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패션지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나는 ‘가을이 오면’ 이문세가 떠오르지만, 패션인들은 홑옷을 벗어난다며 설렌다. 서울은 적어도 나보다 패셔너블하다. 하지만 안전한 선택인 블랙 드레스의 무리에 섞이니, 의문은 여전하다.
가을 옷이 오면
556개. 영국 <보그>에서 25년간 편집장을 지낸 알렉산드라 슐먼(Alexandra Shulman)의 옷장에 있는 아이템 개수다. 그녀는 퇴직 후에 ‘쓰레기 같은 기억’을 짊어지고 자서전을 쓰기보다는 옷에 관한 책을 쓰려고 새삼 옷장을 열었다. 코트 22벌, 치마 37벌, 플랫 슈즈 24켤레, 세상에, 반바지 1벌··· 패셔니스타는 반바지를 입지 않는 걸까. 아무튼 그녀의 옷장은 생각보다 아이템이 많지 않았다. 신발장이 가득 차서 싱크대 하단까지 몇만 원짜리 구두로 채운 내 과거에 비하면, 그녀는 확실히 정제됐다. ‘톱’들은 그런 걸까. 슐먼은 <보그> 퇴직 후에야 옷을 입는 즐거움을 찾았다고 했다. 뭐든 일과 엮이면 피곤해지기 마련이고, 사실 나도 그렇게 패션이 즐겁지 않다.
나는 매일 <보그>로 출근한다. 문화·예술·연예 등을 다루는 피처 디렉터지만, 사람들은 내 명함에서 이 생소한 직함은 잊고 <보그>로 뭉뚱그린다. <보그>는 일차적으로 패션에 대한 정보와 영감을 주는 매체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 내 스타일을 관찰하는 상대의 눈길을 느끼곤 한다. 패션지에 들어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오리는 백조가 되어 날아가지만, 나는 여전히 이 무리에서 어색한 채로 18년을 근무해왔다. 앞에서 말했듯이 싱크대 하단을 구두로 채울 만큼 나도 한때 월급을 쇼핑에 쏟아붓는 20대를 보냈지만, 패션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단 나를 치장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보그> 패션 에디터나 스타일리스트, 브랜드 홍보 매니저들은 정말 옷을 사랑한다. 존 갈리아노가 1930년대 파리 밤거리를 재현한 메종 마르지엘라의 2024 봄/여름 오뜨 꾸뛰르 컬렉션을 보면서 눈물짓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간에서 패셔너블은 못할지언정 나만의 ‘피처 에디터’ 스타일을 갖추려고 애써왔다. 그 대표 아이템은 셔츠와 블랙 원피스, 청바지, 운동화와 플랫 슈즈 정도다. 평이한 선택이지만, 시즌마다 조금씩 라인이 달라지기에 때맞춰 새 제품을 구입했다.
9월 어느 날, 편집장은 내게 ‘가을옷을 준비하는 마음’을 쓰길 권했다. 바깥은 여전히 30도지만 10월호는 패션계에서 벼가 익어서 고개가 꺾일 정도로 완연한 가을이니까. 고위직의 방이 그렇듯 편집장실은 통창에 내리쬐는 햇볕이 벽까지 타고 들어왔다. 이런 날씨에는 작은 온실이다. 편집장은 생 로랑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두 손으로 양팔을 쓰다듬으며 여름이 싫다고 했다. 가을이 어서 와야 옷을 입는다고. 그야말로 패션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상 고온 앞에서 한 번도 가을옷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 기획을 거절했다. 피처 에디터들의 패션 위크 격인 ‘프리즈’가 서울에 왔기에, 거기에서 영감을 받겠노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9월 첫 주에 열리는 프리즈 서울에 맞춰 뮤지엄과 갤러리, 여타 브랜드는 예술 전시와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요일은 한남나잇, 수요일은 삼청나잇, 목요일은 청담나잇을 돌았다. ‘나잇’이란 프리즈 로스앤젤레스나 프리즈 런던에서는 볼 수 없는 프리즈 서울만의 용어로, 해당 지역 갤러리가 늦게까지 문을 열고, 마당에는 공연이 열리고, 와인과 음식을 사람들과 나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도블록을 따라 신문지를 깔고 송강호와 이자벨 위페르가 앉아 소주를 마셨다는 낭만의 시절을 닮았다. 나는 사흘 연속 방문하며 이전에 없던 예술 난장을 즐기고 싶었다.
삼청나잇에 들른 저녁, 국제갤러리와 갤러리현대는 경주 최 부잣집이 곳간을 푼 것처럼 푸짐한 상을 마련해 인산인해였다. 지난해보다 높은 기온에 다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파티를 즐기려고 적어도 옷을 골라 입고 왔을 사람들을 보며 나는 예술이 아니라 새삼 패션을 생각했다. 언제부터 서울이 이렇게 옷 잘 입는 도시가 됐을까.
2011년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이었던 프랑카 소짜니가 한국 젊은이들의 패션을 보고 싶다며 동대문 두타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나는 좀 걱정됐다. 같은 해,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 스콧 슈먼도 왔다. 그의 사이트 ‘사토리얼리스트’에 사진이 과연 몇 장이나 올라올지 의문이었다. 그를 데려온 한국 브랜드가 섭외했음이 분명한 몇몇 연예인의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제 서울은 다들 옷을 잘 입고(적어도 나보다), 때론 유행에 휩쓸리지만, 그마저 패션을 사랑한다는 방증이다. 삼청나잇에서 나는 10년 새 달라진 서울 패션 풍경에 취해 있었다. 밤바람과 와인에도 취해 마음도 한껏 열린 상태긴 했다.
프리즈의 개막일. 오후 11시에 입장 코드를 받고 코엑스 C홀에 들어섰다. 지난해보다 한산했는데, 호기심 거품은 빠지고 살 사람은 남았다고 어느 큐레이터가 말했다. 미디어에 뿌릴 ‘세일즈 리포트’에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검은색 슬랙스와 재킷, 흰 셔츠 차림이었다. 전형적인 큐레이터 스타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형적인 직업 스타일’은 곡해가 있다. 지난 2022년 프리즈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날씨와 태양의 영향 때문인지 밝고 강렬한 색감의 회화가 주를 이뤘다. 그런 작품 분위기에 맞춰 갤러리스트는 원색 수트와 화려한 패턴의 드레스를 입는 정성을 들였다. 방문자의 스타일은 더 다채로웠다. 스터드가 잔뜩 박힌 가죽 재킷을 입은 노부인부터 드레드 머리를 발끝까지 땋아 내리고 붉은 사리에 청바지를 입은 여성 등 패션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올해는 프리즈 서울만의 스타일을 발견했다. <보그> 편집부 속의 나와 닮아 있었다. 과감함보다는 도를 넘지 않으며, 세련되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의지가 느껴진달까. 색상은 드레스업한 사람 대부분이 블랙이 대세였다. 숯의 화가 이배의 작품 앞은 유독 연령대 있는 컬렉터로 붐볐다. 잘 재단된 좋은 소재의 옷이었지만 숯의 그림에 드레스 코드를 맞추듯 무채색의 향연이었다.
편협한 시선일 수 있지만 무척 흥미로웠고, 이는 청담나잇까지 이어졌다. <보그>는 청담나잇을 맞아 루이 비통과 함께 ‘Art Night Out’ 파티를 열었다. 저녁 7시 오픈을 기다리는 <보그> 편집부 사무실. 대부분의 에디터가 블랙 의상을 선택했다. 물론 소재나 디자인을 변주했고, 한 벌 한 벌 멋졌다. 주로 디자이너 쇼룸 혹은 해외에서 구입하며 감격했을 법한 옷이다. 나는 파란색 오버사이즈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다른 뷰티 에디터는 마린 티셔츠에 빈티지한 볼캡을 쓰고, 골드 주얼리를 했다. 그녀는 선배들에게 ‘입뺀’이라는 농담을 듣고 있었다.
물론 나는 몇 달 동안 파티를 준비하며 호스트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는 것도. 그래서 고른 차림이었다. 베트멍에서 구입한 이 블루 셔츠는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고, 오버사이즈의 디자인 덕에 얼굴이 갸름해 보이고, 일하는 도시인의 느낌을 선사하기에 좋아하는 옷이었다. 내 선에선 사무실에서 일하다 캐주얼한 파티에 참석하기에 적절하다고 여겼다.
저녁 7시 파티 시작. 에스파스 루이 비통 3층에 들어섰다. 1934년생 섬유 예술의 대가, 셰일라 힉스의 전시장 맞은편에서 밍글링이 시작됐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청년들이 루이나 샴페인을 나르고 있었다. 수십 명이 순차적으로 방문하면서 공간은 계속 빼곡했다. 나는 뒤편 벽에 기대 샴페인을 마시며 그들을 주시했다. 드레스 코드가 없는 파티였지만 여기서도 블랙은 세를 떨쳤다. 빨주노초파남보 패브릭으로 만들어낸 셰일라 힉스의 작품, 그 맞은편에 블랙으로 차려입은 패션계와 예술계 인사들의 색감이 대조적이었다.
대체 블랙은 어떤 색인가? 고등학교 때 <보그>에서 리틀 블랙 드레스에 관한 칼럼을 읽었다. 오드리 헵번을 예로 들며 누구나 한 벌쯤 리틀 블랙 드레스를 옷장에 구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타임리스라 평생 입을 거라고도 했다. 필자의 찬양에 매료돼 나도 언젠가 이 옷을 구입하리라 다짐했다. 물론 지금 내 방엔 블랙 드레스가 계절별로 하나씩 있다. 내겐 셔츠만큼이나 안전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안전한 선택을 하는 걸까?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존 하비가 쓴 <블랙패션의 문화사>는 블랙파워를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검은색은 문상이나 애도, 도덕적이고 청교도적인 색으로 깊숙이 각인됐을 뿐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의미가 깊어져, 자신 있고 중요하며 힘을 지닌 색이 됐다. 패션계가 무지개색을 다 거쳐갈 때도 블랙은 필사의 유행이고 서울은 더 그렇다.
안전한 선택의 향연이라며 토로하자 <보그> 편집장은 주억이다 다른 추리를 내놨다. 우린 평생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보고 자라왔기에, 시각적으로 무거운 상단(머리와 눈동자)과 균형을 맞추려고 본능적으로 블랙으로 몸(하단)을 감싸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역시 패션 피플은 다르군요.” 나는 가볍게 소감을 남겼지만 사실 솔깃했다. 존 하비에 따르면 “상황에 따라 옷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일 수 있다”. <보그> 파티에 온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위아래 검은색 균형을 맞추며 거울 앞에서 시각적 편안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게다가 요즘엔 아이돌이 아닌 이상 헤어 염색도 잘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 추론을 블랙으로 드레스업한 이에게 제기한다면 “당신이 나를?”이라며 위아래로 나를 훑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패션에 삐져 있었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곤도 마리에가 타이틀 롤인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촬영하던 때, 겉으론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쇼핑을 거부했다. 핵분열처럼 빠르게 새 유행을 내놓는 패션 시장, 해독이 필요한 낯선 용어와 입기엔 도저히 불편해 보이는 컬렉션을 기본 교양처럼 흡수하는 편집부에 질려 하면서 말이다. 이들과 다른 부류처럼 고고한 척했지만 나는 그저 따라가지 못할 거면 먼저 무시해버리는 아이였을 뿐이다.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는 옷차림조차 나를 말해준다. 마주치는 이에게 몇 초 만에 직관적으로. 서로를 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까운데 궁금하긴 해서 MBTI가 그렇게 유행하는지도 모른다. 옷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빠른 힌트다. 그것이 틀릴 수 있지만 진위 여부가 판명될 만큼 사이가 가까워지긴 힘들기에, 한 선배가 그랬다. “그래서 옷은 네 세를 확장할 수 있는 힘이야.”
여전히 이 말에 반감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옷에 삐져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내 스타일을 찾으려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남들과 관계없이 내가 입기 편하고 예뻐 보이는 것들을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마흔의 옷장은 비슷비슷한 색채와 디자인으로 채워졌다. 이들이 내 스타일일까? 큼직한 사이즈의 셔츠 무리를 보면서 궁금했다.
9월 한 달간 바삐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로 컬렉션 출장을 떠나는 패션 에디터들은 내년 봄여름 패션을 보고 올 거다. 그러니 더위로 끓는 와중이어도 10월호를 맞아 가을옷에 관해 쓰라는 편집장의 말은 대중 친화적이고 합당한 제안이었다. 나는 가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을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면 어쩌지.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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