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처럼 사라질 운명에 대하여,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展
유난히 혹독했던 여름을 지나 10월이 되자마자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호암미술관은 사시사철 언제 가도 좋은 곳이지요. 미술관을 바라보는 호암호와 일대의 산, 그리고 잘 꾸민 정원의 색감이 매 계절 색다른 풍경과 느낌을 선사하니까요. 게다가 올가을은 전 세계 미술계와 미술 시장에서 뜨겁게 사랑받는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 <더스트>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9월 초에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도 그의 ‘붉은 숲의 세폭화’가 35만 달러(약 4억6,000만원), ‘커튼이 있는 초상화’가 250만 달러(약 33억원)에 판매되어 화제였죠. 하지만 파티의 회화는 판매가나 명성을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매혹적이라는 걸 이번 전시를 보면서 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예술 작품과 건축, 자연과 서사가 대담하게 조화를 이루는 전시는 참 흔치 않지요.
니콜라스 파티의 회화는 보면 볼수록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풍경화 혹은 초상화인데,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상의 여백을 선사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그림 속 세상과 인물은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소설 속 주인공 같기도 하고, 미술관 밖 산의 풍경 같기도 합니다. 한 점의 그림에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파티는 미술사를 충실히 공부하고 이에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 작가입니다. 즉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미술사의 다양한 모티브, 양식, 재료 등을 자유롭게 참조해 독자적 이미지로 만들어낸 거죠. 역사와 기본에 충실한 작가는 전통을 달리 보는 안목과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이를테면 파티의 회화가 부드럽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건 다름 아닌 파스텔로 작업하기 때문인데요.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후 비주류적, 아마추어적 재료로 치부되어온 파스텔로 이런 효과를 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회화 표면을 자세히 보면 파스텔의 미세한 가루가 보일 뿐 아니라 그 촉감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전시 <더스트>는 니콜라스 파티의 기존 작품과 신작을 최대 규모로 선보인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지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의 존재가 그 가치를 더합니다. 미술관의 상징과도 같은 계단을 비롯해 각 전시장에는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파스텔 벽화 작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굴, 산, 숲, 폭포 등 평범한 풍경을 비범하게 담아내는 벽화는 전시가 끝나면 ‘먼지’처럼 사라질 운명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파스텔이라는 재료와 벽화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불안정성, 문명과 자연의 지속 및 소멸에 대한 화두를 제시합니다. 게다가 한국 고미술품을 자기 작업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전략도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동굴’ 벽화와 그 앞에 놓인 조선 백자 ‘백자 태호’, 사계절을 그린 풍경화와 같은 공간에 자리한 ‘십장생도 10곡병’은 본래 그 자리에서 어우러졌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청자 주자가 있는 초상’처럼 청자에 직접 영감을 받은 작품도 꽤 신선합니다. 전통과 현대, 그리고 그 시간을 관통하는 아름다움을 돌아보게 하는 예술가의 노력은 전시 전반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니콜라스 파티의 작업을 보면서 저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회화를 보는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가 어째서 지금과 같은 첨단의 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반증합니다. 온도까지 느껴지는 듯한 풍경 그림, 공룡을 그린 작은 그림, 그리고 낭만주의적 숭고와 재난의 이미지가 교차되는 오묘한 작품을 보고 있자니, 100년 후에 과연 그의 그림이 어떻게 해석될지 새삼 궁금해지더군요. 좋은 작품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게 하고, 인류의 역사를 써온 재현이라는 행위의 의미와 중요성을 각인시킵니다. 작가는 언젠가는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해탈의 의미를 담아 전시 제목을 ‘더스트’로 지었지만, 저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니콜라스 파티를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내년 1월 19일까지 전시가 열린다 하니, 겨울에 한 번 더 호암미술관에 갈 명분이 생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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