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위스키를 음미하는 김금희의 단편소설 ‘주종의 이해’

2024.10.24

위스키를 음미하는 김금희의 단편소설 ‘주종의 이해’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주종의 이해

이제 희신이 남극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손을 놀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촬영 팀이 돌아오면 기지에서 빌려준 목발을 짚고 나가 자신이 무언가 작은 역할을 수행했음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오늘 회사에서 추가 요구가 왔다던가, 칠레 쪽 관계자가 이런 이메일을 썼다던가···. 하지만 두 뺨이 벌겋게 언 채 비릿한 펭귄 분변 냄새를 묻히고 들어온 누구도 희신이 바라는 반응은 해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1만3,204킬로미터 떨어진, 지금까지 희신이 맡았던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많은 제작비를 써가며 달려온 남극에 오자마자 그는 발목을 다쳤다. 칠레 푼타아레나스와 남극을 오가는 비행기가 사흘간 결항되는 바람에 촬영 기간이 줄었고 시간을 쪼개가며 아주 ‘빡세게’ 촬영해야 할 상황이었다. 펭귄 날개라도 빌려야 할 판에 인간 노동력 하나가 날아가버리다니, 팀 분위기는 싸늘했다. 희신은 모두가 외출한 사이 혼자 기지에 남아 저 멀리 남극가마우지가 올라가 있는 빙산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기곤 했다. 그날 오렌지색 탁구공이 자기 쪽으로 굴러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자신이 그것을 밟고 넘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펭귄은 어때요?” 삼겹살이 메뉴로 나온 저녁 식탁에서 희신이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물었다. “귀여워.” 음향 담당이 짧게 답했다. 미안함에 내내 자리에 선 채 고기를 굽고 자르고 마늘과 파, 신김치를 올리고 있는 희신의 노력은 허사인 듯했다. “스쿠아들은 듣던 대로 잔인해요?” 희신이 다시 말을 붙였다. 펭귄알과 새끼를 잡아먹는 그 새는 우리말 이름도 ‘남극도둑갈매기’였다.

“스쿠아들은 잔혹하지 않아요.” 다행히 과학자 한 명이 대화를 이어주었다. “살려면 어쩔 수 없죠. 이 섬의 펭귄 수에 비하면 스쿠아 수는 많다고도 할 수 없어요. 문제는 지구 온난화로 북방의 새들, 특히 대형 조류들이 남하할 경우 일어나죠. 예를 들어 대머리수리들이 남극에 살게 되면 펭귄들의 생존이 어떻게 되겠어요?” “큰일이네요.” 희신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표정이 좀 풀린 듯한 감독에게 구운 양송이를 내밀었다. 감독은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죠, 그거야 닥쳐봐야 알죠. 의외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옆자리 연구자가 반대하자 그 과학자는 “주종 관계가 변할 일은 없죠”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상황이 변해도 펭귄이 대머리수리를 잡아먹겠어요?” 떠드는 사이 회식 자리는 끝을 향해 갔다.

“웬 술을 이렇게 마셔? 소염제도 먹으면서?” 같은 작가인 다윤이 한마디 했지만 희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알코올이 돌면서 희신의 육체에도 온난화가 진행 중이었으니까. 그것은 위축된 희신의 마음을 녹였고 죄책감의 크기를 줄였고, 지난 며칠간 응어리져 있던 억울함을 끄집어냈다. 볕 좋은 날이면 텅 하는 굉음과 진동을 내며 무너지는 남극의 빙벽처럼, 희신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처신에 대한 감각 같은 것이 소멸하고 있었다.

“저어거언 왜 까아는 거언데여?”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금박지를 덮는 걸 보며 희신이 취중 상태로 몽롱하게 물었다. “이제 빠질 사람들 빠지고 진짜가 나오거든요.” 희신에게 연이어 술을 권했지만 정작 본인은 맥주 한 잔으로 버티던 과학자가 웃으며 답했다. 진짜라니? 희신은 태양처럼 빛나는 얇디얇은 금박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자기도 진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 내가 다치고 싶어 다쳤나? 따져보면 지구 중력의 문제 아닌가? 공이 떨어졌고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가 되어 굴렀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영향을 받아 자빠졌는데, 뭐, 어쩌라고. 드디어 누군가가 고가의 위스키를 안고 등장했고 사람들이 반색했다. 희신이 벌떡 일어나 짝짝짝짝 박수를 치자 다윤이 말리며 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희신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희신에게서도 진짜가 나올 것이었다. 먹고사느라 거추장스럽게 갖춰야 하는 가짜 마음이 아니라 진짜가.

다음 날 아침 희신은 소주, 맥주, 사케, 위스키가 혼합된 두통에 곤죽이 된 채 일어났다. 뇌수를 따라 벌떼가 윙윙 도는 듯했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시간은 이미 정오였다. 한숨을 쉬며 희신은 다윤이 남긴 길고 긴 메시지를 읽었다. 그렇게 해서 어젯밤 자신이 진짜의 열기에 취해 사람들에게, 특히 감독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를 이해했고 이내 심장이 멎을 듯 완전히 얼어붙었다. 김금희 김금희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후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로 신동엽문학상을, <너무 한낮의 연애>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로 김승옥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동시대 한국 사회의 표상이 되는 독창적인 인물 묘사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밝히고 있다. 식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산문집 <식물적 낙관>, 창경궁 대온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최신작 <대온실 수리 보고서> 등을 완성했다. (VK)

포토그래퍼
정우영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세트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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