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미나 카말리가 말하는 끌로에 걸
새 시대를 위한 여성성과 파워 드레싱, 그리고 셰미나 카말리의 끌로에.
여름의 파리 역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날이 서 있다. 도로를 마비시키는 교통 체증으로 사람들은 으르렁거리고, 주요 간선도로는 전부 폐쇄되었다. 그러나 아브뉴 페르시에에 있는 끌로에(Chloé) 본사는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셰미나 카말리(Chemena Kamali)가 사무실 문을 열자 긴 곡선 형태의 소파와 꽃병에 꽂힌 분홍색 작약, 찻잔이 놓인 은쟁반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사진이 질서 정연하게 붙어 있다. 칼 라거펠트가 끌로에에서 일하던 시절 디자인한 수영복, 믹 재거, 브라 스트랩 모양대로 태닝된 피부, 삐죽 내민 입술과 담배 등 다양하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을 지닌 42세의 카말리는 끌로에의 하이 웨이스트 와이드 진과 라테 컬러 블라우스 차림으로 <보그>를 맞이했다.
움푹 꺼진 눈과 보티첼리 그림 속 물결치는 머리칼을 가진 카말리는 머그잔과 날씨, 그날 오후에 매장을 둘러보는 계획을 재잘거렸다. 이야기하는 동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를 닮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지곤 했다.
지난해 10월, 카말리는 가브리엘라 허스트(Gabriela Hearst)에 이어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그녀와 브랜드에 대해 잘 아는 이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로써 그녀는 끌로에에 세 번째로 재입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20대 초 피비 파일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에 인턴으로 일했을 때다. 현재 패션계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은 다소 남성 편향적이지만, 여자에 의한 그리고 여자를 위한 패션 브랜드 끌로에가 여성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들이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카말리는 자신이 관심을 받거나 나서길 좋아하는 타입의 리더가 아니라고 피력하는 와중에도, 자기 스타일이 하우스의 이미지나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통적인 여성성과 자유로운 쿨함이 대비를 이루며 공존하는 스타일 말이다. 그녀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다면 끌로에에서 하게 될 작업과 얼마나 다를지 물었다(가브리엘라 허스트는 끌로에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자기 브랜드를 계속 운영했다). 카말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솔직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디자인하는 편이라서요. 여성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표현할 뿐이죠.”
‘여성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아주 명료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지난 2월 선보인 카말리의 첫 런웨이 쇼는 최근 들어 패션계에서 가장 따뜻한 환영을 받은 쇼 중 하나다. 하늘거리고 비치는 레이스 블라우스, 잔물결을 이루는 레이어링 등 모든 의상은 부드럽고 매력적인 원단으로 표현되었고, 싸이하이 부츠와 금속 벨트, 가죽과 비닐 케이프처럼 강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이템이 포인트 역할을 했다. 파워 드레싱조차도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여성스러웠다. 모델들은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노래 ‘클라우드버스팅(Cloudbusting)’에 맞춰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옷을 나풀거리며 리드미컬하게 런웨이를 걸었다. 카말리의 친구이자 밴드 피닉스(Phoenix)의 멤버 덱 다르시(Deck D’Arcy)가 카말리의 남편 콘스탄틴 웨럼(Konstantin Wehrum)과 함께 배경음악 선정을 도왔다. 웨럼은 팬데믹 기간에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백신 발표에 참여한 경영 컨설턴트이며, 부업으로 끌로에 음악 컨설팅을 맡고 있다.
쇼를 보는 관객에게 그 에너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지만, 리야 케베데, 시에나 밀러, 팻 클리블랜드, 키에넌 시프카 등 프런트 로에 앉은 게스트 사진과 함께 입소문도 한몫했다. 그들 모두 같은 끌로에 웨지 슈즈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천재적인 마케팅 아이디어로 평가받는 동시에 새로운 잇 슈즈의 탄생을 예고했다. 카말리는 전혀 의도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말이다. 쇼 바로 다음 날, 즉각적인 유행의 측정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고 거래 사이트 더 리얼리얼(The RealReal)에서 끌로에 검색량은 37% 증가했고, 그다음 달에는 끌로에 제품 판매량이 130% 늘었다.
이 즐거운 비명의 원인은 정확히 무엇일까? “패션은 언제나 매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분야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지, 우리가 다시 잇 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군요.” 밀러가 웃으며 말했다. 과거 스텔라 맥카트니와 피비 파일로를 필두로 한 디자이너들에 의해 탄생한 일명 ‘끌로에 걸’은 무심한 보헤미안풍 의상만큼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느긋한 (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태도가 특징이다. 스스로 끌로에 걸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과 친해지거나 그들처럼 입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데뷔 무대에서 정치적인 주장을 내세울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그 압박감은 여성 디자이너일 경우 더 심하게 느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선거가 있기 약 두 달 전인 2016년 9월,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모델을 런웨이에 올린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이 부상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출마가 희망의 등불이 된 올가을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꽤 많이 등장할 것이다. 실제로 카말리는 이미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 상태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이 두 차례나 끌로에 의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코코넛 브라운’이라는 다소 과감한 이름의 수트였고, 다른 한 벌은 대선 후보직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마지막 날 입었던 네이비 수트다.
해당 의상은 슬로건이나 로고 없이 맞춤 제작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과 결단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내게 끌로에를 입은 여성은 강력한 여성성과 자신감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전당대회 직후 카말리가 설명했다. “끌로에를 입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니에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거죠.”
카말리의 아버지 토니(Tony)는 이란에서 성장해 독일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그곳에서 카말리의 어머니 모니카(Monika)를 만났다. 소도시 출신인 모니카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헤어 드레서였다. 카말리의 이름은 1961년 영화 <엘 시드(El Cid)>에서 소피아 로렌이 맡은 캐릭터 히메나(Jimena)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부모님 모두 매우 즉흥적이고 모험을 좋아하세요. 당신 아이들도 넓은 세상을 보길 원하셨죠.” 부부는 뒤셀도르프 근처 도르트문트에 정착해 나중에 옷 가게를 열었다.
수줍음이 많지만 의지가 강한 아이였던 카말리는 부모님을 따라 무역 박람회에 가곤 했다. “카말리는 사람들이 옷을 입어보는 모습을 구경하길 좋아했습니다.” 모니카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왜 사람들이 무언가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매우 궁금해했죠. 그리고 더 예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저만의 강한 의견을 갖고 있었고요.” 현재 독일에서 예술가로 활동 중인 아들 아리안(Arian)을 포함해, 이 가족은 매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카말리가 열한 살 때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로 이주했다. 당시 영어가 어눌했던 카말리와 아리안은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부모님은 아이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여기신 것 같아요.” 카말리가 말했다). 라구나 비치에 정착한 가족은 다른 매장을 열었고, 카말리는 독일 학교 친구들에 비하면 몇 광년이나 앞선 듯한 서부 해안의 조숙한 10대들과 친해졌다. “특히 여자애들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죠.”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 MTV와 10대 매거진의 시대였다. 아리안은 서핑을 시작했고, 그녀는 ‘그 태도와 옷, 음악에 배어 있는 특유의 무심함과 흐트러짐’에 완전히 매료되어 모든 것을 흡수했다. 남는 시간은 해외에서 발행하는 <보그> 화보를 스크랩하는 데 썼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걸 자각했다. “패셔너블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저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은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카말리는 트리어 대학에 입학해 의류 구성과 재단, 재봉을 공부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디자이너로서 자기만의 언어, 미적 취향, 시그니처를 만들려면 그 이상이 필요했어요.” 그녀는 어느 파티에서 다른 학교에 다니던 웨럼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당시에도 꽤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웨럼이 첫인상에 대해 말을 꺼냈다. 카말리는 처음 나눈 대화에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가겠다는 자신의 인생 계획을 털어놓았다. 괜찮은 계획이라고 여긴 그는 함께 가겠다고 했다. “살다 보면 중요한 순간이 있죠.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둘은 그날 밤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은 채 헤어졌지만 몇 년 뒤 다시 만났고, 웨럼이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치는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다.
런던에서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등록하기 전, 카말리는 학사 학위를 받기 위해 인턴십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셰미나 카말리 전설의 일부가 된 에피소드다. “패션을 공부하고 싶은 독일 여자애의 최종 아이콘은 역시 칼 라거펠트였죠.” 샤넬이 칼 라거펠트의 대표적인 성과라고 간주하기 쉽지만, 카말리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가 끌로에에서 한 작업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대학 출신의 인턴 지원서가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그녀는 직접 끌로에 사무실로 찾아갔다. 리셉션 직원이 저지했지만, 카말리는 곧장 독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고 설명하며 기다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시간 후 그녀는 스튜디오 매니저와의 면접 기회를 얻었고, 2주 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젊어서 무서운 게 없었던 거예요. 두려운 줄 몰랐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냥 저질렀습니다.”
카말리는 파리 1구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꽃무늬 벽지, 문이 달린 찬장 안에 간소한 부엌세간이 있고, 샤워기 아래 변기가 있는 아파트였다. 그녀는 당시 끌로에 스튜디오를 거칠고 정신없으며,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들이 가득한 곳으로 기억한다. “그 에너지에 금세 반해버렸습니다.” 그녀는 하루 10시간씩 복사기 앞에 서서 무드보드에 붙일 샬롯 램플링, 로렌 허튼, 제인 버킨, 제리 홀의 사진을 복사하곤 했다. 다른 인턴들은 가장 어린 인턴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 불평했지만, 그녀는 그저 무드보드 이미지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였습니다.” 카말리가 덧붙였다. “꼭 1970년대 실루엣이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그보다는 시대정신에 대한 것이죠.”
인턴십을 끝내고 세인트 마틴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해크니의 허름한 동네에 빅토리안풍 작은 집으로 이사했으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는 긴 시간 동안 잠을 청했다. 카말리가 이제 자신에 대해 막 알아가는 동안, 같은 과 친구 몇몇은 이미 자기 브랜드를 운영하며 재정비의 개념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녀는 통찰력 있고 전설적인 루이스 윌슨(Louise Wilson)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비 내리는 10월의 어느 밤, 술에 취한 어머니가 만든 할로윈 의상 같구나”는 윌슨이 어느 학생에게 한 공개적인 비평 중 하나로, 2014년 그녀의 사망을 애도하는 부고 기사에 인용됐다). 윌슨은 특별히 아끼는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말리를 엄하게 대했고, 그녀가 열심히 습득해온 정교한 기술을 전부 잊으라고 가르쳤다. “교수님은 ‘넌 너무 독일식이야. 넌 맨날 교실에만 있구나. 넌 뭐든 항상 시간에 딱 맞춰서 해’라고 다그치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학교에 있는 널 보고 싶지 않구나, 제발 클럽에라도 좀 가’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카말리는 늘 그렇듯 다음 날도 제시간에 맞춰 수업에 나타났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관례대로 학생 절반이 퇴출당하자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비난은 이제 지도처럼 느껴졌다. “교수님은 저를 완전히 쥐어짜고 싶어 했어요. 자신을 파악하는 잔인한 핵심에 닿을 때까지 말입니다. 제게 그토록 잔인하셨던 건 패션계에 뛰어들 준비를 시키셨던 거예요.” 졸업식에서 카말리는 런던 패션 위크에 쇼를 발표하는 소수의 학생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스무 차례씩 윌슨 교수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모델에 집착했다. 그리고 나중에 윌슨을 다시 찾아가서 쇼 준비로 괴롭혔던 것에 대해 멋쩍게 사과했다. “교수님은 ‘네 비전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대해 절대 사과할 필요 없어.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고려하고 모든 디테일에 집착해야 해. 그게 바로 차이를 만드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죠.”
물론 쉬워 보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오랜 수고의 시간을 수반한다. 느긋한 캘리포니아 서퍼들도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시간을 투자하는 것처럼 말이다. 카말리의 얇고 가벼운 데뷔 컬렉션이 구름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집요하게 자신의 기술을 연마해왔다. 커리어 초기에 알베르타 페레티에서 잠깐 일한 다음 가브리엘레 슈트렐레(Gabriele Strehle)가 론칭한 독일 헤리티지 브랜드 슈트레네세(Strenesse)로 옮겼다. 1990년대 다운타운과 갤러리 오너들의 취향인 깔끔하고 잘 구성된 미니멀리즘 룩으로 명성을 얻은 브랜드다. “셰미나를 처음 만났을 때 집중력과 야망이 느껴졌습니다.” 카말리의 초기 멘토 중 한 명인 슈트렐레가 말했다. “하지만 다양한 변화의 흐름과 아이디어, 비전을 흡수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으려는 한 여자도 보였죠.” 그 후 다시 끌로에로 돌아간 그녀는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지휘 아래 처음으로 시니어 디자이너가 되었다. 2016년 생 로랑에 합류해 안토니 바카렐로와 6년 동안 일하고 나서, 지난해 10월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제안받기 전, 데님 브랜드 프레임(Frame)의 컬버시티 본사에서도 짧게 일했다. 해변에서 보낸 어린 시절 추억 덕분에 로스앤젤레스를 탐험하는 것은 카말리의 오랜 꿈이었지만, 그녀와 웨럼은 예정보다 그곳을 빨리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파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가구 일부는 여전히 미국으로 배송되는 중이었다.
2월 쇼를 앞둔 몇 달 동안 카말리와 그녀의 팀은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우리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세계는 우리에게 속한 것 같았고요.” 그녀는 생애 첫 쇼 준비에 집착했을 때처럼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디테일을 세세하게 살폈다. 쇼 전날 밤, 그녀는 팀과 함께 자정까지 모델 피팅을 했고 새벽 1시에 귀가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깬 채로 누워 있다가 결국 포기하고 5시 반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동트기 전 밖으로 나왔을 때 이웃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행운을 빌어줬다.
바로 며칠 전, 오랫동안 병을 앓던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카말리는 아버지 상태가 호전됐을 때 전화로 자신의 새로운 업무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아버지가 딸이 품은 야망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어요.” 그녀는 자신의 첫 쇼가 열리기 전 며칠간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면서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큰 충돌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직히 어떻게 해낸 건지 잘 모르겠어요. 큰 충격에 빠져 있었고 몸과 마음이 전부 정상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넌 이걸 해내야만 해. 집중하고 해’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때가 승리의 순간이 되겠지만, 카말리는 역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였어요.”
지난가을 파리로 돌아온 후 카말리는 웨럼과 각각 다섯 살과 세 살이 된 두 아이 비토(Vito), 알바(Alvar)와 함께 뇌이쉬르센에 정착했다. 녹음이 우거진 파리 교외 주택가를 선택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자연환경에 눈이 높아진 탓도 있었다. 파리를 떠나기 전 10년 동안 카말리는 9구에 살았다. 중앙에 회전목마가 있는 예스러운 광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부모들은 코너에 있는 카페에 앉아 와인을 홀짝이는 동네였다. 큰아들 비토는 아브뉴 트뤼덴의 넓은 인도에서 걷는 법을 배웠으며, 팬데믹 때 이곳은 그들에게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렸기 때문에 카말리가 옛날에 자주 가던 곳을 구경시켜주기로 한 계획은 무산됐지만, 우리는 그녀가 파리 최고의 베이커리라고 장담한 마미슈(Mamiche)에 들러 바브카(Babka) 한 조각을 샀다.
뇌이쉬르센의 집은 조용한 거리에 있다. 1층의 목판으로 된 부엌에서는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내려다보인다. 정원의 올리브나무에는 달걀 모양 장식품이 걸려 있는데, 아마도 오래전 부활절 장식일 것이다. 그늘진 구석에는 트램펄린이 설치돼 있다. 처음 그녀를 만난 다음 날 그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방은 전부 깨끗했고, 부엌 게시판에 붙여둔 컬러풀한 그림 외에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집의 흔한 난장판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젯밤에 청소했거든요.” 카말리가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특유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카말리는 끊임없이 꼼꼼하다. 그녀는 나를 웨럼이 있는 위층으로 데려갔다.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갈색 머리칼의 남자로, 겉으로 보이는 근엄함은 입을 여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거실에서 일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함께 콘서트에 가곤 했으며,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일렉트로닉 뮤직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차에서 아이들을 위해 틀 노래를 신중하게 고른다.
집에는 카말리의 서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벽에 늘어선 옷걸이에는 은은한 컬러의 블라우스가 여러 벌 걸려 있어 일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아늑한 살롱처럼 보인다. 카말리는 수십 년 동안 블라우스를 수집해왔다. 빅토리안 스타일의 앤티크부터 칼 라거펠트 시절 끌로에 블라우스와 브랜드를 알 수 없는 버튼다운 스타일까지 대략 1,000벌에 이르며, 그녀의 부모님 집 지하실에도 보관돼 있다.
창의적인 사람 중에는 가능성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하는 타입도 있지만 과거의 유산에 자극을 받았을 때 창의력이 활기를 띠는 사람도 있다. 카말리는 분명 후자다. “견고한 토대가 됩니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과거의 것을 가져다가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하는 거죠.” 추측하건대 그녀는 보호 시크의 여왕으로 알려진 시에나 밀러를 자신의 첫 쇼에 초대하는 데 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 빈티지에서 영감을 받은 미학을 설명하는 보호 시크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일축한다. 이자벨 마랑이나 울라 존슨 같은 브랜드와 늘 붙어 다니며, 최근에는 카말리의 작업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더 넓은 역사적 영향이 결여된 표현일 뿐이다.
전날 카말리는 나를 생토노레의 플래그십 스토어로 데려갔다. 새로 칠한 벽은 반짝였고 직원들의 똑 부러지는 발걸음 소리가 매끈한 바닥에 울려 퍼졌다. 카말리는 앞으로 몇 달간 끌로에 매장을 재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건축 컨셉’을 여기서 시험해볼 거라고 말했다. 이 공간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갤러리처럼 보인다. 하얀 벽에는 덴마크 화가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Mie Olise Kjærgaard)의 크고 컬러풀한 캔버스 여러 점이 걸려 있다. 이 작가는 카말리가 여성 아티스트 육성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 ‘끌로에 아트(Chloé Arts)’의 일환으로 선정한 인물이다. “여성 작가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한때 그녀는 패션쇼를 기승전결이 있는 ‘시, 단편소설, 단편영화’라고 묘사했다.) 카말리는 갤러리스트라기보다 새로 선출된 시장처럼 매장 내부를 거닐었다. 아직 자신의 권한 범위를 파악 중이지만 주민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한 시장 말이다.
잠시 후 끌로에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나와 함께 아카이브로 향하면서 한결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여기서는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어요.”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우스의 꼼꼼한 아카이브 보관 담당자인 제랄딘 줄리 소미에(Géraldine-Julie Sommier)가 슬립 드레스와 시퀸 블라우스 아래에서 여러 가지 소장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라 쉬페 팜므(La Super Femme, 슈퍼우먼)’에 대한 1950년대 신문도 그중 하나로 최초의 파워 수트 뒤에 놓여 있다. 카말리가 드레스를 향해 손을 뻗자 소미에가 막았다. “규칙을 어기면 안 돼요.” 그녀는 카말리를 나무라며 비닐장갑을 건넸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화이트 크로셰 미니 드레스 근처에는 카말리의 흑백사진도 있다. 일개 디자이너 시절, 바로 그 드레스를 매만지던 카말리다. 선반에는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제품이 담긴 상자가 쌓여 있다. “그는 끌로에에서 가장 유연한 구조의 의상을 만들었습니다.” 카말리의 말에 소미에가 덧붙였다. “솔기를 최소화했죠. 마감도 최소로 하고요. 가비는 항상 그에게 ‘더 가볍게, 더 가볍게, 더 가볍게’ 만들라고 말하곤 했어요.”
여기서 ‘가비’는 유대인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나 1952년 파리에서 끌로에를 설립한 가비 아기옹(Gaby Aghion)이다. 1964년 끌로에에 입사해 오늘날 우리가 하우스와 연관시키는 코드를 정립한 이가 라거펠트라면, 자유로운 영혼의 DNA를 구축한 이는 아기옹이다. “난 일을 해야 해요.” 아기옹은 끌로에를 설립한 해에 남편에게 말했다. “점심을 먹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요.”
아기옹의 첫 컬렉션은 여섯 벌의 드레스로 구성되었으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이 입는 가벼운 스포츠 클럽 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옷은 그녀의 아파트 하녀 방에서 꾸뛰르 재단 작업에 사용하는 간단한 재료로 만들었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최우선이었다. “꾸뛰르라는 개념이 좋아서 끌로에를 시작했지만, 약간 유행이 지났다는 걸 알게 됐죠.” 아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고 질 좋은 옷은 거리에서 여자들이 입어야 합니다.” 이브 생 로랑이 기성복의 시초로 알려진 리브 고슈(Rive Gauche)를 론칭하기 10년 전에 아기옹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여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드레스를 선보였다.
카말리가 라거펠트 시절 끌로에를 칭송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기옹의 후손이기도 하다. 카말리는 지난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한 독일 공식 만찬에 참석한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공식적인 자리에 맞는 의상을 고르느라 고심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끌로에 프리 컬렉션에서 점잖은 스타일의 루스한 드레스를 입었다. “뭔가를 입에 넣자마자 토하고 싶은 분위기에 있는 것보다 더 최악은 없어요.”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더웠고, 마크롱 대통령은 늦게 도착했으며, 엄격한 수트를 입은 남자와 딱딱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가벼운 옷을 입는 것에 대해 한마디씩 하려고 카말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그 상황을 재미있게 여겼다. “제 반응은 ‘아, 그래요, 당신 옷도 예쁘군요!’ 그런 식이었죠, 뭐.”
나는 그녀의 집 서재에 앉아 그 이야기를 곱씹어봤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셰미나 카말리는 하루에 수백 가지 결정을 내리고, 여성 중심적인 브랜드를 이끌고 있으며, 현재 그녀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쇼다. 그녀가 다음 쇼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첫 쇼에서 보여준 것의 ‘연장선’이 될 거라는 게 전부였다. 리셋을 위한 일종의 입가심.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영역에 대한 탐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셰미나가 있다. 공식 만찬에서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 요가 클래스에 가거나 독서를 하려고 애쓰면서 양육에 수반되는 수고와 기쁨, 치솟는 커리어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 한다(웨럼이 최근 몇 달 동안 대부분의 집안일을 하고 있다는 데 둘 다 동의했다. 카말리는 그의 요리 솜씨를 칭찬했다). 내가 그들의 집에 도착했을 때쯤 비토와 알바는 학교에 있었고 장난감도 대부분 치워져 있었지만, 나는 치밀하게 조립된 핫휠 트랙을 발견했다. 나도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장난감이다. 아무리 삶이 잘 정돈되고 깔끔하다 한들 아이들에게서 비롯된 형광색 플라스틱 조각의 침범이나 그 밖의 유치한 욕구는 피할 수 없다. 데뷔 쇼 피날레에서 카말리가 인사하기 위해 런웨이로 뛰어나왔을 때,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으면 수족관에 가기로 약속한 비토가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는 엄마가 자기에게 달려오는 거라고 여겼다.
“늘 죄책감을 느낍니다.” 카말리가 말했다. “집에 있으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는 데 죄책감을 느끼죠. 그리고 사무실에 있을 때면 집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요.” 그녀는 균형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 움찔하면서 “일과 가정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게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렵죠”라며 말을 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지금의 자리를 준비해온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에 출근하면 일이 너무 즐겁고 좋을 뿐이죠.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어려움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카말리는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일찍 떠난 출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매일 집에서 겪는 소란을 벗어나 호텔 방에서 푹 자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했다.
카말리는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패러독스를 느낀다. 사회적 성 역할의 의무를 다하려는 동시에 그 역할을 폄하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말이다. 그녀가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을 때, 주요 패션 하우스에 여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수가 부족하다는 집단적 우려가 한차례 제기된 적 있었다. 그녀는 다소 불필요한 담화라고 느꼈다. “성별의 문제라고 느끼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 하우스는 여자가, 저 하우스는 남자가 이끄는 게 맞아라는 식이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고요. 재능 있고 그 자리에 적격인 인재를 찾는 것일 뿐이에요.” 어떤 면에서 그런 담화가 그들(남녀 상관없이 모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 거둔 성취를 깎아내린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세인트 마틴의 멘토 루이스 윌슨 교수가 패션계에서 여자로 일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말한 점을 상기시키며 그녀를 계속 압박했다.
“맞아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가족이 생기면 많은 것이 바뀌기 마련이다.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게 되죠.” 그러나 그녀는 여자로서의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열정적이고 열심히 일하고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결과물은 더 좋아졌죠.” 이 또한 과거 멘토였던 교수의 도움으로 그녀가 연마한 감수성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고 최선을 다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느낄 거라는 것 말이다. (VK)
- 글
- Chloe Schama
- 사진
- Inez & Vinoodh, Courtesy of Chemena Kamali, Chloé
- 스타일리스트
- Amanda Harlech
- 모델
- Angelina Kendall
- 헤어
- John Nollet(Kamali), James Pecis(Angelina)
- 메이크업
- Karin Westerlund(Kamali), Lisa Butler(Angel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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