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멜리아상 첫 수상자, 류성희 미술감독
지금 미술·건축·클래식·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뜨거운 장면을 〈보그〉가 정조준했다. 태피스트리와 조각이 부흥 중인 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애니 모리스의 한국 첫 개인전을 비롯해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연결한 더 헨더슨에 안착한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세계를 흔드는 지금, 한국 클래식계의 숨은 공로자인 미숙 두리틀,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자 제정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인 류성희 미술감독까지, 문화계는 추수와 동시에 씨를 뿌리는 중이다.
한기가 정점에 달한 순간 피어나는 꽃. 동백꽃을 사랑했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말을 되뇌며 영화계의 한계를 돌파해온 류성희 미술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와 샤넬이 올해 신설한 첫 번째 까멜리아상의 주인공이다.
지난 10월 2일, 2024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샤넬 아트 & 컬처 글로벌 총괄 야나 필(Yana Peel)이 부산의 시화이기도 한 동백꽃을 얼기설기 엮은 꽃다발을 건넸다. 대상은 미술감독 류성희. 그가 바로 부산국제영화제와 샤넬이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 예술에 기여한 바를 기리고자 올해부터 수여하게 된 까멜리아상의 첫 번째 수상자다. 그로부터 3일 뒤 부산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스페셜 토크’를 마친 류성희가 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객석을 메웠던 수많은 여성이 그를 뒤따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과잠’을 걸치거나 볼캡을 눌러쓴 학생들이었다. 그날 류성희는 1시간가량 더 머물며 자신을 에워싼 팬들의 사인 요청에 화답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지금은 우리 팀은 물론이고 미술 팀의 70% 이상이 여성이지만 제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거든요. 여성 미술감독 하면 떠오르는 분이 한 분 정도밖에 없었죠. 특히 저는 장르 영화를 좋아했는데 여자들이 진입하기 훨씬 어려운 세계였어요. 장르물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기였거든요.” 류성희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다정하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홍익대학교에서 20대의 거의 모든 시간을 도예에 쏟아부은 뒤 돌연 미국으로의 영화 미술 유학을 결심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 <엘리펀트 맨>(1980)의 영향이 컸다. 추한 외모에 가려진 순수한 영혼을 포착하는 영화의 시선도 좋았지만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진의 정체는 더 궁금했다. “이걸 만든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왜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는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2시간 만에 관객의 시선을 완전히 바꿔놓는 영화의 예술에 완전히 매료된 순간이었죠.”
새로운 비전을 품고 호기롭게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영화 전공이 아닌 그에게 영화계로 향하는 문은 지나치게 좁았다. 관계자에게 어렵사리 포트폴리오를 건네도 돌아오는 건 “나중에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하게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합시다”라는 식의 막막한 대답뿐이었다. “처음 1년 반 정도는 그냥 기다렸어요. 딱 한 번의 기회만 온다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된 첫 영화는 송일곤 감독의 <꽃섬>(2001). 그 후 류성희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2003년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를 시작으로 봉준호와 박찬욱의 수많은 대표작을 완성했다. “강렬하고, 난폭하고, 거칠고, 이런 건 무언가를 설명하는 용어일 뿐이잖아요. 남성의 것도, 여성의 것도 아니죠. 여자들도 군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고요.” 한겨울에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여성의 성공은 우연으로 폄하되던 시절을 지나 마침내 장르물에서 두각을 드러낸 그가 맞닥뜨린 것은 ‘류성희는 장르 전문’이라는 또 하나의 편견이었다.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관문이 나타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류성희는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말을 되뇌었다. “‘벽을 깨부수는 데 집중하지 말고, 그 벽을 문으로 만들 생각을 하라.’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등장한 말이죠. 벽을 맞닥뜨리면 회의와 좌절감에 빠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시간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개성을 갈고닦는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하더군요.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라는 두 여성이 중심에 놓인 <아가씨>(2016)는 장르물에 익숙한 제게 너무나도 낯설고 어려운 과제였지만 이제는 그 어떤 작품보다 자랑스럽고 ‘나’다운 작업으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2016년, 류성희는 <아가씨>로 제69회 칸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기술 아티스트에게 수여되는 벌칸상을 수상했다.
류성희의 든든한 동반자인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이 무대에 깜짝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로 처음 인연을 맺은 류성희와 정서경은 최근에는 드라마 <작은 아씨들>(2022)을 통해 또 하나의 성공담을 함께 써 내려갔다. 소중한 친구의 의미 있는 순간을 축복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정서경이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사실 저에게는 살면서 여성이기에 견뎌야 했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거든요. <아가씨>는 류성희 미술감독님께서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가 아닌 정서경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밖에 없던 저를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에요. 제가 여성으로 꿈꿀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세계가 그 안에 전부 담겨 있더라고요.”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라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세트”를 만들어낸 류성희 감독에게도 감춰둔 여성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어 설레고 행복했던 작업이었다. <작은 아씨들>도 마찬가지. “여러 여성 캐릭터가 엄청난 야망을 품고 위기를 돌파하는 장르물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정(서경) 작가님이 그런 면에서는 아주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데, <작은 아씨들>을 통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평범한 자매들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서경의 설득으로 드라마라는 신세계에 무사히 안착한 류성희는 이후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에서 비틀린 욕망을 환상적인 세계로 그려냈으며 2025년에는 아이유, 박보검이 활약하는 <폭싹 속았수다>로 또 한 번 드라마 관객을 매혹할 예정이다. 모든 불안 요소를 뿌리치고 모험을 감행한 두 여성이 일궈낸 세상. 이는 <아가씨>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류성희와 정서경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1시간 넘게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사 그 자체인 류성희의 발자취를 따르며, 객석에 모여 앉은 이들의 가슴은 쉽게 뜨거워졌다. 하지만 샤넬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함께 피워낸 동백꽃은 이제 겨우 첫해를 맞이했을 뿐이다. 해를 거듭해 피어난 동백꽃은 무리를 이루고, 나아가 풍성한 풍경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한국 영화 너무 멋지다’는 평을 듣는 SF나 판타지 영화도 나와야죠. 그러려면 지금 이 순간도 밑바탕이 되어 위대한 무언가의 시작이 되어야 하고요. 저 역시 과정에 놓인 사람으로서 그런 사명감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걸어가겠습니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포토
- Courtesy of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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