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위스키를 음미하는 정대건의 단편소설 ‘각자의 술잔’

2024.10.24

위스키를 음미하는 정대건의 단편소설 ‘각자의 술잔’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각자의 술잔

“인생은 자기 술잔에 주어진 독한 술을 남김없이 비워야 하는 거야.”

엄마가 술 냄새를 풍기며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술잔에 담긴 술은 과연 뭘까 생각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누군 부모를 잘 만나서 샴페인 같은 달콤한 삶을, 누군 독주처럼 쓰디쓴 삶을 살았다. 엄마가 일하는 술집에서 손님과 언성 높이며 드잡이질 하는 모습이 최초의 기억인 아이에게 인생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술잔은 스스로 비워야 한다는 엄마의 말-나중에야 그것이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만큼은 묘하게 위안이 됐다.

“마침내 선배와 술을 마셔보네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수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대학 시절 내내 술 한잔하자는 걸 거절했던 내가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주문하자 수연은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재즈 음악이 흐르고 조도가 낮은 위스키 바의 구석 자리였다. 수연과 잔을 부딪치자 짙은 호박색 술이 잔 속에서 흔들렸다.

“왜 그렇게 나랑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선배가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요.”

수연이 생글 웃었고, 눈매가 반달 모양이 됐다. 어쩐지 수연과 눈을 오래 못 마주치겠기에 잔을 한 번에 비웠다. 거칠게 치고 올라오는 알코올 향에 온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마는 늘 잭 다니엘스를 마시며 달다고 했지만 내게는 그저 40도짜리 쓰고 독한 술일 뿐이었다. 잭 다니엘스가 미국에서는 소주처럼 흔한 주정뱅이들의 술이라는 게 엄마와 참 잘 어울렸다. 내 거친 반응과 달리 수연은 잔을 굴린 후 입안에 술을 머금고 천천히 음미했다.

이런 방식의 추모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와 같이 좀 마셔줄걸. 간경화로 다 망가진 몸으로 아들과 술 한잔하는 게 소원이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역정을 냈다. 늘 자신이 벌인 사건 사고에 술 핑계를 대던 엄마 덕분에 나는 술에 취하는 것을 혐오하게 됐다. 동기에게 “분위기도 맞출 줄 모르는 재미없는 놈” 소리를 면전에서 듣고는 아예 술자리에 가지 않았다.

“여전히 인생은 독한 술잔을 혼자서 비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수연이 물었다.

“내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했었나.” 내가 피식 웃었다.

“그럼요. 저는 선배가 한 말 전부 기억해요.”

수연은 영화 동아리에서 알게 된 후배였다. 당시 촬영 담당이던 내게 수연은 궁금한 게 있다며 따로 연락해 일대일로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다. 동아리방에서 수연은 술을 사달라고 당돌한 얼굴로 여러 차례 말했다. 나는 거절했지만, 수연은 끈기 있었다. “술 한잔 사주세요, 선배”가 통하지 않자 “선배, 술 한잔 사줄게요”로 바뀌었다. 그때도 수연이 내게 품었던 호감을 못 알아챈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끝내 외면했다.

사실 나도 한없이 명랑한 수연에게 마음이 없지 않았다. 수연과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고, 팍팍한 현실을 잠시간 잊게 해줬다. 그러나 졸업 전부터 촬영 아르바이트를 쉼 없이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내게 연애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몇 번을 주저하며 수연의 손 한 번 잡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로 삶의 궤적이 바뀌는 동안에도 수연은 가끔 생일 축하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수년간 연락이 끊겼던 수연과 재회한 건 엄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조문을 온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수연은 어엿한 직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수연은 얼마 뒤 내가 운영하는 외주 프로덕션에 일을 의뢰해왔다. 마치 일에 집중해서 얼른 슬픔을 잊으라는 듯. 프로젝트를 마치고 수연이 한잔하자고 했을 때, 더는 뿌리칠 수 없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술이야.”

두 번째 잔부터 온더록스로 마셨고 취기가 올라왔다. 누군가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또 엄마가 사고를 친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며 자랐던 어린 시절부터 술에 취하는 걸 경계하며 지냈던 20대 이야기까지. 내 이야기를 들은 수연은 혼잣말처럼 “선배도 힘들었겠네요”라고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는 투병 생활을 오래 했어요.”

수연은 아버지가 쓰러진 후 가세가 기울어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했다. 밤샘이 다반사인 광고 회사에서 사흘 만에 퇴근하고 자취방에 돌아간 어느 날, 혼자 울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언제나 명랑하고 씩씩해 보이던 수연이었기에 조금 놀랐다.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쓴 술잔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나는 손을 내밀어 수연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잡고 나면 그 후에는···.

그때 내 시선을 느낀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수연이 내 망설임을 알아채기라도 한 눈빛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정적이 어색해서 잔을 만지작대다가 술을 들이켰다. 식도가 타는 듯 뜨겁던 것도 조금은 무뎌졌다.

“엄마는 마실수록 달다고 했는데, 솔직히 아직도 술맛은 모르겠어.”

“위스키 마시는 법이 정해진 건 없지만요. 바로 넘기지 말고 혀로 아주 부드럽게 입안 구석구석 위스키를 묻혀준다는 기분으로 마시는 거래요.”

수연이 음미하면서 시범을 보였고, 나는 따라 해봤다. 달큼한 바닐라 향이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독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찡그리는 내 표정을 본 수연은 다시 한번 눈이 반달이 되도록 웃었다. 남은 술은 자신이 마시겠다며 내게 콜라라도 마시라고 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엄마가 늘 하던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술잔을 남김없이 비우는 거지. 누가 대신 마셔줄 수 없는 거야.”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내가 약간 놀란 얼굴로 수연을 바라봤을 때, 수연은 예의 그 당돌한 얼굴로 내 잔의 술을 가져가 비웠다.

“독한 술은 좀 나눠 마실 수도 있죠.”

그러고는 내가 미처 뭐라 하기도 전에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내 몫의 독한 술을 책임져야 할 건 나였다. 누군가에게 나의 비참한 삶이 섞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좀 취한 것 같은데. 그러다 실수하겠다.” 나는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선배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수연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고,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뜨거운 숨과 캐러멜 향, 알코올 향이 수연의 향수 냄새와 섞여 가득 풍겼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바 안의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쓴맛 뒤에는 단맛도 있어야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수연의 그 말에 “못 이기겠구나” 하며 웃고 말았다. 내게 주어진 술잔에 대해 생각했다. 수년간 나에게 향했던 수연의 마음과 먼저 다가온 용기에 대해서도. 어쩌면 엄마의 장례식에서 수연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내게 주어진 술잔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몫을 남김없이 비워야 했다. 나는 수연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게 입안 구석구석 혀로 위스키를 묻혀주듯이, 길게 음미했다. 정대건 정대건은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했다. 독립영화 감독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소설 <GV 빌런 고태경>이 2020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아이 틴더 유>, 장편소설 <급류>, 단편소설 <부오니시모, 나폴리>, 에세이 <나의 파란, 나폴리>가 있다. (VK)

포토그래퍼
정우영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세트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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