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음미하는 편혜영의 단편소설 ‘그 골목의 향기’
웅크리는 계절을 받아들이는 데는 위스키 한잔이 필요하다. 그 곁에 소설이 함께하면 이 순간을 사랑할지 모른다. 위스키를 주제로 〈보그〉에 보내온 김금희, 김연수, 정대건, 천선란, 조해진, 장강명, 편혜영, 김기태 작가의 단편만큼은 과음을 권장한다.
그 골목의 향기
고등학교 때 그녀는 한 학기 동안 엄마에게 국어 수업을 들은 적 있었다. 요즘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당시만 해도 규율이 다소 허술했다. 엄마는 언제나 몸을 똑바로 하고 서서 뒤쪽 벽면을 바라보고 수업했다. 간혹 교탁에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는데 교과 내용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저 숨을 돌리는 것이었다. 농담도 없고 교감도 되지 않는 수업은 시종 지루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려 엄마가 교실 밖으로 나가면 대놓고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녀가 국어 교사의 딸인 것은 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부주의한 체육 교사에 의해 알려졌다. 반 아이들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조금 거북해했다. 그녀 역시 이럴 바에야 좀 더 빨리 알려지는 편이 나았으리라 생각했다. 그간 교사인 엄마에 대한 험담을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중에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악담도 있었다. 그나마 듣기에 덜 불편한 말 중에는 괴짜라는 평가가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 같다는 말이어서 교사로서 자질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엄마는 진도와 상관없는 얘기는 아예 하지 않았는데, 딱 한 번 딴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알코올 중독 환자가 나오는 아일랜드 소설을 설명하던 중 잠깐 말을 삼키더니 그곳에 가본 적 있다고 말문을 연 것이다. 부산하던 교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다들 드물게 엄마에게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거기는 골목에서 향기가 나. 위스키 향이.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킥킥 웃었다. 아무도 엄마를 따라 웃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웃기지? 누군가 작게 말했다.
그게 무슨 냄샌데요?
뒤쪽의 누군가 용기 내어 물었다.
그건···.
엄마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교과서를 내려다보며 뜸을 들였다.
당시에는 국어 교사가 엄마라는 게 아이들 사이에 알려지기 전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엄마가 작은 소리로 그건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야,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귀담아들은 건 그녀뿐인 것 같았다. 아이들은 이미 시시하다는 듯 산만하게 몸을 움직여대고 있었다. 엄마가 천천히 그녀가 앉은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으나 이내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교탁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두고 우르르 일어나 화장실이나 매점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는 술병처럼 딱딱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잠시 엄마가 말한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지만 짝꿍이 함께 매점에 가자고 툭 치는 바람에 생각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다음 학기 엄마가 휴직계를 내면서 더는 교실에서 국어 교사인 엄마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1년으로 예정된 휴직 기간이 끝난 후에도 엄마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수술을 하고 고된 항암 치료를 거듭했다. 엄마는 길고 힘든 치료 과정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때 의사로부터 호전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더는 세포의 전이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떴다.
술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혼을 하고 홀로 딸을 키우며 적성에 맞지 않는 교사 생활을 이어가느라 엄마는 자주 술을 마셨다. 간혹 많이 마시는 듯했다. 그녀가 보습 학원이나 독서실에 갔다가 밤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는 늘 똑바로 걸으려 애쓰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몸이 흔들렸다. 엄마는 술을 마시지 않은 척하려고 즉각 빈혈과 두통을 핑계로 댔다. 어느 날 싱크대에서 반쯤 비어 있는 위스키병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그녀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엄마는 몰래 마신 술 냄새를 지우려 향이 짙은 비누로 샤워를 하고 향초를 피워 두고 진한 커피를 마셔왔던 것이다. 엄마의 식사와 수면 상태는 늘 엉망이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건강이 문제가 됐다.
당시는 짐작도 못했지만 결국 마지막이 된 입원 전날, 엄마가 병실에 필요한 짐을 챙기다 말고 한때 술로 시간을 버틴 적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말해주었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엄마가 유난히 술을 마시는 게 그녀에게 고민거리였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 무렵 엄마에게는 의지할 것이 많지 않았음을 이해했다.
한 잔만 더 마시고 싶네.
엄마가 말했다.
이번에 퇴원하면 제일 향이 좋은 걸로 사줄게요.
그녀가 말했다. 엄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편혜영 편혜영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미스터리와 심리 스릴러로 영역을 확장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났다. 대표작으로는 <아오이가든>을 비롯해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소년이로>, <어쩌면 스무 번> 등이 있고,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홀>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7년에는 장편소설 <홀>로 미국 문학상인 셜리 잭슨상을 받았다. 2013년부터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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