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힙합 디폴트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2010년대는 힙합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힙합은 빌보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최강자였다. 세계의 힙합뿐 아니라 한국의 힙합에도 영광의 나날이었다. 많은 래퍼가 성공을 누리고 성공을 꿈꾸던 시대, 축제와 행사에 래퍼가 섭외 1순위였던 시대, 10대의 꿈이 래퍼였던 시대. 우리는 막 이 시대를 지나왔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힙합은 더 이상 멋지지 않다거나 힙합은 이제 죽었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쇼미더머니>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빌보드에서 힙합의 성적이 예전보다 부진하자 쏟아진 반응이다. 실제로 최근의 한국 힙합은 거품이 빠졌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신의 크기보다 더 팽창해 있던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제 한국 힙합은 지난 시대를 통과하며 얻은 것들을 쥐고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흥미로운 광경이 있다. 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몇몇 걸 그룹의 모습이다. 한국 힙합 신에서는 힙합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왈가왈부하고 있는데, K-팝 신에서는 걸 그룹이 힙합을 내세워 컴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렌드에 누구보다 발 빠른 것이 K-팝 산업일 텐데, 이 시기에 힙합을 표방하는 모습이 뭔가 아이러니하면도 몹시 흥미로웠다. 영파씨, XG, 뉴진스 얘기다.
영파씨는 팀 자체를 ‘힙합 걸 그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커리어 내내 힙합 음악을 정체성으로 삼고 활동하고 있다. 먼저 데뷔곡 ‘MACARONI CHEESE’는 완연한 트랩이다. 트랩 비트와 랩으로만 가득한 노래다.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XXL’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사운드가 1990년대 붐뱁을 소환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베이스 라인과 안무도 인상적이다. 또한 앨범 수록곡도 힙합의 다양한 스타일로 가득 차 있다.
XG의 신곡 ‘WOKE UP’ 역시 강렬하다. 아니, 솔직히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이 노래의 비트와 랩에는 어떤 절충이나 타협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후진 없이 그 반대 방향으로 일부러 직진한 듯한 힙합 음악이다. 걸 그룹의 노래 중에 이 정도 순도와 밀도를 지닌 힙합 음악은 지금껏 없었다. XG를 K-팝이라고 전제한다면 ‘WOKE UP’은 K-팝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뉴진스의 컴백 역시 힙합과 함께했다. 하니는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How Sweet’을 가리켜 ‘찐 완전 힙합’이라고 말했다. 물론 공개된 노래는 대중이 떠올리는 힙합과 차이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오히려 뉴진스의 음악적 방향성을 더 존중하게 된다. ‘How Sweet’은 마이애미 베이스에 바탕을 둔 노래고 마이애미 베이스는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브 장르이기 때문이다. ‘Supernatural’이 추구한 뉴 잭 스윙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패션과 비주얼 디렉팅까지 합하면 뉴진스의 이번 컴백은 넓은 의미에서 ‘힙합 토털 패키지’라고 볼 수 있다.
이쯤에서 균형을 잡아보자. 굳이 힙합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택해야 한다면, 최근 걸 그룹이 힙합을 내세워 컴백한 이 상황은 힙합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한국 힙합 신이 여러모로 K-팝 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더 큰 영역에서는 따로 분리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파씨의 제작자 키겐에게 이에 대해 직접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힙합 전문 커뮤니티부터 살펴보는 힙합 팬이에요. 하지만 힙합 시장과 K-팝 시장은 많이 분리되어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영파씨의 데뷔와 관련해 (힙합의 요즘 상황을) 아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걸 그룹의 ‘힙합 컴백’은 지금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힙합은 이제 ‘공기’ 같은 것이 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한 것 말이다. 힙합이 1위를 하는 것도, 예능 프로그램에 힙합이 나오는 것도, 플레이리스트에 힙합이 꽤 많이 들어 있는 것도 이제 더는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을 거치며 그냥 익숙한 일이 돼버렸다.
힙합이 ‘언더독’ 입장에 있을 때는 이 모든 것이 놀랍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힙합이 ‘챔피언’ 자리에 오래 머무는 동안 힙합은 모든 곳에 스며들게 됐다. 1위를 하던 래퍼가 3위나 4위를 하게 됐다고 해서 힙합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힙합은 모든 음악과 패션, 라이프스타일에 잠복(?)하게 됐다. ‘디폴트값’으로서 힙합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걸 그룹의 힙합 컴백은 이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 위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더 있다. 진짜냐 가짜냐, 순정이냐 아니냐 논란은 이제 힙합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영파씨는 멤버들의 나이로 볼 때 이 논란과 완전히 동떨어진, 완전히 무관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파씨가 ‘나의 이름은’ 같은 곡을 불러도 별다른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없다. 만약 영파씨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많은 위 세대였다면 ‘뭘 안다고 붐뱁을?’ ‘힙합 그룹으로 인정할 수 있나 없나’ 논란이 힙합 마니아 사이에서 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파씨가 워낙 어리다 보니 그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어린 세대가 이런 비트에 랩을 하는 게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힙합이 모든 장르에 스며든 시대에 이르러, 힙합의 순정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세대가 비로소 보여주는 힙합 아이돌의 완성도인 셈이다.
XG의 랩 담당 멤버들 역시 비슷하다. XG의 랩은 훌륭하다. 그동안 등장했던 한국의 모든 여성 래퍼를 통틀어서도 XG 멤버들이 가장 완성도 있는 랩을 들려준다고 느낀다. 과장이 아니다. 힙합 저널리스트로서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수준의 랩 실력이 있음에도 XG 멤버들에게는 힙합이라는 장르와 문화를 향한 충성심이나 자부심 같은 건 딱히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지점이 매우 상징적이다.
이전 세대의 힙합 아티스트와 리스너에겐 힙합 신이라는 준거집단이 있었다. 힙합만의 태도와 코드 역시 존재했다. 또한 이전 세대 걸 그룹의 ‘랩 담당’ 멤버는 늘 힙합 커뮤니티의 인정을 중요시했다. 늘 자신의 랩 실력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XG 멤버들의 세대는 양상이 또 다른 것 같다. 이들에게 힙합은 단지 즐겁고 매력적인 존재인 것 같다. 어떤 여성 래퍼보다 랩을 잘하면서 그걸로 득을 보려고 하거나 인정을 원하는 태도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힙합이 챔피언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의 자연스러운 특성으로 보인다.
한편 XG는 힙합을 그룹의 정체성으로 삼는 팀은 아니다. 10곡에 가까운 그들의 활동곡 중에 힙합으로 분류할 수 있는 노래는 두어 곡뿐이다. 예전 같으면 그것은 힙합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댄스 팝으로 활동하다, 다음에는 힙합 트랙으로 컴백하고, 그다음엔 귀여운 컨셉으로 바꾸는 것은 진정한 힙합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부터가 그런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는다. 대신에 ‘뭐 어때? 그게 지금 와서 뭐가 문제인데?’라고 읊조리게 된다. XG의 ‘WOKE UP’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렬한 힙합 트랙이다. 지키고 계승하는 개념으로서 힙합의 시대가, 그리고 가장 강력한 단일 장르로서 힙합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내가 ‘긁혔냐’고?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그저 다음 시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실하게 해석하고 싶을 뿐이다. 디폴트값으로서 힙합의 시대를.(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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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봉현(힙합 저널리스트)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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