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 “상처 입은 이들이 치유의 단초를 찾는 짧은 순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감독 6인이 참여한 장편 옴니버스 영화 〈더 킬러스〉. 이명세 감독의 주도 아래 장항준, 김종관, 노덕, 조성환, 윤유경 감독이 참여했다. 영화의 의미 찾기부터 도전적인 스타일까지 감독들의 면면이 도드라진다. 그들을 이어주는 큰 줄기는 배우 심은경이다. 심은경이란 페르소나를 향한 감독들의 해석 또한 작품을 보는 재미다. 〈보그〉에서만큼은 심은경이 감독들을 촬영한다.
역전을 노린다, 조성환
<인져리 타임>은 스토리보드 작가 조성환의 감독 데뷔작이다. 외딴 숲 카페에서 자신과 똑 닮은 ‘성수 2’와 일하는 바리스타 ‘성수’는 우연히 세 명의 낯선 방문객과 만나게 되고, 격렬한 내적 투쟁 끝에 어둠에서 빛으로 한 걸음 내디딘다. 그의 그래픽 노블 대표작 <재생력>(2022)과 마찬가지로 어둡지만 아름답고 스산하지만 다정한,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영화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옥자>(2017), <모가디슈>(2021) 등의 스토리보드 작업에 참여했다. 스토리보드 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한데.
영화는 수많은 숏(Shot)의 연결로 완성된다. 스토리보드 작가는 영화의 최소 단위인 이 숏을 디자인한다. 각각의 프레임 안에서 인물이 어디로 움직일지, 소품을 어떻게 활용할지, 카메라가 무엇을 조명할지 결정하는, 한마디로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라 보통은 감독, 촬영감독, 스크립터까지 최소 네 명이 함께 일한다.
흔히 ‘소설은 문장이 전부’라고 한다. 이를 영화에 적용하면 ‘영화는 숏이 전부’라는 말도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본다. 공간, 사운드 등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지만 결국 모든 영화는 사각 프레임 안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숏 디자인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본 경험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인져리 타임>이 공식 데뷔작인 셈인데, 업계에서 오래 일한 만큼 ‘현장’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을 듯하다.
업계와 친숙한 것과는 별개로 ‘현장에서 그들과 내가 쓰는 언어가 다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보긴 했지만, 현업의 최전선에 있는 프로들과 합을 맞춰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다행히 배우도 스태프도 내가 하나를 얘기하면 둘, 셋, 넷을 보여주는 분들이라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더 킬러스> 프로젝트의 모티브가 된 단편 <살인자들>은 헤밍웨이의 소설 중에서도 해석이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빈칸이 너무 많다고 할까.
바로 그 점이 <살인자들>이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유인 것 같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빈칸이 많으니까, 창작자 입장에서는 뛰어놀 수 있는 터가 활짝 마련된 느낌인 거다.
<인져리 타임>에 일인이역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성수’는 살해당할 걸 알면서 방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살인자들>의 전직 복서 ‘올레 안드레슨’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수가 카페 밖으로 발을 내딛는 마지막 장면이 참 뭉클했다. 영화가 방에 틀어박혀 있던 올레 안드레슨을 밖으로 끌어내준 느낌이랄까.
실은 그게 시나리오의 골자였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남자의 이야기. 왜, 현실에서도 그렇지 않나.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애쓰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영화에서는 낯선 3인방이 찾아와 손을 내밀긴 하지만, 성수가 동굴에서 빠져나오려면 결국 본인이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져리 타임’은 일반적으로 축구 경기에서 정규 시간 외 추가로 주어지는 시간을 뜻한다. 이 단어 ‘부상(Injury)’은 추가 시간이 부상자 치료로 인한 지연 시간을 보전하기 위해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인져리 타임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시간인 셈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줘서 고맙다. <인져리 타임>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유의 단초를 찾는 짧은 순간을 담고 있다. 실제로 축구 경기에서 인져리 타임은 5분에서 8분 정도인데, 그 짧은 시간이 내게는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지고 있는 게임’을 ‘이기는 게임’으로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찬스처럼 여겨졌다.
“본인이랑 상관없이 뭔가가 생겼으니까요”라는 ‘후진’의 대사에 마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그 말은 인간의 불행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저 ‘벌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짚어준다.
당신 말처럼 인생의 많은 일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다. 그럴 때는 어떤 선택을 해도 잘못된 선택처럼 느껴지는데, 알고 보면 일이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뿐인 경우가 많다. 내가 쓴 그래픽 노블도 비슷한데, 개인적으로 약간 ‘붕 뜨는’ 사건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상식을 벗어나는 초현실적인 사건일수록 주인공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져야 하고, 그것이 주인공을 괴롭혀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성수를 찾아온 세 사람은 제각각 초능력에 가까운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3인방의 능력은 그들이 겪은 상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눈앞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아빈’은 순간 이동 능력을, 뒤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영채’는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뒤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어느 날 가족이 사라진 ‘후진’은 사람을 찾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식이다. 영화에서는 이들의 사연이 한 줄씩 간략하게 설명되지만, 배우들에게는 현장에서 꽤 자세한 전사를 들려줬다.
후반부에 성수를 습격하는 유령은 유기물에 가까운 기괴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엇을 의도한 연출인가.
유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객이 제각각 해석했으면 했다. 그래서 유령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구교환 배우에게도 일종의 AI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돌비공포라디오’라고 아나. 시청자가 직접 겪은 무서운 이야기를 괴담처럼 들려주는 유튜브 채널인데 굉장히 인기가 많다. 듣다 보면 재밌는 게, 귀신을 믿는 사람들은 사연에 나오는 존재를 100% 귀신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외계 생명체라고 본다.
믿는 대로 보인다는 뜻인가.
그렇다. 영적 세계에서의 귀신도 비슷하지 않나. 늘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그러니까 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형태로 보이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귀신을 좋아한다는 얘긴 아니다.(웃음)
프로젝트의 공통 미션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처리한 방식도 재미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컬러 회화를 앞세운 다른 작품과 달리 원작을 조악하게 모사한 목탄 스케치가 등장한다.
실은 내가 그린 그림이다. 이명세 감독님이 “너는 네가 직접 그려보면 어때?“ 하고 제안하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했다. 자세히 보면 원작과 다르게 두 남자가 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서 있다. 오프닝에서 카페 사장이 그림을 ‘짝퉁’이라고 말하는데, 이게 실은 인물들하고도 연결되는 설정이다. 성수는 ‘성수 2’를 짝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성수 입장에서 ‘성수 2’는 자기 환상이고 가짜인 거다. 너무 자세히 설명하면 재미없으니 여기까지만.
다른 감독들 작품은 어떻게 봤나.
김종관 감독님 작품이 제일 충격이었다. 그렇게 어둡고 피가 튀는 작품도 할 수 있는 분이셨구나 싶었다. 노덕 감독님은 중반까지 빠르게 몰아치는 구성이 진짜 선수다. 그야말로 내공이 느껴졌다고 할까. 윤유경 감독님은 이번에 정말 큰 도전을 하신 것 같다. 우리 중 제일 난도 높은 프로덕션이다. 그리고 이명세, 장항준 감독님은 음··· 내가 그분들 작품에 감히 말을 보탤 군번은 아닌 것 같다.(웃음) 강보라 소설가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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