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풍경을 만드는 예술가들, 예술의 소리를 찾아서
2024 부산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가 소리에 주목했다. 덕분에 예술계의 캘린더를 따라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바쁘게 탐하던 눈이 잠시 휴식을 만끽한다. 개막에 앞서 공식 홈페이지에 베라 메이·필립 피로트 공동 감독과 아티스트 78인의 사운드 플레이리스트를 업로드한 부산비엔날레의 주제는 ‘어둠에서 보기(Seeing in the Dark)’. 정부와 거대 자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평등한 공동체를 표상하는 ‘해적 유토피아’와 불교의 깨달음에서 착안해 어둠 속에서도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보그>는 참여 작가 중 소리와 빛에서 안식을 찾은 차지량과 경계인의 위치에서 비롯된 경험과 사유를 조각, 입체, 설치, 영상, 사운드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표현하는 최대진을 초대했다. 소리에 대한 광주비엔날레의 몰입도는 노골적이다. 소리와 공간의 관계에서 피어난 예술인 판소리의 정신을 이어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광주비엔날레에는 30개국 72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다. 그중 소리의 인지적·사회적 작용을 탐구해온 김영은과 비음악적인 잡음을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시키는 전형산이 <보그> 카메라 앞에 섰다. 끝없이 위협받는 도시와 사회,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내는 소리가 크기와 위력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순수한 공명을 일으키길 소망한다.
무한한 세계, 김영은
피아노 연주가 공연장을 울리고 고래의 노래가 바다를 메운다.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말하지만 말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지구는 무수히 많은 소리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듣고 기억하며 전승되는 소리는 일부에 국한된다. 학창 시절 조각을 다루다 재료의 한계를 체감한 김영은은 되레 불명확하고 비물질적인 동시에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비지시적 성질을 지닌 소리에 매료돼 작업을 이어왔다. 미술을 시작하기 전 유년 시절에 바이올린을 배운 경험이 소리를 한층 가깝게 느끼게 했다. 그의 작업은 소리를 매개로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데, 작품의 중심에는 ‘소리라는 매체가 인지적, 사회·역사적으로 어떻게 작용해왔는가?’를 묻고 있다. “특정 지역, 시대에만 통용된 소리에 대한 궁금증부터 누군가의 음악적 취향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데 개인의 소명과 사회적 영향 중 무엇이 더 크게 작용하는지 궁금했어요. 그 질문의 근원을 찾아나가자면 ‘나는 왜 이런 소리를 좋아할까?’라는 물음이 자리합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사회·문화·역사적으로 차근히 따라가봤어요.”
제17회 송은미술대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며 2022년 송은에서 연 개인전 <소리의 틀>에서 선보인 ‘밝은 소리 A’도 이런 궤를 같이한다. 작품은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현대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이 되는 440Hz 국제표준음고 A가 서구식 피아노를 통해 한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설명한 영상이다. 작가는 역사를 넘어 서양의 기본음이 유입되면서 한국 전통음악의 감각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사회·경제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인문학적으로 파고든다. 함께 선보였던 ‘청음훈련’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음을 듣고 그 음높이를 맞히는 훈련에 주목한 작품으로 서양 음악교육의 일환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사훈련으로 변질된 상황을 재구성했다. 당시 훈련은 피아노가 아니라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어떤 종류의 비행기가 날고 있는지 알아내는 훈련을 통해 전투 효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녹아 있었다. 15분 분량의 작품은 실제 훈련에 참여한 학생, 군인들이 쓴 악보, 인터뷰 자료와 논문, 녹음 기록물 등을 기반으로 완성되었는데, 관객은 실제 청음 훈련에 임하듯 여러 종류의 항공기와 잠수함 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기반으로 한 역사의 재현이다. 반면 <소리의 틀>을 통해 선보였으며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다시 공개하는 작품 ‘오선보 이야기’는 이질적인 문화의 유입이 교차하는 가운데 전통의 소실과 변형이 빈번했던 한국의 근대화 시기에 만들어진 악보 ‘조선구악 영산회상’을 살핀다. 악보는 조선정악전습소 교사였던 김인식이 1914년 ‘영산회상’의 양금 악보를 오선보로 역보한 것으로 한국인에 의해 서양 기보법으로 역보된 최초의 악보로 알려져 있다. 작품은 전통음악 연주자, 작곡가, 연구자와의 인터뷰를 주축 삼아 이들의 다양한 추론과 과거의 기록, 일상적인 영상 푸티지를 재구성해 악보에서 탈각되거나 변형된 우리 소리와 정서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오선보에 담을 수 없는 한국적 주법과 음향, 변형된 부분을 살피며 오늘날의 전통음악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작품이다.
1857년 음파 기록 장치 포노토그래프가 발명된 지 20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청음훈련’ ‘오선보 이야기’ 등을 비롯해 몇몇 작품에서 소리의 역사를 파고든 작가는 자료의 분명한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녹음의 자료, 양, 내용의 한계가 있다 보니 최대한 많은 리서치를 하지만 텍스트를 소리로 구현하는 데 상상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런 한계가 되레 창의성을 자극합니다.” 이런 역사의 여백을 작가는 예술적 재료로 활용한다. 또한 우리가 듣고 녹음, 기록할 수 있는 것 너머의 소리에도 관심을 둔다. “최근에는 이주민만이 갖는 독특한 청취 방식, 디아스포라적 소리 등에 관심이 있어요. 이 또한 지난 몇 년간 미국으로 이주해 생활하면서 주변의 소리를 중심으로 갖게 된 궁금증입니다. 다만 언제든 소리와 청취의 범위는 더 크게 확장될 수 있다고 봐요. 소리를 듣는 주체, 형식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폭넓게 작업하려고요. 관객에게 소리, 청취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요.” 유승현 미술 칼럼니스트
잡음의 의미, 전형산
인간은 감각을 매개로 세상을 인식한다. 반면 높은 자극을 추구하는 도파민 시대에 ‘우리의 감각은 정녕 믿을 만한 것인가?’ 의심도 함께 번진다. 전형산은 꽤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을 해온 작가다. 그는 무한정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을 유예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재인식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매체의 중심에는 소리가 있다. “소리는 어느 시공간에나 존재해요.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고 기억을 완성하죠.” 물체가 뿜어내는 울림, 즉 음향성에 주목하는 그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가득 메운 소리를 관객에게 경험하게 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가 다루는 소리는 비음악적이다. 현학적이고 아름다운 음악, 자연의 소리 대신 잡음 같은 수신음만이 작품에서 흘러나온다. “그 어떤 소리든 상대가 듣기 싫은 소리는 노이즈라 치부되잖아요. 라디오 시그널처럼요. 세상에는 특정 채널과 채널 사이 수많은 노이즈, 사실 시그널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고 봐요. 노이즈 혹은 비음악적 소리가 저처럼 느껴졌어요. 작가로 활동하며 세상에 끊임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던지지만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그저 노이즈일 뿐이니까요. 사실은 작가뿐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죠. 비음악적 소리를 재배치, 구조화해 예술의 소재나 매체로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다시 선보이는 2018년 작품 ‘불신의 유예#3; Contact’도 동일하다. 여러 개의 번쩍이는 안테나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낮은 주파수를 잡아내고, 중앙의 회전하는 원통형 기계장치는 이렇게 무분별하게 채집한 소리를 해체, 재배치하고 전시장을 에워싼 스피커를 통해 쏟아낸다. 기계가 뿜어내는 소리는 다듬어지지 않아 듣기 불편할뿐더러 해석 또한 불가능하다. 관객은 작품 속을 거닐며 불가항력적으로 이 불편한 소리와 부딪히게 되고, 움직임에 따라 각기 다른 진동과 전율을 느낀다. 낯선 소리가 심장을 뒤흔드는 순간이다. 결국 소리의 쓸모와 의미는 청취자의 다양성을 향한 관심, 이해에서 비롯된다.
최근 전형산은 소리를 더 주체적인 매체로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의 귓가를 타고 마음의 파동을 일으켜야만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불완전하지만 개인의 강렬한 의지가 담긴 매체임을 상기한다. 안테나, 스피커를 중심으로 했던 지난 작품 구성을 지나 근래 마이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관객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소리 공이 프레임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는 모습을 관람하는 2021년 작품 ‘균형의 함정#1; 높은-소리, 낮은-소리’에도 같은 생각이 담겼다. 프레임을 따라 오르내리는 소리 공은 개인이 자아내는 소리가 단순 음색, 진동수의 차이를 넘어 각기 다른 사회·문화적 파급력과 지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동시에 소리는 계속 움직이며 타자의 것과 맞물려 결합하고 잊히며 서로 관계를 맺는다. “소리의 이동을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소리가 이동하는 방식과 시간차에 따른 차원을 만들고자 하죠. 소리가 물리적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몇 초의 시간차가 매우 짧은 찰나지만 관객을 다른 시공간으로 여행하게 만든다고 여기거든요.” 작가가 만든 새로운 차원은 관념적으로 인식한 대상, 현실에 크고 작은 틈을 내며 예술적 순간을 틔워낸다. 작품을 통해 더 이상 자신과 타인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지는 소음이 아님을 깨닫는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여정인 셈이다.
우리의 세계는 소리로 가득 차 있고, 청각은 현대인이 가장 회복해야 하는 주체적 감각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생산되고 휘발되는 시대, 소리의 양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SNS 숏폼 사운드가 단적인 예다. 가장 동시대적인 소리지만 인공지능 알고리즘과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개인에게 강압적으로 전달되며 주체적 청각 행위를 빼앗는 매체다. 전형산은 2022년 작품 ‘다크필드’를 통해 SNS 숏폼의 시각적 강요를 넘어 청각적 문제를 되짚기도 했다. 6개 스마트폰 디바이스를 통해 이어지는 인스타그램 릴스 사운드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는데, 관람자는 바닥에 놓인 변조 장치를 조작해 소리를 뒤섞고 해체할 수 있다. 이는 다시 전시장 끝에 놓인 거대한 모노리스 형태의 라이팅 스피커로 송출돼 사운드스케이프로 공간을 울린다. 미디어의 중심축인 이미지를 소리로 전복시킨 작업이다. “진동을 통해 소리를 듣는 행위는 굉장히 아날로그하고도 유일한 방식이에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스피커를 비롯해 진동을 만들어내는 기기가 있어야 하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청각은 원초적이고도 익숙한 감각이라 봐요. 이런 감각기관에 새로운 경험을 부여해 외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시하고 관객이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유승현 미술 칼럼니스트
우연한 음표들이 발생시키는 운명적 파동, 차지량
“대화할 때 우리도 모르게 ‘아아’ ‘음음’ 이런 소리를 내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에 집중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내 주파수에 맞게 발생시키고 흘려보내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죠. 물론 그게 꼭 소리만은 아닐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예술은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홍제동의 오래된 주택에서 마주한 차지량이 눈에 띄게 불규칙적인 속도감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차지량은 스스로를 소개하는 일에 성실하다. 그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치밀하게 정리한 포트폴리오가 등장한다. 한국어로 쓰인 이력만 6페이지에 육박하는 ‘CV’ 카테고리는 개인전, 그룹전, 퍼포먼스, 레지던시, 수상, 워크숍, 출간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으며 ‘Works’ 카테고리에 업로드된 작품명을 하나하나 클릭하면 사진 혹은 영상, 친절한 설명으로 연결된다. 유튜브 채널도 있다. 여기에서는 차지량이 만든 영상 작품과 인터뷰, 사운드트랙과 뮤직비디오를 방해 없이 연속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몽환적인 색감이 눈에 띄는 최근 영상 작품을 지나 그가 예술가로서 에너지를 분출하기 시작한 10여 년 전의 기록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번 <보그> 촬영에서 만난 사람과는 사뭇 다른 에너지와 파장을 내뿜는 차지량을 맞닥뜨렸다. “한국 예술계와 공공기관이 갖고 있는 부조리와 권력관계, 착취 구조, 성별에 따른 불균형 등에 관해서 예술을 통해 뭔가 이야기하면 바꿀 수 있다고 여기던 때였어요. 돌이켜보면 저의 운동성이 굉장히 강한 시기였죠.” 그 시절 그는 ‘일시적 기업’(2011)이라는 사회참여적 프로젝트로 기업의 억압적인 행동 강령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항의 물총을 쏘게 했고, 동시대 주거 정책에 관여한 적 없는 젊은 세대를 이끌고 철새처럼 이동하며 새로운 주거 공간을 점유하는 ‘New Home’(2012)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했다. ‘시스템과 개인’이라는 주제를 끌어안고 소리뿐 아니라 모든 에너지를 닥치는 대로 발산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세상을 느낀 차지량은 2012 부산비엔날레를 기점으로 그해 연말 한국을 떠났다.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베를린에서의 레지던시가 거의 끝나갈 때쯤 불시에 떠오른 문장이다. 베를린과 몬트리올 등에서 떠나는 삶을 시도한 7년간의 휴대폰 기록물을 모아 꾸린 제19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차지량은 그 문장을 전시명으로 내세웠다. 비슷한 시기 이제까지 경험한 시공간의 기억을 음악, 이미지, 목소리로 관객에게 전달한 퍼포먼스 ‘BGM’도 출현했다. ‘New Home’ 영상에 넣기 위해 직접 컴퓨터로 만들었던 음악부터 베를린에서 작업한 ‘GM’까지 이제껏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작업한 곡이 배경을 이뤘다. 소리를 그의 작업 전면에 앞세운 건 그때부터다. “확실히 2017년쯤 찾아온 안면 마비의 영향이 컸어요. 화법을 바꿔야 제가 살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소리, 음악, 직접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다른 방식을 살피기 시작했죠.”
레지던시를 할 때 우연히 손에 들어온 1980년대 클래식 기타, 그리고 지난해 이사 온 집에 영원처럼 자리 잡고 있던 피아노는 꼭 필요한 시점에 운명적으로 나타난 친구들. 어느새 소리가 잡힌 기타와 1년간 “손으로 걷는 기분으로” 독학한 피아노는 이제 그와 한 몸을 공유한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음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협화음이든 뭐든 그냥 들리는 대로 치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그 안에 담기는 레이어가 있더라고요. 정말 ‘나’답게 악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과 집에서 펼치는 모임인 ‘Living Room’(2023~)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며 차지량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가 올해 공개하는 것들은 앞으로 제 삶의 방향성을 담고 있는 것들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가 항상 작품 안으로 타인을 끌어들인다는 사실이다. 2008년 선보인 첫 개인전 <이동을 위한 회화>에서 귀여운 소포 로봇으로 관객에게 안부를 물을 때부터 공동체와 커뮤니티 속에서 포근하게 음계를 쌓아가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차지량의 예술에서는 한결같은 온기가 감지된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목적의식이 그렇게 예술에 있지 않아요. 오히려 사람에 있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커뮤니티와 내 옆에 있는 사람, 항상 사람이 제일 중요해요.” 그 마음을 안고 차지량이 2024 부산비엔날레로 향했다. 12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비엔날레에서 그가 선보이는 전시는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몇 년에 걸친 내면의 기록이 담긴 텍스트가 빼곡하게 붙어 있는 외벽, 그리고 내벽 안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파장이 겹쳐지며 다초점의 새로운 시청각적 현장을 구현할 거예요. 안팎의 경계를 무화(無化)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파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과연 그곳은 어떤 시공간일까요?”
순간에 몰두하며 솔직하게 발생시킨 음률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차지량은 안전하고 온전하다. 억지스러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낯선 첫 음을 낼 때도, 삶의 기로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릴 때도, 그는 그저 상황에 충실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중이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새로운 시공간에 먼저 진입한 그를 뒤따르는 반가운 타인이 있으니까. 결혼도, 첫 보금자리도, 전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지량을 찾아왔다. “요즘 제가 하는 예술도 즉흥연주라고 개념화하고 싶지 않아요. 자연스러운 발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명명하고, 구분하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언제나 훨씬 더 중요하거든요.”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소리라는 원초적 노스탤지어, 최대진
드로잉, 설치, 사운드,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최대진은 매우 사적이고 미시적인 역사, 메시지를 다루는 작가다. 작품에 유독 전쟁과 폭력 이미지가 자주 등장해 거대한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듯 비치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최대진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 이미지에서 길어 올린 자신의 오랜 이야기, 시간을 작품에 담고 있다. “예전에 어느 큐레이터가 ‘작가님이 생각하는 SF는 무엇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저는 ‘과거’라 답했습니다. 과거는 누군가의 주관에 따라 매 순간 바뀌거든요. 과거의 기록이 사실일지언정 진실이 될 수 없고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끄집어내 소설을 쓸 수도 있죠. 그야말로 공상 과학이에요. 그래서 구도자처럼 하나의 형태, 형식을 파고들기보다 과거와 살아가는 현재, 앞으로의 미래를 엮는 작업에 관심이 깊어요. 이것이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이유기도 합니다. 특히 사운드 아트는 소리가 지닌 동시성이 과거와 미래를 엮어내는 힘이 커서 매력적이죠.”
2024 부산비엔날레에서 그가 선보이는 사운드스케이프 작품 ‘김추자 메들리’도 그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기인한다. 1960~1970년대를 주름잡은 가수 김추자의 노래가 이번 작품의 큰 축이다. 어린 시절 작가가 즐겨 듣던 김추자 노래 제목을 나열하고 그 옆에 호응하는 텍스트를 덧붙여 한 편의 시와 같은 형태로 완성한 2015년 동명의 작품을 더 강하게 밀어붙여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곁들인 형태로 완성했다. 당시 작품은 김추자의 노래 8곡을 늘려 3~4시간 분량으로 완성한 사운드를 함께 들려주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윤재민 사운드 작가와 협업을 통해 24시간, 만 하루의 러닝타임으로 완성했다. 여기에 김성구 그래픽 디자이너가 함께해 김추자 노래 제목과 텍스트를 곁들인 비치 타월을 준비했다. 관객들이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물든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에 비치 타월을 깔고 앉거나 누워 미니멀하고도 사이키델릭하게 편집된 음악을 듣는 참여형 작품이다. “김추자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활동하던 1960~197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어둡던 시기예요.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사람들은 자유라는 욕망을 다른 형태로 승화시켰어요. 이번 부산비엔날레 주제 ‘어둠에서 보기’를 관객들과 더 동시대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극단의 자본주의가 팽배한 지금도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잖아요.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야생적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인공적인 감각을 걷어내고 인간이 지닌 본연의 원초적인 감흥을 공유하는 거죠.”
폭넓게 장르를 오가는 그가 사운드 아트를 유독 애정하며 설치 작업과 아울러 선보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도의 훈련을 통해 다듬어지는 시각과 달리, 즉각적인 반응의 청각 자극을 통해 잊혔던 말초신경을 건드리고 싶기 때문. 어떤 정보나 지식, 역사적 맥락을 통해 예술을 분석적으로 전달하는 대신, 개인의 감각만으로 작품에 흠뻑 빠져드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 “물론 작가인 저는 아이디어를 명확하게 텍스트로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그러나 관객에게 예술은 직접적이고 압도적으로 말을 걸 때 우아하다고 느껴요.” 2016년 처음 선보인 작품 ‘소돔의 120일 동안 일어난 일’도 매한가지다. ‘TATATA…’ 라는 메시지가 가벽을 가득 메운 작품은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영화를 만든 사실주의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했다. 가벽 전면 빼곡한 ‘TATATA…’는 영화에서 발췌한 기관총 소리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치환한 것으로 소리가 지닌 비극을 압도적인 형태의 텍스트 월로 감추어냈다. 가벽의 뒷면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자행된 충북 영동의 철교 부근 숲을 촬영한 흑백 이미지로 채웠다. 유럽 전쟁의 역사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병치시켜 시대와 개인, 혁명과 폭압, 예술과 정치가 대치되는 형태다. 반면 이따금 ‘소돔의 120일 동안 일어난 일’과 짝을 이뤄 설치되는 비디오 퍼포먼스 ‘볼레로’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특정 시공간에서 어떻게 대립하는가를 묻기 위해, 반복적인 리듬으로 감정을 고양시키는 ‘볼레로’ 음악적 구조를 차용했다. ‘볼레로’ 선율에 맞춰 점점 격렬하게 진행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에 길든 개인의 청각을 반추한다.
청각적 경험과 기억은 그 어떤 것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최대진은 우리에게 시각적 자극에서 한 걸음 멀어져 귓가와 마음에 스치는 소리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예술은 자기 결핍에서 시작해요. 텅 빈 시야와 내면에도 급진과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급변하는 트렌드, 자극적인 이미지에서 멀어져 오늘의 소리를 감각해보길. 일상의 예술적 순간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유승현 미술 칼럼니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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