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젤의 글렌 마르텡은 더 이상 옷과 신발을 사지 않는다
글렌 마르탱에게 데님이란 디젤이다. 디젤의 2025 봄/여름 컬렉션이 열리기 4일 전, 그를 만나 기분을 물었고, 데님과 정원, 등산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디젤은 데님이었다. 지난 9월 21일 밀라노에서 열린 디젤 2025 봄/여름 쇼장에 들어서자마자 오직 데님만이 눈에 들어왔다. 1만4,800kg의 방대한 데님 조각이 산과 바다처럼 거대한 쇼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AI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키피디아의 데님 항목을 읽고 또 읽더니, 결국엔 이렇게 말했다. “Diesel is denim.” 가히 공감각적인 데님 경험이었다. 쇼 4일 전 <보그 코리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글렌 마르탱(Glenn Martens)이 이야기한 그대로였다. “재활용 데님으로만 쇼장을 꾸밀 거예요. 좌석도 그렇고, 어디로 시선을 돌리든 온통 파란색일걸요.” 이건 굉장히 상징적인 장치였다. 글렌이 온 이후 디젤은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2년 전 재활용 데님 원단만 사용한 ‘디젤 리햅 데님(Diesel Rehab Denim)’ 컬렉션을 발표했고, 재생·유기농·재활용 데님 사용률을 3%에서 57%까지 끌어올렸다. “지금 디젤은 굉장히 강력한 브랜드예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죠. 디젤이 추구하는 메시지는 포용성, 사랑, 존중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일이에요. 디젤은 몇백만 벌의 데님을 판매하고 있는데 그중 50% 이상은 세상을 망치지 않는 깨끗한 제품이라는 점에서 우리 팀이 자랑스럽습니다. 시즌마다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글렌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사실 작업실 전체 분위기가 그랬다. 열정과 희열, 혼돈이 마구 뒤섞인 상태였다. 한쪽에서는 모델들이 피팅을 위해 길게 줄지어 서 있었고 다른 쪽 벽에는 피팅을 마친 모델들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나열된 수백 개가 넘는 옷과 신발, 액세서리 사이를 가로지르며 글렌이 엄청난 속도로 컬렉션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50~60개의 룩이 나올 것 같은데··· 다양한 데님 가공 기법을 사용했어요. 이 상의를 보세요. 가슴 부위만 패브릭이 액체처럼 늘어져 있어요. 정말 매력적인 디테일이죠.” 그 말처럼 가슴 부분은 빈티지 감성의 극단을 달리는 듯 해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미래적이었다. 데님이 아닌 소재도 파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분쇄기에 넣은 것처럼 거대한 프린지가 달린 드레스 앞에서는 우리 모두 잠시 멈춰 섰다. “보통은 프린지를 잘라 밑으로 내리지만 우리는 올렸습니다. 드레스와 재킷 목 주위에 프린지를 배치했어요.”
지난 몇 시즌간 여러 시도를 해왔던 디자이너는 이제 데님이라는 브랜드의 근본에 다시 집중하기로 한 듯 보였다. “제일 좋아하는 피스는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만든 데님입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 더 그래픽적이면서도 질감이 돋보이죠.” 가죽처럼 가공한 1950년대 느낌이 나는 코트도 사실 데님이었고 체크무늬의 테일러드 드레스조차 프린트된 데님이었다. 울 소재에도, 에실로룩소티카와 함께하는 아이웨어에도 데님의 가공 기법을 똑같이 적용했다. 어째서 결국 데님이냐고?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데님 분야에서는 우리가 가장 잘하고 있거든요. 디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재미를 추구하는 브랜드니까요.” 쇼 직전의 묘한 흥분 속에서 글렌 마르탱이 아주 당연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답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아직은 괜찮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쇼도 아니고, 하다 보면 적응된다.(웃음) 물론 하루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루 전에는 헤어·메이크업 테스트, 피팅, 캐스팅, 쇼장 등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마지막까지 확인해야 하니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여러 번 검토를 반복하기 때문에 이변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플랜 B가 있고 하물며 플랜 C까지 준비되어 있다.
이번 컬렉션은 데님이 약 80% 이상이다. 데님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컬렉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맞다. 하지만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디젤이라는 브랜드 자체에서 영감을 받았다. 컬렉션을 구상할 때 출발은 늘 디젤이다. 나는 스토리텔링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보다 브랜드의 가치, 특정한 예술관, 편의성과 실용성 같은 걸 먼저 고려한다.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다른 이들은 물론 스스로를 놀라게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번에도 브랜드 자체에서 출발한 다음 어떻게 하면 데님을 색다르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컬렉션에서 당신 스스로를 감탄하게 만든 아이템을 꼽는다면?
아주 강렬한 디스트로이드 저지. 베이지색이라 속옷이나 스킴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찢어지지 않는 소재에 디스트로이드 디테일을 넣어 올이 풀리게 만들었다. 나는 저지 디자이너가 아니고 테일러링에 기본을 두고 있다 보니 저지의 기술적 측면, 특히 기능성 저지를 다루는 방식을 완벽하게 이해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더 기술적인 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디젤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을 해낸다. 그럴 때 특히 에너지를 얻는다.
지난 시즌에는 쇼 사흘 전부터 준비 과정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전했다. 전 세계의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보그> 인터뷰에서 “이런 컨셉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같은 컨셉을 고수하는데, 역시 ‘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인가?
모든 걸 커튼 뒤에 감춰둘 필요가 없다. 누가 사흘 만에 컬렉션을 베낄 수 있는 것도 아닌데.(웃음) 디젤은 모든 사람과 소통하는 민주적인 브랜드다. 그들에게 막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이건 정직을 추구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쇼 준비 과정을 보여주면서 내가 고생하고 실수하는 모습까지 공개한다. 테스트 과정에서 실수가 제법 나오는데, 꾸밈없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디젤과 잘 어울린다. 우리의 정체성 중 하나는 솔직함 아닌가.
2020년 10월 디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을 때 당시 디젤의 모든 사람에게 ‘디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을 물었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서였다.
4년 전 디젤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난감했다. 이미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그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온 브랜드였으니까. 디젤에서 10년 이상 일한 사람들 역시 당시 디젤의 정체성에 싫증을 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완전히 새로운 걸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돌아보면 창립 당시의 확고한 정체성이야말로 브랜드가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지금까지도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다음부터는 굉장히 쉬웠다. 디젤의 역사를 바탕으로 ‘디젤 바이블’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디젤의 모든 것이 담긴 책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이를 바탕으로 브랜드를 재편한다. 이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이미지에 도달했나?
성공적인 삶을 위한 브랜드라는 것. 당돌함, 즐거움, 섹스, 반항, 팝적인 감성, 디스트로이드 스타일.
정체성을 요약하는 아이템을 그려본다면?
칵테일 파티에 갔다가 술에 취해서 바닥에 드러눕더라도 다림질할 필요가 없는, 그저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놓기만 하면 되는 아름다운 드레스. 그리고 물론 데님! 우리는 럭셔리를 흉내 내지 않는다. 디젤은 럭셔리가 아니라, 럭셔리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결국 당신의 전략은 적중했다. 지금 사람들이 디젤에 열광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여기는데, 첫 번째는 접근성이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디젤은 민주적인 브랜드다. 가격도 합리적이며, 누구나 쉽고 눈에 띄는 방식으로 패셔너블해질 수 있는 아이템을 선보인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니까. 디젤과 럭셔리 브랜드는 결정적인 대상이 다르다. 예를 들어, 디올은 정말 멋진 브랜드지만 아름다운 여성을 주제로 하지 않나. 심미적 관점에서 한 가지 인간상에 철저히 부합하는 실루엣을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패션에 집중한다. 특정한 하나의 미감을 표현하기보다 누구나 입을 옷을 만든다. 물론 런웨이에서는 룩을 강조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실루엣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이다.
‘패셔너블하다’는 말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10년 전이라면 다른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만 나는 이제 40대에 들어섰고 왜 패션을 시작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내게 패셔너블하다는 건 에너지를 준다는 의미다. 누구나 본인이 원하는 모습이 있다. 누군가는 강해 보이고 싶을 거고 어떤 사람은 진지한 이미지를 원할지 모른다. 모두 자신이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또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런 각자의 개성을 발전시키고, 또 즐기도록 만드는 게 옷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기능이라고 믿는다. 내가 옷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다.
창작의 관점에서는?
유머 감각을 가질 것. 그리고 스스로를 감탄하게 만들 것. 폴로 셔츠 같은 걸 새롭게 발명하려는 게 아니라 기존의 폴로 셔츠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뭔가 다른 걸 시도하려고 한다. 물론 진정성을 담아서. 나는 그런 유의 디자이너다.
사람들이 디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개성이다. 이건 브랜드 자체의 독특한 컨셉이자 글렌 마르탱 당신 개인의 캐릭터에도 해당하는 얘기다.
지난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길에서 나를 보고 소리 지르는 사람을 발견한 적 있다. 물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꽤 있지만 소리를 지를 정도로 좋아하는 누군가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웃음) 사람들이 내 작업에 끌리는 이유는 내가 패션을 상당히 진지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제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근거를 고민하고 컨셉을 구상한다. 그리고 그걸 즐겁고 자유롭게 한다. 옷을 만드는 데 매우 진지할지 몰라도 절대 무게를 잡지 않는다. 나는 거만 떨고 싶지 않다. 패션은 즐거워야 한다.
그렇다면, 글렌 마르탱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의 언어로 소개한다면?
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름 전에는 2주간 등산을 다녀왔다. 백팩을 메고 캠핑도 했는데 정말 행복했다. 한국에 가는 것도 좋아한다. 친구,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베니스에서 오페라를 보는 것도 즐기며, 가끔은 평범하게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지 않고 삶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그게 내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패션과 등산 외에도 열정을 쏟는 일이 있나?
솔직히 말하면, 없다. 지난 4년간은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었지만 올해부터는 조금씩 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파리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의 작은 집을 사려고 계획 중이다. 정원 가꾸기를 정말 좋아한다. 오히려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쇼핑이다. 필요한 옷은 이미 있다. 옷과 신발을 더 이상 사지 않는다니, 내가 생각해도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바람직한 건 아닌 것 같다.(웃음)
옷과 신발을 사지 않는다면, 최근에 구매한 물건은 뭔가?
담배. 음식, 담배, 술 외에 최근에 산 물건이라면··· 텐트와 침낭 같은 등산 장비 정도다. 아, 얼마 전 오클리 선글라스를 샀다! 선글라스는 매번 새로 사야 한다. 한 시즌에 3개씩은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린다.(웃음)
지난 6월 <A 매거진>을 직접 큐레이팅했다. 만약 <보그 코리아>를 큐레이션한다면 어떤 이야기와 이미지를 공유하고 싶나?
<A 매거진>에서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했다. 만약 <보그 코리아>에서 그런 요청이 온다면, 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의도가 있을 테니 비슷한 방식으로 출발할 것 같다. 하지만 훨씬 행복한 주제를 다룰 것이다. <A 매거진>에서는 나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내가 자란 도시인 벨기에의 브루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브루게는 굉장히 멜랑콜리한 곳이다. 온종일 비가 오고, 어두침침하고, 고딕 건축물이 가득하다. 무척 아름답지만 슬픈 느낌도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물론 서울에서만 지냈지만, 훨씬 다채롭고 즐거웠다. 전혀 우울한 곳이 아니었다. 파티도 어마어마했다.(웃음)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뭘 할 건가?
할 일이 많다. 에실로룩소티카와 함께 만드는 아이웨어 라인에 대한 스피치를 준비해야 하고 15년 지기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우르시나 기시(Ursina Gysi)와 룩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네그로니 칵테일을 마시고 자야지.(웃음)
쇼가 끝난 다음에는?
늘 그렇듯 미친 듯이 파티를 즐길 거다. 전 세계에서 쇼를 보러 오는 친구들이 많아서 쇼 다음 날에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 파리로 가서 그 집을 볼 예정이다. 아직 구입하진 않았지만 직접 가서 확실히 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내년에는 여름 내내 그 집 정원을 가꾸고 싶다. 장미 같은 것도 심고! (VK)
- 에디터
- 권민지
- 포토그래퍼
- PETER ASH LEE
- COURTESY OF
- DIE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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