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박서보 화백의 정신을 담은 루이 비통 컬렉션

2024.09.26

박서보 화백의 정신을 담은 루이 비통 컬렉션

루이 비통이 박서보 화백의 정신을 컬렉션에 담았다. 박서보재단의 박지환 디렉터가 묘법을 닮은 그 과정을 이야기한다.

가을이 오면 농익은 단풍으로 가로수가 붉게 타오를 것이다. 박서보 화백도 일본에서 전시를 마치고 반다이산을 산책하던 중 단풍의 풍경에 감명을 받아 단풍색(Maple Red)을 만들고 작품에 입혔다. 이제 그 단풍색은 작품을 넘어 루이 비통 컬렉션에까지 스며들었다. 루이 비통이 2025 봄/여름 남성복 캡슐 컬렉션 ‘폴(Fall)’을 출시했다.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퍼렐 윌리엄스가 지향하는 댄디함과 우아함에 기반한 컬렉션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보는 박서보재단과의 협업이다. 故 박서보 화백의 묘법(Écriture, 에크리튀르)을 바탕으로 한 예술 세계가 루이 비통의 상징적인 가죽 에피(Epi)와 어우러져 새로운 패션을 완성했다. 2022년 아티카퓌신을 발표한 적 있으니 두 번째 협업이다. 화백 생전에 시작한 이 협업은 박서보재단에서 전시 큐레이션과 협업을 담당하는 박지환 디렉터가 함께 참여하고 마무리했다. 그는 원오브제로(1OF0)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이자 박서보 화백의 손자다. 2020년 4월, 피크닉(Piknic)에서 열린 <명상(Mindfulness)> 전시에서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설치 작업한 후 브랜드 및 갤러리와 협업해왔다.

영국 LCF(London College of Fashion)에서 남성복을 전공했다. 박서보 화백의 여타 전시와 함께한 경험이 다수지만, 특히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에서 남다른 역할을 했을 듯하다.

2022년 아티카퓌신 백에 이어 드디어 박서보 남성복 컬렉션이 출시됐다. 패션을 전공했기에 루이 비통 본사 디자이너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즐거웠지만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디자이너들과의 소통은 주로 왓츠앱과 줌 미팅으로 이뤄졌고,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수많은 샘플을 교환했다. 처음에는 남성복 컬렉션에 사용할 가방 디자인을 목표로 했지만, 점차 의류와 액세서리까지 확장됐다. 할아버지께서 최종 결과물을 보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텐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다.

이번 컬렉션의 가치는 무엇일까?

할아버지는 항상 예술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셨고, 구순이 넘으셔서도 젊은 세대와 교류를 멈추지 않으셨기에 그런 정신이 곳곳에 스며들었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묘법 작품을 그대로 프린트하지 않았다. 예술을 단순히 복제하지 않고 재해석과 재창조를 거친 것이다. 컬러 배합과 디자인 요소가 박서보 작품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패션의 영역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의 특징으로 행위의 무목적성, 수행에 가까운 반복, 그 행위와 물성과 정신의 합일을 말씀하셨다. 비워내는 과정이라고도 하셨는데, 그런 화백의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담겼는가?

할아버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는 철학이 있으셨기에, 결과보다 그 안에 담긴 행위와 정신을 중시하셨다. 작품은 비워내는 과정의 산물에 불과하다고도 하셨다. 반면 패션은 상업적 영역이기 때문에 결과물이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루이 비통 프로젝트에서는 서로의 철학을 존중하는 자세, 디자인부터 개발까지 수없이 반복된 샘플 작업에서 할아버지의 반복과 수행 정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2022년 함께 작업한 아티카퓌신은 박서보 화백 고유의 단풍색을 구현했다. 이 색은 일본에서 전시를 마치고 반다이산을 산책하다 타오르는 단풍을 보고 영감을 얻으셨다. 이번에는 단풍색, 제주 애월 바다와 하늘이 닿은 접점에서 발현한 공기 색(Air Blue), 진달래꽃이 지고 나서 새로 올라온 푸른 녹음에서 영감을 얻은 풀잎 색(Neon Green), 어머니가 밥을 짓던 아궁이의 벽에 세월과 함께 쌓인 그을음에서 발견한 아궁이 색(Agungi Black)이 컬렉션에 녹아 있다.

이번 컬렉션에선 특히 색상에 집중했다. 박서보 화백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투톤의 콤비 색상을 루이 비통 에피 가죽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다. 본사에 흰색 에피 가죽 샘플을 요청해 박서보재단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물감을 발라 샘플 컬러 칩 30여 개를 만들었다. 그간 루이 비통에서 잘 보지 못한 색감 조합을 시도하면서 브랜드와 작품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재미있게도 최종 선택된 네 가지 색상은 할아버지의 대표 색상이다. 루이 비통 측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을 텐데도 결국 그 색이 컬렉션에 함께했다.

작품을 컬렉션으로 현실화하는 데 또 다른 과제는?

박서보 화백의 묘법은 단순한 스트라이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산맥과 골짜기, 밭처럼 입체적인 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텍스처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구현할지 고민과 연구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루이 비통에서 여러 소재를 활용해 묘법의 독특한 질감을 멋지게 재현해냈다. 모델이 컬렉션을 입고 촬영하는 모습을 볼 때 압도적이었고, 내가 상상한 이미지가 현실에 그대로 구현되니 정말 기뻤다. 색감과 패턴의 비례, 단추나 지퍼 같은 세부 디테일까지 모두 완벽했다. 대중도 이런 섬세한 부분에 매혹될 거라 믿는다.

박서보 화백은 루이 비통 아티카퓌신 작업을 두고 “예술이 일상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씀하셨다. 미술과 브랜드의 협업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예술이 특별하지 않고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미길 원하셨다. 그래서 브랜드 협업에도 항상 열린 마음이셨다. 미술은 브랜드 가치를 한층 높여주고, 반대로 브랜드는 미술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즐길 수 있게 한다. 서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쇼핑을 자주 다녔다고 들었다.

구순을 넘기셔서도 직접 옷을 사러 가셨다. 물론 내가 할아버지 스타일을 너무 잘 알기에 퍼스널 쇼퍼로 동행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명품에 깃든 장인 정신을 높이 평가하셨던 기억이 난다. 특히 루이 비통 트렁크는 오래 소장하셨다.

이번 컬렉션 외에 할아버지와 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23년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선보인 박서보 묘법 영상이 있다. 심장박동 소리 같은 음향을 배경으로 단풍색 묘법 작품이 확대되며 산과 골짜기, 작은 우주가 확장되는 느낌을 연출했다. 박서보의 우주를 경험해보자는 컨셉이었다. 할아버지는 뉴욕 전시를 직접 보진 못하셨지만, 같은 해 가을 부산에서 열린 전시에서 연보랏빛 작품 영상을 나와 함께 관람하셨다. 그 후 한 달 만에 돌아가셔서 그날의 기억은 더욱 특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박서보 화백과 여러 협업을 해오면서 꼭 지키려 한 원칙이 있는가?

할아버지 작품으로 작업을 할 때마다 두렵고 떨린다. 잘못하면 할아버지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싶어서다. 피크닉 전시에서 할아버지 작품을 바닥에 놓았을 때도 도전 차원이었지만,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루이 비통 협업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기존 협업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컸다. 하지만 그런 압박감과 책임감이 나아갈 힘을 준다. 할아버지의 예술적 정체성과 명성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손자로서 할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할아버지는 내게 “문화 건달이 되어도 좋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라고 하셨다. 그 말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창의성을 펼치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내 그림과 디자인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이우정
    SPONSORED BY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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