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랭의 새 시대를 개척 중인 ‘피터 도’와의 만남
미니멀리즘은 이제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 철학이다. 헬무트 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터 도는 옷의 기능과 의미에 몰두하며 미니멀리즘을 새롭게 정의한다.
헬무트 랭(Helmut Lang)은 1990년대 패션계를 강타하며 실용성과 구조적 디자인, 날카로운 미니멀리즘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기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절제미를 보여주었는데, 2024 S/S 컬렉션부터 헬무트 랭을 이끌고 있는 피터 도(Peter Do) 역시 이런 미학적 가치를 반영하며 브랜드를 주도하고 있다. 피터 도의 디자인은 헬무트 랭의 실용적인 접근을 재해석해 날렵한 실루엣이 돋보이며, 매끈한 라인과 구조적인 테일러링을 통해 이 브랜드의 미학적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한다. 두 디자이너 모두 패션을 단순한 옷 이상의 예술로 바라보고 시대를 초월하는 스타일을 창출하는 점에서 긴밀히 연결된다. 헬무트 랭의 새 시대를 개척하고 있는 피터 도를 서울에서 만났다.
2024 S/S 시즌부터 헬무트 랭을 이끌고 있다. 헬무트 랭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본인의 언어로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나.
헬무트 랭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나에게 미니멀리즘은 ‘적지만 나은 것’이 아니라, ‘적게 가질수록 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에 가깝다. 베트남에서 자란 경험이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했고,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헬무트 랭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타임리스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 부분에 집중했다. 수량이 많지 않고 디자인이 과감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단 하나로도 일상에서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디자인, 이것이 바로 내가 헬무트 랭에서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다.
당신은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에서 자랄 때는 패션 산업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배운 뜨개질 덕분에 적은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나의 디자인 철학도 옷 하나하나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창작을 위한 옷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진짜 의미 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
헬무트 랭의 지난 컬렉션 중 당신에게 가장 영감을 준 것은.
헬무트 랭의 모든 컬렉션이 나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감을 줬다. 나는 헬무트 랭의 작업을 보며 그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디자인은 해마다 조금씩 변화하며 진화해왔다.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헬무트 랭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디자이너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것을 더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헬무트 랭에 합류한 후 가장 도전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두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장 큰 도전은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는 것이다. 헬무트 랭에 합류한 후 처음 세 달 동안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로고, 패키징, 팀 구성까지 모두! 첫 쇼가 9월이었는데 바로 직전이 휴가철이어서 작업을 진행하기가 정말 어려웠다.(웃음)
헬무트 랭의 유산을 대하는 당신만의 특별한 태도는.
헬무트 랭의 디자인은 1990년대 초 뉴욕에서 시작됐다. 당시 파리는 화려하고 극적인 꾸뛰르 스타일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헬무트 랭은 간결하게 잘 만든 옷의 가치를 보여줬다. 요즘 우리가 입는 스타일은 대부분 헬무트 랭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젊은 세대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에게 헬무트 랭의 유산을 다시 소개하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해 보여주고 싶다.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2018년과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2018년에 ‘피터 도’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모든 디테일에 신경 쓰느라 잠을 못 잤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일을 편집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믿는 것에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을 찾았다. 디자이너로서 조금씩 성장하면서 불안감이 줄고, 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일하게 된 것 같다.
당신이 이끌고 있는 두 브랜드 ‘피터 도’와 ‘헬무트 랭’ 사이에서 창의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두 브랜드를 완전히 분리해서 일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각각의 팀이 다르기 때문에 그 팀과 함께할 때는 그 브랜드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피터 도’는 직감에 충실한 브랜드라면, ‘헬무트 랭’에선 늘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두 브랜드가 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컬렉션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피팅(Fitting)이 제일 중요하다. 피팅 모델과의 작업이 내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다. 캐스팅, 음악, 쇼 모두 중요하지만, 피팅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신의 디자인은 성별의 경계가 없다.
젠더 플루이드는 내게 매우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사람들을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그들의 자유로운 표현을 존중하고 싶다. 그들에게 본인의 스타일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뉴욕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오늘과 내일이 다를 수 있는 도시라서 표현의 자유가 무한하다. 뉴욕이 지닌 자유로움은 내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헬무트 랭이 뉴욕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라는 것 역시 나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2025 S/S 뉴욕 컬렉션에 참여하지 않았다.
2025 S/S 컬렉션을 런웨이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잠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쇼를 선보이는 것보다 제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원단과 디자인에 신경을 더 쓰고 싶었다.
서울을 방문한 이유는.
헬무트 랭의 고객과 직접 만나기 위해 잠시 서울을 찾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아쉽지만, 다음에는 서울에 더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헬무트 랭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젊은 세대와 연결되는 것. 헬무트 랭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여주고, 그들에게 이 브랜드가 지닌 고유의 가치를 천천히 전하고 싶다. (VK)
- 에디터
- 신은지
- 포토그래퍼
- 진소연
- 모델
- 박가은, 동리앙
- 헤어
- 이혜진
- 메이크업
- 안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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