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작은 소란에서 시작되는 모든 것이 가능한 미래

2024.09.02

작은 소란에서 시작되는 모든 것이 가능한 미래

모든 것은 작은 소란에서 시작된다. 샤넬이 프리즈와 함께 벌써 세 번째 일으킨 예술적 소요. 아티스트 김아영과 임영주가 ‘나우 & 넥스트’ 비디오 시리즈의 포문을 열며 모든 것이 가능한 미래를 상상했다.

“영국에서 순수 현대미술 사진을 공부하면서 되레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구나’ ‘열심히 떠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 깨닫게 됐어요. 그 후 하나의 이미지에 함축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보다는 영상을 기반으로 한 사변적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검은 볼캡을 눌러쓴 큐레이터가 예술가의 길에서 느낀 첫 번째 확신에 대해 묻자 칼단발과 컬러풀한 아이라인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등장한 김아영 작가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영상을 주 매체로 사용한다는 반가운 공통분모를 지닌 김아영과 임영주 작가가 지난 7월 24일 샤넬과 프리즈가 마련한 아트 토크를 위해 샤넬 서울 플래그십에 모여 앉았다. 올해로 벌써 3회째 결속력 있게 이어지는 ‘나우 & 넥스트(Now & Next)’ 비디오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였다. 다채로운 컬러의 트위드 재킷과 클래식 백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소화한 게스트들이 어두운 공간에 안착한 가운데 각각 현재(Now)와 미래(Next)를 대표하는 첫 주자로서 서로를 마주한 김아영과 임영주 작가가 균형 잡힌 흐름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영상을 주 매체로 사용하는 김아영과 임영주 작가가 샤넬과 프리즈의 ‘나우 & 넥스트’ 비디오 시리즈 세 번째 시즌을 소개하기 위해 샤넬 서울 플래그십에 모여 앉았다.

오는 9월과 12월에 아트 토크를 이어받을 김민정, 박영숙, 김성윤, 양정욱 작가의 이야기 역시 흥미롭겠지만 김아영과 임영주가 이 시리즈의 포문을 열게 한 샤넬과 프리즈의 선택은 탁월하게 느껴졌다. 둘 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펼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임영주는 인간의 믿음 체계 이면에 깔린 욕망, 환희, 불안 등을 날카롭고도 엉뚱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비디오와 회화, 텍스트와 설치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음기가 강한 땅에 세운 아파트에 ‘남근석’을 설치한 주민들, 금(金)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특히 돌과 관련된 미신을 오랫동안 흥미롭게 추적해왔다. “사람들이 뭔가를 믿거나, 믿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에 대한 제 이야기를 믿게 하기 위해 영상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고요.” 최근 페리지갤러리에서 선보인 개인전 <미련 未練 Mi-ryeon>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해 질문하고 이야기했다. 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관람객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전시 경험 방식을 직접 골라야 한다. 자신의 묫자리를 직접 찾아 헤매는 VR 체험과, 그런 누군가의 VR 체험을 전시장에서 비디오로 감상하는 것 중에서 말이다. 어느 쪽이든 죽음에 관해 깊이 있게 상상하는 관람객을 귀엽게 바라보며 임영주는 전시 기간 내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나름의 몸짓으로 던지는 예술의 역할을 실감했다”고 터놓았다.

김아영이 아주 작은 사건을 거대한 픽션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즐긴다고 이야기하며 맞장구쳤다. 다양한 매체를 실험한 끝에 그가 맨 처음 펼쳐놓았던 방대한 세계관은 ‘다공성 계곡’(2017~2020) 연작. ‘페트라 제네트릭스’라는 금빛 광물 조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었다. 영상 속에서 원치 않은 이주를 겪은 후 입국 심사까지 거치게 되는 이 정육면체 조각은 이 땅의 모든 떠돌이와 경계인을 표상하는 존재였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삶의 조건이 있잖아요. 지정학이라든지 시대의 흐름 같은 거요. 그런 체계에서 조금씩 엇나가는 개체에 마음이 이끌려 그것에 얽힌 픽션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관찰과 실험, 상상을 통한 이야기의 확장. 집중하는 주제와 활용하는 매체는 달라도 김아영과 임영주는 똑같이 이야기의 확장 가능성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구전설화나 민담 같은 것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와전되거나 살이 덧붙고, 예상하지 못한 캐릭터들이 튀어나오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유동적으로 흘러가는 형태로, 항상 애매한 상태에 있으면서 계속 변화하는 이야기의 속성이 매력적이고, 폭발력 있게 느껴져요.”(김아영)

6인의 아티스트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샤넬과 프리즈의 ‘나우 & 넥스트’ 비디오 시리즈 역시 뚜렷한 목표를 겨냥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대와 관심사를 관통하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모여 비전과 가치를 나눈다는 느슨한 기대만 존재할 뿐. 중요한 것은 낯선 이야기 그 자체다. 아티스트가 예술을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면 샤넬은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일부가 되라”는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의 바람을 이어간다. 샤넬이 지난해 리움 미술관과 함께 처음 선보인 중장기 퍼블릭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 역시 올해도 펼쳐진다. 심포지엄, 필름 스크리닝, 리딩 세미나 등을 통해 예술 너머의 세계에 대한 방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첫해에 철학자, 사회학자, 영장류학자, 건축가, 작가, 큐레이터를 한데 모아 기후 위기와 젠더 이슈를 논했던 샤넬은 오는 11월에도 ‘젠더와 다양성’을 주제로 서울에서 이야기판을 벌인다.

아트 토크에서 “밖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나만의 고유성을 지키려 한다”는 김아영 작가의 말, 부산에서 처음 상경한 날 서울역에서 ‘묻지 마 폭행’을 당한 후 그때부터 서울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기묘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도시”로 여기게 됐다는 임영주 작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청중은 서로 달랐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아트를 어떻게 감상하면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던 한 여성은 “본인의 경험을 대입해보는 것에서 시작하라”는 임영주 작가의 귀띔으로 어떤 변화를 겪게 됐을까? 6인의 예술가는 서로에게서 어떤 새로운 영감을 채집했을까? 샤넬과 프리즈가 2024년 가을, 서울에서 펼친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파동을 일으킬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아영 작가가 지난해 <보그>에 건넨 말처럼 뭔가를 상상하는 데서 변화는 반드시 피어난다.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COURTESY OF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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