 40일간의 도보 여행 중 나는 들고 갔던 코펠을 어느 알베르게(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숙박업소) 주방에 내려놓았다. 밥그릇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큰 의미였다. 나에겐 육체의 허기를 채울 그릇보다 정신의 허기를 채울 그릇이 더 필요했다. 그 길에서 나 자신의 가치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야 돌아와서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인생 학교의 학생이에요. 길 위에서 배우는 게 더 많거든요.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요.” 산티아고 순롓길에서 만난 청년 모리츠가 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알베르게에서 며칠씩 일을 하며 돈이 모이면 순롓길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그의 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언젠가는 산티아고에 닿을 거라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팬데믹 시기에 막혔던 하늘길이 열리며 한창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세대들이 다시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에 담긴 그들의 포부는 한층 거창해졌다. 자유 여행이든 순례 여행이든, 카우치 서핑이든, 워케이션이든···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여행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대신 여행이라는 인생 학교에서 더 귀한 공부를 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어디에 가고 무엇을 보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1~2년의 여행은 빈둥거리며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결코 아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다 보면 오로지 자신에 집중할 수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과 정서적으로 밀착감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그 시기의 깨달음은 새로운 삶을 위한 나침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내 지인이 이집트 다합에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했다. 어느 날 그녀의 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인생과 여행은 파도 같아서 파고가 높을수록 바닥도 깊습니다. 태어난 김에 파도를 잔뜩 맞아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처럼 ‘인생의 파도를 잔뜩 맞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이 시대의 여행자들은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며 지혜를 익히고, 삶의 파도에 부딪히고 깨지는 것에 반색하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쌓는다. 그리하여 전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아니, 꼭 돌아올 필요도 없다.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로 그들은 떠난다. 다양한 여행 경험을 밑거름 삼아 더 깊은 바닥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테니까.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말했다. 그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나를 찾는 여정이라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과 떠난 후의 삶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결국 해본 사람만 안다. 나는 오래전 산티아고 순롓길에서 코펠을 내려놓은 후로 한 번도 굶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책 만드는 일을 지금껏 계속해오고 있다. 돌이켜보니 그곳이야말로 내가 거쳐온 모든 곳 중 가장 훌륭한 배움터였다.(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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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한효정(여행 작가, '도서출판 푸른향기' 대표)
- 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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