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작가가 그리는 물의 산과 산의 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스위스 바젤에선 매년 6월이면 이 말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부터 54회째 이어오며 아트 페어의 기준이 된 아트 바젤 바젤 2024의 치열하고도 우아한 현장. 그곳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키스 해링의 숨은 삶을 살피고, ‘언리미티드’ 섹터를 수묵화로 물들인 김민정 작가와 ‘스테이트먼트’ 섹터에서 SF 작품을 현실로 이뤄내며 회자된 오묘초 작가를 만났다.
아트 바젤 바젤의 언리미티드 섹터에서 김민정 작가의 거대한 연작 ‘Traces’를 마주했다. 절벽에서 들은 파도 소리를 그리니 산이 되고, 이를 불로 태우니 물이 된 작품이다. 작가와의 대화는 그의 작품처럼 청자를 명상으로 이끈다.
아트 바젤 바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언리미티드 섹터의 ‘부스 U61’에도 김민정의 작품 3점이 펼쳐져 있다. 새벽안개에 아스라이 펼쳐지는 수묵의 자연을 보는 것 같다. 가로 8m의 ‘Mountain’을 중심으로 양옆에 ‘Timeless’가 자리한다. 모두 아울러 ‘Traces’라는 새로운 연작이다.
작품 앞에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 관람객이 명상에 빠진 것처럼 몇 분째 미동도 없다. 한지에 은은히 퍼져나간 먹처럼 그녀의 작품은 보는 이를 고요함에 스미게 하는 힘이 있다. 김민정 작가 역시 이 작품에서 “각자의 고요함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때 빈티지 데님 재킷을 입고 분홍색 오팔 귀고리를 한 작가가 나타났다. 그녀는 방금 엘리베이터 앞에서 춤을 췄다고 했다. “당신네를 만나러 오는 게 너무 즐겁더랑께.” 196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의 말투엔 사투리가 정답게 섞여 있다. 작가는 시종 다정하고 친근하고 에너지 넘쳤다. 신비롭고 우아한 작품과는 사뭇 달라 처음엔 조금 놀랐다. 작가와의 대화는 이런 선입견을 깨는 과정이기도 했다.
김민정 작가는 습도에 매우 예민한 한지와 먹을 소재로 매일 수십, 수백 번의 붓질과 기다림을 반복하고, 가장자리를 향불로 그을린 한지를 숨죽여 덧대는 작업 과정을 거친다. ‘반복과 수행’. 작가의 작업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작가는 수행이란 단어에서 고통스러움이 느껴진다며 그보다는 놀이로 칭하길 바랐다. 그녀는 흔히 예술을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고통과 인내,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펄쩍펄쩍 신나게 노는 듯 보였다.
김민정 작가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진학한 뒤 1991년 28세에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밀라노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파도 소리에 심취했고, 그 물소리를 그리려 했지만 완성해놓고 보니 산이 나오면서 운명처럼 지금의 ‘Mountain’ 연작이 시작됐다. 향초로 한지 가장자리를 태우며 또 한 번 작품 세계를 넓혀온 그녀는 다음엔 또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모른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천명처럼 올 것이다”. 하지만 한지라는 아주 예민하고 예측 불가능한 소재는 계속 가져갈 것만 같다. 작가는 한지가 “내 피부와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못다 완성한 한지 작품은 버려지지 않고 작업실 서랍에 잠들어 있다. 작가는 생이 다하면 이것들과 함께 화장되길 소망한다. 죽고 싶던 자신을 종이가 살리고, 평생을 함께 놀았다면서.
평소엔 프랑스 생폴드방스 전원에서 작업에만 열중하죠. 아트 바젤처럼 북적이는 미술 시장으로 외출하면 어떤 기분인가요?
이 많은 사람을 봐요. 혹하지 않아요? 국민학교 때도 선생님들 웃기는 거 좋아했을 만큼 본시 사람을 좋아해요. 하지만 예술가는 혼자 놀 줄 알아야 해요. 내가 고행을 하려고 작업실에 들어가진 않지만, 그곳에서 오롯이 나와 시간을 보내야 내 것이 나옵니다.
지난 인터뷰를 보면, 한지 작업이나 예술가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지요. 아무리 질문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바로 운명이죠.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운명보다 빠를 순 없다”는 아프리카 사람들 말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늘 겸손해야 해요. 내 고향 전라도에서 ‘근갑다’란 말을 써요. 그냥 받아들여야지요.
언리미티드에서 ‘Traces’라는 새로운 연작을 선보였습니다. 대표작인 8m의 ‘Mountain’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Timeless’를 배치한 것이죠.
우선 ‘Mountain’ 이야기를 해보지요. 저는 늘 산을 그려왔어요. 예전에 영감을 얻는답시고 이탈리아 남부의 아말피 해안에 갔어요. (당시 김민정 작가는 이탈리아 브레라 국립미술원에 재학 중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자리한 집에 머물렀는데 계속 파도 소리가 들렸어요. 어릴 적에 동양화가 허백련 선생님과 아버지가 친하셨는데, 그분 말씀이 떠올랐어요. “내가 여든이 넘어서도 무등산에 살며 산과 물을 그리는데 물소리는 아직이다.” 건방지게도 내가 이 바닷물 소리를 그려보고 싶더라고요. 밀라노로 돌아와서 그 소리를 기억하며 그림을 계속 그렸어요. 물에 먹을 떨어뜨리고, 한 줄 긋고 서너 시간 걸려 마르면 다시 먹을 쭉 내렸죠. 진한 먹이 될 때까지 반복해 완성하니 물이 아니라 산이네. 마음이 평정해지더니 그래, 산이 나왔으면 산으로 받아들이자 싶었지.
산도 운명으로 받아들였군요.
하다 보니 망조가 된 산도 있지요.(웃음) 그리다 외출하고 오면 먹의 양을 얼마나 했는지 잊기도 하고. 그런 그림을 버리지 않고 모아놔요. 한지가 얼마나 귀한데 어찌 버려요. 내가 죽으면 종이랑 태웠으면 싶어요. 평생을 종이와 놀고, 죽고 싶던 인생을 종이가 살리기도 했으니.
무병장수해야지요.
그걸 어찌 아나요. 버리지 않고 모아둔 종이에서 영감을 얻기도 해요. 그들이 말을 건네는 거 같아요.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하면서. 60세를 넘어가니 살날이 적어지잖아요. 그러니 내가 했던 것을 돌아봐야 해요. 어느 날 그렸던 종이들을 싹싹 잘라서 가장자리를 불로 태워 붙인 작업도 그 덕분에 했지요. 이렇게 태우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물결이 나오더라고요. 물소리까진 안 들리지만서도.
‘Timeless’가 ‘Mountain’을 얇게 잘라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켜켜이 쌓아 완성한 작품이죠. 왜 이름을 물결이나 파도가 아니라 ‘타임리스’라 지었나요?
물소리가 언제부터 있었나요? 2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수천 년 전에도 이 물소리를 들었겠죠.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Timeless’지요.
언리미티드에 이 두 작품을 함께 배치해 ‘Traces’라 이름 붙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가로서 지나간 자국으로 이것들을 끌어냈잖아요.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자국일 뿐이죠. 몇만 년의 역사에서 인간은 겨우 몇천 년이나 살았을까, 그냥 자국이죠. 그것도 물 자국. 오늘 아침에 언리미티드 부스를 보면서 이것이 정중동(靜中動)이구나 했어요. 말 그대로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죠. 산은 고요해 보이지만 뿌리끼리 치열하게 싸우고 많은 생명체가 전쟁을 벌이고 있죠. 세상은 그렇게 순환해요. 10여 년이 걸렸지만 내가 결국 산과 물소리로 세상의 조화를 이 안에 담아냈구나 싶어요.
관람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만나길 바라나요?
누구나 고요함의 힘이 있는데 점차 잃어가요. 그 각자의 고요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어느 노년의 미술 비평가가 그러더라고요. 내 작품을 보면 빨려 들어간다고. 그러다가 자신이 이렇게 작구나 깨닫는대요. 그 말을 들으니 아이고, 내일 죽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웃음)
12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죠. 어머니의 열정과 지지가 이끌었다고요. 언제 스스로 작가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했나요?
아들 바라는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났어요. 이상한 미신 때문에 유치원에 다닐 때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자아이 옷을 입었던 기억이 나요. 다들 나를 머스마로 봤죠. 하루는 아버지가 “니는 뭐든 열심히 잘해야 한다, 1등 아니면 인자 인생이 힘들다”고 하셨죠. 나는 정말 계속 1등 하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지만 최고라는 판사가 될 수 없었어요. 당시에 어머니 쪽이 공산당 연좌제 그딴 거랑 연관 있었거든요. 울 어머니가 “그러니 너는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되라”고 하셨죠. 육십이 넘어서야 작가가 천명이란 걸 알았어요. 이제 아니까 또 시간이 없네. 그래서 그림을 얼마나 남기고 죽을까, 그거 말고는 다 잡스러워요.
1991년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 재학 당시 심신이 힘들었죠. 한국에서 그림깨나 그렸지만 새로운 곳에선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고요. 그때 마우리치오 보타렐리(Maurizio Bottarelli) 교수가 “봄을 추상적으로 표현해보라” “아카데믹한 방식에서 자유로워지라”고 조언한 뒤 천천히 추상회화에 눈을 떴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줄 몰라서 무진장 힘들었죠. 계속 자고 싶었어요. 잠은 작은 죽음이니까요. 아르놀트 하우저나 에리히 프롬도 사람은 자유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누가 결정해주고 대신 해주길 바라죠.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는 미술 기법은 철저하게 배웠지만, 밀라노에 와서 봄을 그리라는데 뭔지 모르겠더군요. 선생님이 그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봄 음악을 다 들어보고 그리래요. 그래도 모르겠다 하니 얼룩으로 그려보래요. 얼룩이란 망친 것을 의미하는데 무슨 소리일까 헤맸죠. 그렇게 선생님께서 전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일깨워주셨죠.
“작업은 나를 잃어버리는 과정”이라고도 했죠.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로 작업하나요?
그렇기에 이런 작업이 나왔겠지만, 나도 몰라요. 그저 딴생각을 안 하는 거지.
작업할 때 명상 상태와 비슷하겠군요.
그림 그릴 때뿐 아니라 이렇게 사람을 만날 때도 그래요. 상대가 있는 그대로 보여요. 명상이란 있는 걸 그대로 볼 수 있는 상태죠.
먹 하나를 떨어뜨리고 마르길 기다렸다 다시 그리고, 한지를 태우고 덧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덕분에 수행의 작가라고도 합니다. 신체적으로도 고될 텐데요.
자꾸 수행이라고 하지 마요. 수행이란 단어에 고통이 느껴지거든요. 예술은 고통이 아닙니다. 예술가는 그 위에서 놀아야 해요.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작업을 해왔지만 생각해보면 다 노는 짓이었어요. 어쨌든 신체적으로 쉽진 않죠. 그리면서 많이 아팠어요. 근데 몸이라는 게 신기해. 우리도 피곤하다가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나잖아요. 나는 그것이 보통 자연이에요. 그래서 내가 집에 딸기도 재배하고 닭도 모이 주고 그래요. 그런데 여우가 와서 가끔 잡아먹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여우도 먹고 살아야지.
수행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나요?
날 만나러 오면서도 ‘김민정 작가의 작업은 수행’이란 것이 머리에 박혀 있잖아요.(웃음) 나는 그냥 노는 거예요. 스토아학파의 쾌락주의는 욕망의 흥청망청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열심히 배웠기에 악기와 하나가 되어서 연주할 수 있고 그렇기에 내가 즐겁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죠. 예술에서 쾌락은 이런 거예요. 죽고 싶어 했던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종이를 태우고 놀았기 때문이지요. 놀고 있으면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나를 무아지경으로 만들어주는 수단이기도 하지요. 이젠 종이를 확 태우며 놔버릴 때도 있고 더 재밌게 놀고 있지요.
태우기 이후에 어떤 놀이를 할까요?
뭔가 실행할 때 모르고 그냥 재미있어서 해요. 그런 게 노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할지는 모르죠.
지금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없당께. 하지만 이런 건 있지요. 사람들은 잠을 설치면 너무 힘들어하잖아요. 실은 잠이란 게 작은 죽음인데, 그걸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고 난리지요.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고, 죽음이 삶 속에 있을 때 행복하지요. 나는 이것을 알고, 세상에 하찮은 건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 안에서 나의 천명, 그러니까 다음 세대에 본이 되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도 인연이 닿아야지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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