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와 한지은이 그린 동상이몽 ‘결혼, 하겠나?’
우리의 생각은 〈결혼, 하겠나?〉의 이동휘와 한지은이 마주 앉은 이 테이블의 길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그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느냐, 삼키고 감수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든 순간의 희로애락, 이동휘
“맨 처음 제가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될 거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모두 그런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요? 뭔가에 도전한다고 하면 응원보다는 ‘에이, 그게 되겠어?’ ‘좀 더 알아봐야 하지 않아?’라는 말을 더 자주 듣죠. 그런 말로 인해 많은 꿈이 꺾이고,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이 많은데 저도 그런 상황 속에서 배우로 살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꿋꿋이 도전하며 살아가보자는 마음을 담아 이기혁 감독과 함께 <메소드연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영화와 영화인의 헌신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들 앞에서 <메소드연기> GV에 참석한 이동휘가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전개했다. <메소드연기>는 그가 오랜 친구인 이기혁 감독과 함께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를 장편 상업 영화로 확장시킨 자전적인 작품. 코미디 배우라는 프레임에 갇힌 주인공 ‘이동휘’가 사극에서 돌파구를 찾는다는 현실과 비현실을 교묘하게 줄타기하는 이야기로 이동휘는 11년의 배우 생활로 쌓아 올린 모든 이미지와 존재감을 활용해 극에 설득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영화 <결혼, 하겠나?>를 함께한 배우 한지은과 <보그> 촬영에 임한 이동휘는 두툼한 오라리의 레더 블루종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선언했다. “정성. 저는 정성만 있으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어요. 어떤 배우가 눈앞에서 정말 열연을 펼치고, 나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연기하는 모습을 볼 때 관객은 감동하거든요. <메소드연기>를 찍고 저는 몸이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어요.”
정성을 쏟아부을 준비가 된 배우가 가장 기다리는 것은 진정성 있는 이야기, 그리고 진심을 간직한 동료들이다. 영화 <결혼, 하겠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기회였다. 물론 화제가 된 작품만 기억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런 기회가 얼마나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마침내 스크린에 당도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 드라마, 연극을 통틀어 정말 좋은 대본은 많이 쳐줘도 10%가 안 되거든요. 그러니 좋은 대본을 만나면 배우는 행복할 수밖에 없죠.” <결혼, 하겠나?>는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계획 중인 연인, 선우(이동휘)와 우정(한지은)을 둘러싼 생계형 코미디 영화다. 그러나 영화의 초점은 연애와 결혼을 살짝 빗나가 결혼 준비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가족의 사연에 더 자주 머문다. 상견례 날, 사고뭉치 아빠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선우는 하루하루 무섭게 불어나는 병원비의 압박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건축학과 시간강사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많지 않고, 가족사도 단단히 꼬여 있다. “김진태 감독님 본인의 이야기라서 느껴지는 감동이 있더라고요. 오래 묵혀두었던 이야기가 영화 <공조>(2017)와 드라마 <수사반장 1958>(2024)을 함께한 김성훈 감독님이 제작에 나서주신 덕분에 빛을 볼 수 있었으니 감사하죠.”
그러나 이동휘 역시 빛을 드리우는 존재다. <메소드연기>를 함께 만든 이기혁 감독의 <출국심사>(2019), 전지희 감독의 <국도극장>(2020), 형슬우 감독의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2023), 그리고 <결혼, 하겠나?>까지, 이동휘는 꽤 많은 국내 감독의 ‘처음’을 열어왔다. 다행히 성실하게 쌓아온 신뢰감과 다방면에서 골고루 획득한 인기가 누군가의 도전을 응원하는 데 부족하지 않은 추진력을 실어줬다. “이런 식으로 배양 과정을 거치고 있어요. 최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한국경쟁 장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너와 나의 5분>도 대본이 아주 마음에 들어 ‘오케이’ 했는데 제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담임선생님밖에는 없더라고요. 엄하늘 감독도 결국 저랑 입봉을 한 거죠. 제가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본 영화 같은 걸 만든다면 저 같은 배우들이 또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역할을 해내야겠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점점 커지는 요즘인 것 같아요.”
수많은 재능 중에서 특히 주변을 웃기는 재주로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입학한 이동휘는 스물여덟이라는 다소 늦은 시점에 영화 <남쪽으로 튀어>(2013)로 데뷔하기까지, 좋은 영화를 탐색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 시절 영감을 많이 받았던 영화라면 <여인의 향기>(1993)와 <포레스트 검프>(1994),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등이 있죠. 다 사람 사는 이야기예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을 돋보기로 파헤치는 시선을 가진 영화를 매력적으로 느끼거든요.” 이동휘는 미시적 세계를 사랑한다. “<결혼, 하겠나?>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주차장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차를 고치느라 애를 쓰고 있고, 어떤 부자는 상견례를 하느냐 마느냐로 입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은 일상에서 정말 그냥 스쳐 지나갈 법한 순간들이잖아요. 그런 걸 포착하는 게 너무 좋아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희극에서 비극을 감지할 수 있다. 이동휘는 환희 속에서 쓸쓸함을, 슬픔 속에서 희망을 감지한다. 그의 연기에서 예리한 현실감각이 느껴지는 비결이다. “그런 게 인생이잖아요. 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 영화를 진짜 좋아하는 이유도 그거거든요. 말도 안 되게 힘든 상황에도 웃음이 터지고, 불행 중에도 가슴 시린 행복을 느끼는 게 우리 삶의 아이러니죠. <결혼, 하겠나?>에서 선우가 맞닥뜨린 상황은 힘들지만 아빠랑 엄마랑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또 다른 미래를 은근히 점치기도 해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라 여겼어요.”
안타까운 상황으로 가득한 <결혼, 하겠나?>는 역대 필모그래피 중에서는 흔치 않게 이동휘의 눈물샘을 자극한 영화다. 그만큼 연기의 희열도 컸다. 상대 배우 한지은의 도움으로 이야기에 쉽게 몰입한 이동휘는 종종 속으로 ‘선우가 우정이를 놓치면 안 되는데’ 하며 전전긍긍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우정이는 약간 판타지적인 인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지은이가 잘해줘서 몰입하는 데 수월했죠.” 부자 관계로 엮인 강신일 배우와는 숨이 턱 막히는 애증 관계를 섬세하게 일궈냈다. “강신일 선배님도 그렇고 <카지노>를 함께한 최민식 선배님처럼 존경하는 배우들과 연기할 땐 정말 사력을 다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선배님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기기도 하고요.” 이동휘는 그런 마음으로 최선의 연기를 펼친다. 상대를 믿기에 마음껏 활보하며 그 결과 동료는 물론 관객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앞서 선포했듯 이동휘는 늘 정성으로 믿음을 얻어낸다.
인터뷰가 계속되며 이동휘는 현실감각이 좋은 배우일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져 갔다. 비현실성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판타지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무딘 현실감각이 몰입을 깨는 순간을 극도로 경계한다. 패션을 사랑하지만, 그러지 않아야 하는 순간에 패션이 돋보이는 광경은 참을 수 없다. “가난한 역할인데 검색해보면 코트가 400만원짜리면 몰입이 깨지잖아요. 형사가 오라리 레더 재킷을 입고 나오면 이상하죠. 좋아하는 만큼 그런 게 더 잘 보여요. <범죄도시 4>의 장동철은 캐릭터적으로 각인이 필요하니 여러 브랜드를 이용한 반면 <결혼, 하겠나?>의 선우는 단벌 신사로 연기했어요. 그 친구는 지금 자기가 뭘 입었는지도 모르고, 거울 볼 시간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인물이니까요.”
이제까지 이어온 발자취를 토대로 일군 안전한 세계 안에서 이동휘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 스스로에 대해 확실한 관찰 결과를 갖고 있고, 이는 선택의 고민을 대폭 줄여준다. “지난 10년 동안 딱 세 가지만으로 일상이 잘 굴러갔어요. 산책, 옷 사는 거, 그리고 고양이들. 최근 산책이 러닝으로 살짝 옮겨간 것 말고는 한결같죠. (강)동원 형이 골프, (마)동석 형이 복싱을 권할 때도 한번 해볼 법도 한데 저는 요지부동이었어요. 루틴을 깨는 게 저에게는 참 힘든 일이에요.” 그 외에 꽤나 꾸준히 이어와 루틴처럼 돼버린 것은 유튜브 콘텐츠 출연이다. 프로젝트 그룹 ‘정상동기’로 활약했던 <놀면 뭐하니?>를 통해 얻은 소중한 인연을 중심으로 마음과 의리를 표하기 위해 하나둘 수락하게 된 자리는 어느새 이동휘의 또 다른 무대가 돼주고 있다. “‘핑계고’는 올해만 일곱 번 출연했다니까요.(웃음) 솔직히 ‘핑계고’ 시상식에서 뭐든 상 하나는 받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상은··· 황정민 형이 워낙 임팩트 있는 활약을 해서 어려울 것 같지만요.”
인터뷰 내내 몸을 웅크린 채 칭찬으로 다가가면 ‘아닙니다’라고 손사래 치며 한 발 멀어지는 이동휘는 고양이를 닮은 남자지만 의외로 끈질기게 마음을 표하는 편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강하늘, <범죄도시>의 진선규, <헌트>의 김종수, <마스크걸>의 염혜란과 안재홍을 보고 그는 친분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마음을 건넸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애쓰는 세계에서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동료의 노력을 온 힘을 다해 축하해주려 노력해요. 술은 잘 안 먹어도 뒤풀이 자리는 끝까지 지키는 이유죠. 이번에 연극 <타인의 삶>을 함께하는 김준한, 최희서 배우도 그렇게 친해졌어요. ‘부럽다, 대단하다’ 하면서요.” 물론 여기에는 숨겨진 노력이 있다. “6년 전쯤, ‘왜 하고 싶은 작품에는 캐스팅이 안 될까?’ 어떤 날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이렇게 재미없는 영화를 대체 왜 수백억을 들여 만든 걸까?’ 그런 불평과 고민을 하다가 문득 그렇게 투덜거리는 제가 너무 싫더라고요. 그때 나부터 바뀌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껏 부러워하고, 축하하고, 최대한 마음을 표현하며 살자고 다짐했죠. 그 후 <극한직업> 팀을 만나고 나서 그 결심이 맞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어요.”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다. 이번 생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의 100%를 올인 하기로 결심한 이동휘는 매번 새로운 세계에 덜컥 가닿고, 느긋하게 때를 기다린다. 연극과를 졸업한 후 틈틈이 돌아갈 기회를 엿봤지만 어설프게 몰두하고 싶지 않아 10년 가까이 물리친 연극 무대처럼. “수많은 작품을 거절했거든요. 고독하고 외로운 시기도 있었지만 다 자양분이 돼서 결국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약진하면서 전진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배우로서 좋은 대본으로 좋은 연기를 펼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죠.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현실과 사랑 중에 그래도 사랑, 한지은
한지은은 라벨 없는 물병 하나를 들고 왔다. ‘미네랄 소금’을 탄 물이 담겨 있다고 했다. “매일 아침 소금물을 마시고 사과 반 개를 먹어요. 그러고 나면 잠이 깨요. 찌뿌둥하던 몸도 가벼워지고요, 활기차게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생긴다고 할까요?” 한지은은 요즘 그렇게 불어넣은 기운으로 하루를 빼곡하게 채우는 중이다. 헬스장에서 하체 운동을 하고 틈나는 대로 요가도 하고 달리기도 한다. 전시와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최근에는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 인 콘서트와 일본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의 전시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을 관람했다. “처음에는 멋있다, 예쁘다,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섬유의 자투리까지 이용해서 작품으로 만들더라고요. 이분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궁금해지면서 울컥했어요. 그때 실제 디자이너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조금 나눌 수 있었죠. 실제로도 파란만장하게 살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러 작품에서 현실적인 애환에 유머 한 스푼을 담은 연기로 호평받은 한지은은 실제로도 다른 이의 삶에 눈이 밝은 사람인 듯했다.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예전에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목표가 너무 뚜렷한 데 반해서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 괴리감에서 오는 절망과 좌절이 오히려 저의 하루를 무너뜨리기도 하더라고요. 이제는 소소한 목표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걸쳐 완성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그가 알려준 계획은 크게 세 가지다. 최소 6개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영어 공부하기.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운동하기. 그리고 매일 아침 물에 소금 타서 마시기.
배우 이동휘와 출연한 영화 <결혼, 하겠나?>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한지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 또한 ‘촘촘한 생활’이었다. <결혼, 하겠나?>는 예비부부 커플 앞에 닥친 ‘돈 문제’의 재난에 관한 이야기다. 약혼남의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후, 핑크 뮬리로 가득한 초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두 사람의 계획은 무기한 미뤄진다. 남자는 앞으로 쏟아내야 할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아버지를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신용 불량자이고 공식적으로 등록된 거주지도 없는 사람이다. <결혼, 하겠나?>는 친척 집과 동사무소, 직장을 뛰어다니는 이 남자의 고충을 A부터 Z까지 엮어냈다. 한지은이 맡은 ‘우정’이란 여자는 출구를 찾아 헤매는 남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뒤에서 등을 맞대주는 연인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인데, 블랙코미디처럼 무겁게 진행되지 않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제가 맡은 우정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걸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여자거든요? 저의 실제 모습이 어느 정도는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도 있었죠.” 영화 속의 우정은 사랑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굳이 지옥 불로 들어가야 하느냐는 의문 사이에서 흔들린다. 힘이 되어주기 위해 연인을 찾아가지만, 오히려 마음을 오해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국 ‘좋은 걸 가져다줘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도 좋을 게 없다’는 걸 확신한다. 한지은은 그런 인물의 여정이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실과 사랑을 대하는 가치관이 많이 닮은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지은이 이전에 연기한 여자들도 마냥 꿈만 꿀 수는 없었다. 일과 육아를 바쁘게 오갔던 <멜로가 체질>의 싱글 맘 황한주, 주식 투자 실패의 절망에 빠졌던 <개미가 타고 있어요>의 예비 신부 유미서, 그리고 <결혼, 하겠나?>의 우정을 이어놓고 보면 모두 흔들릴망정, 부서지지는 않는 여자들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우정이가 좀 더 현실적인 사람 같아요. 저는 우정이가 최대한 순수해 보였으면 좋겠다고 느꼈어요. 순수해서 오히려 자기만의 고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봤죠. 남들이 볼 때는 바보 같고 시야가 좁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정이는 오히려 사랑을 솔직하게 느낄 줄 알고, 또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한지은은 우정이 처한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도 그녀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속상하겠죠. 그런데 그런 현실 때문에 사랑을 저버리는 것도 어려울 거 같아요. 최대한 힘을 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을 거예요.”
결이 맞는 여자였지만, 까다로운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결혼, 하겠나?>는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모든 캐릭터가 부산 현지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당연히 우정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네이티브’ 수준의 부산 사투리를 구사해야 했다. 한국의 배우에게 ‘사투리 연기’는 찬사와 혹평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숙제다. 사투리를 모르는 관객에게는 과장된 사투리가 더 현실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해당 지역 출신의 관객에겐 ‘그건 진짜 사투리가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곤 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포항과 대구에서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수도권에서 보낸 한지은에게도 ‘사투리’는 두려운 과제였다. “2개월 정도 선생님에게 배웠어요. 부산 출신인 감독님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죠.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부산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특히 감정의 겹이 복합적인 연기를 해야 할 때 신경 쓸 게 많았죠. 그래서 제가 정말 잘했는지 아직도 불안해요.” 입말이 낯선 환경에서 함께 연기한 이동휘는 큰 힘이 됐다. 한지은은 이동휘가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말 깔끔하게 리드를 하면서 잘 챙겨주셨어요. 무엇보다 현장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세요. 그런 후에 의견을 주시면서도 혹시나 제가 불편할까 봐 배려해주는 것도 많았어요. 저로서는 너무 고마울 수밖에 없었죠.” <결혼, 하겠나?>에는 그런 두 사람의 호흡이 빛나는 장면이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뛰어다니는 남자에게 여자가 찾아온다. “나도 좀 뭐를 알아야 덜 불안할 거 아니야.” 여자의 하소연을 남자는 결혼을 재촉하는 말로 곡해하고 여자는 상처를 입는다. 화도 나고 눈물도 나지만, 그 상황에서도 연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해서 더 마음이 아픈 상황. 한지은과 이동휘는 “사투리 연습한 거 믿고 서로가 느껴지는 대로 편하게 하자”며 연기했다.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화를 내고, 동시에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하는 감정이었어요. 여성 관객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의 감정일 거예요. 혼자 힘들지 말고 같이 힘들자는 건데, 이 남자가 나를 끼워주지 않는 거잖아요. 나를 무시하나?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 남자가 또 얼마나 힘들까 싶은 거죠.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어요.”
한지은에게 <결혼, 하겠나?>의 우정은 지금까지 연기한 여자들과 비교할 때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하나의 밈이 되었던 <멜로가 체질>의 ‘애교 지옥’ 장면을 기억하는 시청자에게는 오히려 낯설어 보일 수도. 그런데 곧 공개될 작품 속에서 한지은은 더 낯선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내년 1월에 방영될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에서 그가 연기한 최고은은 재벌 그룹의 후계자 구도 전쟁을 강단과 실력으로 돌파하는 여자다. “누구 앞에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어요. 재벌 총수인 아버지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큼은 정말 약해요. 그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단단하게 만들죠. 그런 모습을 끝까지 잡고 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저도 같이 성숙해지는 느낌이었죠.” 내년 상반기에 공개되는 드라마 <스터디그룹>에서는 시청자들이 한지은에게 기대할 법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을 예정이다. “선생님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까지 무시당하면서도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기간제 교사예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은 대부분 조금이라도 코믹한 모습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한경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어요. 정말 진지해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보겠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한지은은 그동안 해온 코미디 연기에서 더 큰 만족을 원하고 있다. “배우로서 당연히 여러 역할을 해보고 싶지만, 이른 시일 내에는 정통 코미디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했던 건 코미디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휴먼 드라마의 느낌이 더 강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직 이 장르에서 정점을 찍지는 못한 것 같아요.(웃음)” 물론 한지은에게 유독 코미디 연기가 쉬운 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연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냈을 때의 희열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연기는 결국 디테일 싸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끗 차이에서 뻔하지 않은 것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코미디 연기를 할 때도 그런 디테일이 살아나서 관객이 좋아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캐릭터 자체가 코미디로 꽉 차 있는 그런 인물을 만나고 싶어요.” 그가 예로 든 캐릭터는 영화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이었다. “배우로서는 이게 맞는 선택인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공효진 선배님이 정말 멋있게 보여주셨잖아요. 여배우로서 내려놓기 어려운 부분을 내려놓아야 하는 캐릭터지만, 그래서 저는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지은은 그런 의지를 ‘아직 해소되지 못한 욕심’이라고 표현했다. 이른 아침의 찌뿌둥한 느낌처럼, 언젠가는 꼭 해소해야만 하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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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
- 권영은(이동휘), 김귀애(한지은)
- 메이크업
- 김부성(이동휘), 이나겸(한지은)
- 세트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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