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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렐 “오늘은 니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2024.09.23

퍼렐 “오늘은 니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수동에서 만난 퍼렐과 니고.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JUST PHRIENDS 니고가 있는 곳엔 퍼렐이 있다. 서울에서 숨 쉴 틈조차 없는 며칠을 보낸 퍼렐이 휴먼 메이드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을 찾았다.

“오늘은 니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소 개인적인 질문을 받은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의 답변이었다. 민감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발동된 방어기제는 아니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친구 니고(Nigo)에게 쏠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 대답이었다. 패션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퍼렐이 이토록 니고를 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니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퍼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니고를 보며 겸손을 배웠고, 니고의 스타일을 보며 스트리트 패션과 사랑에 빠졌다. 퍼렐은 루이 비통의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지금도 니고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스승’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방법이자 20년 지기에게 보내는 지지의 메시지다.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도 한 니고가 2010년 론칭한 브랜드, 휴먼 메이드(Human Made)의 국내 첫 오프라인 매장이 지난 9월 7일 성수동에 오픈했다. 2024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내한한 퍼렐의 캘린더는 온갖 홍보 활동으로 빽빽하게 차 있었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니고에게 축하를 건네기 위해 휴먼 메이드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을 찾았다. 성수동에서 만난 퍼렐과 니고는 먼저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그들이 이끌고 온 팀원들 역시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함께 서로의 옷과 신발을 칭찬했다. 퍼렐은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휴먼 메이드의 워크 재킷과 스웨트셔츠를 몇 벌 입어본 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로고가 크게 적힌 옷을 입고,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니고라는 듯이. <보그>가 퍼렐에게 니고를 묻고, 니고에게 퍼렐을 물었다.

WELCOME TO THE FUTURE 날것 그대로의 외벽과 달리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매장 내부.
WELCOME TO THE FUTURE 날것 그대로의 외벽과 달리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매장 내부.

지난해 12월 한국을 찾은 니고와 달리, 퍼렐은 무려 5년 만의 방한이다. 지금까지 서울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

퍼렐 ‘서울’이라는 이름부터 흥미롭다. 도시 자체에서 ‘소울’이 느껴진다. 단지 발음이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서울은 대단한 문화를 갖고 있는 도시니까. 도쿄에서부터 시작된 아시아 문화를 향한 내 사랑은 홍콩, 중국으로 확장됐다. 이제 서울 차례다. 서울에 머문 며칠간 엄청난 에너지를 흡수했다.

니고 2000년대 도쿄가 떠오른다. 도시 자체에서 굉장한 파워가 느껴진다.

한국, 그것도 성수동에 매장을 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니고 지난해 12월, 겐조 행사를 위해 오랜만에 서울을 방문했다. 힘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며, ‘왜 서울에 아직도 내 매장이 없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곳에 매장을 오픈할 계획이었지만, 성수동을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휴먼 메이드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의 인테리어는 어디서 영감을 받았으며, 다른 매장과는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니고 대부분의 휴먼 메이드 매장은 낡은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 역시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컨셉 역시 다른 오프라인 매장과 비슷하다. 오늘 내부를 둘러보며,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이 일본의 다른 스토어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휴먼 메이드의 매장을 수차례 방문해본 퍼렐이 바라본 오프라인 스토어 서울은?

퍼렐 형제(퍼렐은 인터뷰 내내 니고를 ‘Brother’라고 불렀다) 같은 니고와 함께할 수 있어 즐거울 뿐이다. 내가 니고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거쳐온 모든 일이 떠올랐다. 가끔은 이런 상황이 꿈만 같다. 조금 전에 사진 촬영을 할 때도 니고에게 “우리 지금 서울에 와 있어!”라고 말했다.

2003년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Billionaire Boys Club)을 함께 론칭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지금의 스트리트 패션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니고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모두가 스트리트 웨어를 즐긴다. 스트리트 브랜드만의 방식이던 ‘콜라보레이션’은 이제 모든 패션 브랜드의 방식이 되지 않았나. 일단은 현 상황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로서는 그다음을 고민해야 할 때다.

퍼렐 스트리트 웨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내가 그 신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은 대부분 거리의 서브컬처에서 탄생한다. 서브컬처는 좋은 취향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1980년대 펑크 음악, 이제 대중문화의 거대한 부분이 된 힙합 음악 역시 원래는 ‘거리의 사람들’이 향유하던 문화 아닌가.

본래 하위문화였던 것이 대중문화의 일부로 편입되며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나?

퍼렐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문화를 멋없는 사람이 즐기는 걸 보며 짜증 날 때도 있다.(웃음) ‘너만은 아니길 바랐는데’라며 속으로 소리 지를 때도 있다. 물론 누군가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둘의 관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2000년대 초반, 주얼리 브랜드 제이콥앤코(Jacob&Co.)의 창립자 제이콥 아라보(Jacob Arabo)가 첫 만남을 주선했다.

니고 제이콥의 소개로 퍼렐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 당시 힙합이나 R&B를 하던 아티스트는 하나같이 ‘XXL’ 사이즈의 바지와 농구 저지를 입었는데, 퍼렐 혼자 타이트한 핏의 데님을 입는 걸 보며 그의 스타일에 관심이 생겼다. 다양한 문화를 이리저리 섞고 있는 나를 보며 퍼렐 역시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퍼렐이 도쿄에 있던 내 스튜디오를 방문한 뒤, 버지니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한 적이 있다. 퍼렐의 옷장을 열었는데, 반 정도는 나도 갖고 있는 똑같은 아이템이었다.

퍼렐 니고를 만나자마자 그와 같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느꼈다. 내가 니고의 개인 수집품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설명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니고의 수집품은 그의 모든 사상과 본성을 집약한 결과물이다. 자신의 상상을 구체화하고,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것도 모자라 체계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니고뿐이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땐 우리의 인연이 20년 넘게 이어질 줄 몰랐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생각만큼은 변함없다. 니고는 패션계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니고’는 일본어로 ‘두 번째’ 또는 ‘2인자’를 뜻한다.

퍼렐 이 세상에 자신의 활동명을 ‘2인자’로 짓는 사람이 또 있을까? 겸손한 애티튜드 역시 니고가 ‘역대 최고’인 이유다. 많은 사람이 내 시그니처로 알고 있는,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 하는 인사 역시 니고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니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어렸다.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뽐내기 바빴다. 내가 우러러보던 대부분의 아티스트 역시 돈이나 비싼 차를 자랑하기 바빴다. 니고는 그들과 달랐다. 영어를 할 줄 알지만, 늘 침묵을 지켰다. 당시 나와 니고는 둘 다 롤스로이스를 몰았다. 나는 음악을 크게 틀고 다녔지만, 니고는 그러지 않았다. 단지 차를 조용히 어딘가에 주차해둘 뿐. 그런 니고의 차분함과 침묵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주변 인물들에게 늘 감사를 표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퍼렐 전부 니고를 보고 배운 것이다. 비싼 차, 비싼 보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걸 꼭 남에게 자랑할 필요는 없다. 물건이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니고를 만난 뒤, 에너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니고 덕에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2000년대 초반에도 그는 이미 ‘멋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나비처럼 차분했다고 해야 할까? 다시 한번 선언하겠다. 나에게는 니고가 역대 최고다.

20년 넘도록 그를 지켜본 입장에서, 당신이 가장 부럽다고 여기는 니고의 특성은 무엇인가?

퍼렐 아마 니고는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체계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는 수백, 수천 가지 개인 수집품을 완벽에 가깝게 분류해놨다. 기억력 또한 엄청나다.

이번에는 니고의 차례다. 퍼렐을 보며 부럽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나?

니고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친구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면, 언젠가는 그를 원망하게 되니까. 만날 때마다 새로운 주얼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며 ‘역시 센스가 좋군’이라는 생각은 자주 한다. 돈이 많은 사람은 수두룩하지만, 취향과 센스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

퍼렐, 당신보다 니고의 옷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니고의 디자인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뭘까?

퍼렐 사고방식. 니고가 궁리하는 모든 것이 그의 디자인에 녹아 있다. 휴먼 메이드의 여러 슬로건 중 하나인 ‘미래지향적인 청소년을 위한 장비(Gears for Futuristic Teenagers)’가 니고의 디자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다.

I’VE GOT YOUR BACK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퍼렐과 니고는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친구다.

슬로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니고의 디자인에는 언제나 소년 같은 순박함과 장난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비결은?

니고 나에겐 일이 곧 놀이고, 놀이가 곧 일이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즐거운 발상이 떠오르는 것 같다.

최근에는 베르디와 협업하는 등, 끊임없이 젊은 아티스트와 교류하고 있다. 니고가 지금 눈여겨보는 젊은 아티스트는?

니고 결국은 젊은 아티스트가 다음 세대에게 거리의 문화를 전파해야 한다. 베르디와 같은 아티스트가 없어 아쉬울 뿐이다. 다양한 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예술가는 많지만, ‘메이저’를 꿈꾸는 사람은 줄었다. 이제 누구나 소셜 미디어로 자신을 홍보하고, 교류할 수 있는 시대니까. ‘다음 세대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다.

니고, 당신은 퍼렐이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의 디자인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니고 퍼렐은 늘 내 상상의 범주 밖에 있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내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걸 만든다면, 퍼렐의 반경은 우주다.

올 초 미국 <보그>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나는 엔지니어고, 퍼렐은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니고 같은 맥락이다. 퍼렐의 음악과 디자인은 언제나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퍼렐 니고가 그런 말을 한 줄 몰랐다.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겠다.

퍼렐은 자신을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칭하고, 니고 역시 예전부터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정의와 책무가 궁금하다.

퍼렐 간단하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 나는 자신을 ‘소비자의 디자이너’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파악하고, 그걸 만들어낼 뿐이다.

니고 브랜드에서 비즈니스 외의 것을 전부 담당하는 사람. 디자인, 오프라인 매장 오픈, 비주얼까지 그런 모든 것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몫이다.

명쾌한 정의다. 마지막으로, 최근 주고받은 메시지를 공개해줄 수 있나.

퍼렐 정확히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주로 내가 니고를 귀찮게 하는 입장이다. 겐조의 스웨트셔츠를 보내달라고 여러 번 졸라, 같은 스웨트셔츠를 컬러별로 35벌이나 갖고 있다.

니고 퍼렐이 종종 다양한 아이디어를 메시지로 보내오곤 한다.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뜻으로, 경례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웃음) (VK)

포토그래퍼
THOMAS THOMPSON
에디터
안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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