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 “그렇게 독하게 후시녹음 하는 배우는 처음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감독 6인이 참여한 장편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 이명세 감독의 주도 아래 장항준, 김종관, 노덕, 조성환, 윤유경 감독이 참여했다. 영화의 의미 찾기부터 도전적인 스타일까지 감독들의 면면이 도드라진다. 그들을 이어주는 큰 줄기는 배우 심은경이다. 심은경이란 페르소나를 향한 감독들의 해석 또한 작품을 보는 재미다. 〈보그〉에서만큼은 심은경이 감독들을 촬영한다.
블랙코미디적인 오마주, 노덕
<연애의 온도>(2013), <특종: 량첸살인기>(2015)의 노덕 감독이 연출한 <업자들>은 ‘하청’에 관한 이야기다. ‘원청’이 약속한 청부 살인의 대가 3억원은 재하청을 거치면서 300만원으로 쪼그라들지만, 그런데도 청부는 진행된다. 물론 그렇게 ‘후려친’ 일이 제대로 될 리는 없다. 코믹한 소동극인 동시에 하청 구조에 현실을 빗댄 풍자극이다.
<더 킬러스>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명세 감독으로부터 어떻게 제안을 받았나.
처음에는 이명세 감독님이 ‘서울예술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의 의미로 기획하셨다. “우리가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그때 단편영화를 만들던 초심으로 해보자. 후배들도 연출부나 제작부로 참여시켜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시작이었다. 대규모 상업 영화였다면 요구받는 것들이 많았겠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그런 요구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영화를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MBC와 웨이브, 한국영화감독조합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시네마틱드라마 SF8-만신>(2020)을 연출했다.
그때 동료 감독들과 만나는 자리가 즐거웠다. 그래서 <더 킬러스>에서도 다른 감독들과 함께하는 형태가 기대됐다. 사실 쉽지 않은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게 과연 투자가 될 것인가?’라는 생각부터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이명세 감독님을 워낙 존경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버텨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동안 이명세 감독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고 있다 보니 발을 뺄 수가 없었다.(웃음)
프로젝트의 미션 중 하나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그런 미션이 주어져서 감사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2022)를 끝낸 후에 장편영화나 시리즈 위주로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위한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막막한 상태였고, 이명세 감독님에게 어떤 단초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요청드리기도 했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이 정해졌을 때 어느 정도 기대어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인자들>을 읽었을 때 느낀 단상은.
재미있는 코미디로 읽었다. 겉멋이라고 해야 할까? 서부극처럼 시작해서 대단한 게 있는 것처럼 대화하고, 누군가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잔뜩 있는 척을 하는 포인트가 재미있었다.
<업자들>은 ‘하청의 하청’으로 청부 살인이 진행된다는 설정의 이야기다. 어떤 계기로 떠올린 아이디어인가.
여러 이야기를 고민하면서 나 혼자만의 실패를 여러 번 했다. 이왕이면 현실에서 <살인자들>과 맞닿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다가 실제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뉴스를 보게 됐다. 체포된 하청 업자들을 찍은 보도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에서도 모티브를 얻었다.
살인 청부가 하청으로 이어지면서 처음 원청에서 억대로 받았던 돈이 몇 번의 재하청을 거치면서 100만원대의 금액으로 떨어진다. 이 과정이 그 자체로 블랙코미디였다.
지인들에게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부탁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그런 부분이 비현실적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학창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여서 ‘뭐, 어때? 그러니까 코미디지’라고 여기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라는 반응까지 가줘야 이 컨셉의 의도가 전달될 것 같았다.
재하청을 거치면서 살인 청부 대상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사라지고, 흐려진다. 그렇게 말이 옮겨가는 과정이 꼭 옛날에 <가족오락관>에서 보던 게임 같기도 했다.
감독 입장에서 ‘하청의 시퀀스’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그 장면이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이 작품의 흡인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소와 배우 캐스팅에서도 이 구조를 드러내려고 했다. 처음 살인 청부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놓인 공간은 가장 화려하게 만들고 하청이 거듭될수록 공간까지 달라지는 느낌으로 연출했다. 그만큼 원청 장면에서 인지도가 높은 배우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나에게 직접 출연을 부탁하기도 했다.
배우 심은경은 이 프로젝트의 필수 조건이었다. 연출을 하면서 심은경 배우에 대해 느낀 점은.
처음 은경 씨에게 제안한 캐릭터는 하청을 받은 업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본 은경 씨가 ‘청부 대상으로 오해받아 고충을 겪는 여성’이 더 탐이 난다고 했다. 나는 이 인물을 50대의 중년 여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역할이 육체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계속 묶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은경 씨에게 제안하기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본인이 그 캐릭터를 맡겠다고 했을 때 정말 고마웠다. 촬영 현장 상황 때문에 후시녹음을 해야 했는데, 그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나봤던 배우를 통틀어서 그렇게 독하게 후시녹음을 하는 배우는 처음이었다. 자기 객관화에 굉장히 익숙하고 그래서 매우 냉정하게 스스로를 분석하는 배우라고 느꼈다.
이 프로젝트가 이명세 감독의 기획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봤기 때문인지, <업자들>의 세 주인공이 나란히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하는 장면이 이명세 감독이 연출한 <개그맨>(1989)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도한 부분이었나.
너무너무 의도했던 장면이다.(웃음) 모교의 개교 기념 프로젝트로 출발했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이명세 감독님이었다. 다른 감독님들도 그렇다고 했다. 선배 감독이기 전에 이명세 감독님의 영화를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감독 이명세에 대한 ‘트리뷰트’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감독들 모두 각자 오마주하고 싶은 이명세 감독님의 작품을 꺼냈는데, 그때 내가 이야기한 작품이 <개그맨>이었다. 어렸을 때 <개그맨>을 충격적일 정도로 재밌게 봤다. 그래서 처음부터 인물들을 3인조로 설정했고, 여성 캐릭터의 극 중 이름도 황신혜 배우님이 맡았던 인물인 ‘선영’으로 넣었다.
<업자들>에서 처음 살해 대상으로 나오는 인물의 이름도 이종세(<개그맨>에서 배우 안성기가 맡았던 배역 이름)다. 이런 오마주에 대해 이명세 감독은 뭐라고 했나.
특별한 언급은 안 하셨다. 그냥 부끄러워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또 싫어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웃음)
<개그맨>에는 이명세 감독의 선배인 배창호 감독이 배우로 출연했다. <업자들>에 이명세 감독이 출연했으면 더 명확한 트리뷰트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감독님의 혈육을 출연시켰다.(웃음) 영화 속 3인조를 연기하는 배우 중 한 명이 이명세 감독님의 둘째 아들인 이반석이다. 원래 그 캐릭터를 위해서 따로 오디션을 보기도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만큼 맞는 배우를 못 찾고 있던 와중에 이반석 배우를 알게 됐다. 어디까지나 트리뷰트의 의미가 있으니 망설이지 말고 캐스팅하자고 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어떤 재미를 느끼길 바라나.
<업자들>은 대단히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한 편의 콩트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이 콩트가 그냥 콩트로 끝나면 허무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엔딩을 통해 관객이 현실의 단면을 뾰족하게 느꼈으면 했다. 코미디로 받아주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코미디로만 소비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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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병진(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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