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의 제왕, 모리스 루셀을 논픽션 조향사로 만나다
논픽션의 페르소나는 모리스 루셀의 오감으로 탄생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페르소나에서는 머스크 향이 난다.
지난 5월, 프레데릭 말을 인터뷰했을 때 그가 모리스 루셀(Maurice Roucel)에 대해 말한 게 떠올랐다. “그의 작업은 굉장히 존재감이 커요.” 사실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프랑스인이라는 것과 그때의 보디랭귀지(다소 과장된)를 돌이켜봤을 때 약간의 냉소도 있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모리스 루셀의 향수를 맡으면 고요하고 끝없이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 든다. 이 완벽주의자의 결과물은 복작거리는 우리의 삶 따윈 400억 광년에 이르는 우주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하고 하찮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향은 우주에 무수히 흩뿌려진 별과 행성처럼 고요하면서도 신비롭게, 때로는 초속 30만km로 이동하는 빛처럼 강렬하고 빠르게 뇌리에 박힌다.
논픽션 성수에 진열된 ‘더 베이지’와 ‘더 그레이’를 맡았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더 베이지와 더 그레이는 모리스 루셀이 논픽션을 위해 조향한 향수다. 페르소나를 키워드로 각기 다른 두 가지 머스크 향 출시를 구상하던 차혜영 대표는 지인에게 모리스 루셀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2년 전, 그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모리스에게서 다음 주에 파리로 와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어요. 잡혀 있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사무실과 레스토랑 등 여러 장소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향수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함께 브런치를 먹다가 모리스가 물잔에 커피를 몇 방울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죠. ‘더 베이지에 이런 컬러가 몇 방울 들어가면 더 그레이가 될 수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차혜영은 논픽션이 진실한 내면의 자신과 보내는 시간을 위한 브랜드라고 설명했다. 그 말은 우리 모두가 또 다른 자아, 즉 페르소나를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통 노트인 머스크는 빛과 그림자, 낮과 밤처럼 더 베이지와 더 그레이라는 상반된 모습으로 변주한다. “모리스가 완성한 향을 맡고 머릿속에 떠오른 컬러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아주 연하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베이지, 가죽의 코냑 컬러와 푸른 톤이 미세하게 감도는 신비로운 그레이였죠.”
모리스 루셀은 론칭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논픽션 성수 매장을 방문했다. 그는 짙은 그레이 수트를 입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고, 차혜영은 주름이 촘촘하게 잡힌 베이지 컬러의 버튼업 드레스 차림으로 그를 맞았다. 그는 차혜영을 ‘마담 샤’라고 불렀다. 그녀의 성인 ‘차(Cha)’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했는데 지난 2년 내내 그렇게 발음한 듯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사진 속 진지한 모습 그대로지만 스스로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타입은 아니다. 유쾌했고, 재미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일 외엔 조금 과하게 단조로운 삶을 사는 과학자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작업물은 존재감이 큰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머스크 노트 향수로 잘 알려져 있죠. 논픽션의 향수는 그동안 작업해온 머스크 노트 향수와 어떻게 다른가요?
MAURICE ROUCEL(MR) 오랫동안 머스크를 사용해왔어요. 천연 머스크와 합성 머스크 둘 다요. 동물에게서 추출한 천연 머스크는 멸종 위기종 보호를 위해 채집이 금지되었기에 화학적인 과정을 통해 제조한 것이 합성 머스크입니다. 화이트 머스크라고도 불리죠. 현재는 화이트 머스크도 진짜 머스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동물성 성분을 사용하지 않았고 배설물이나 분비물 특유의 불쾌할 수 있는 냄새를 배제해 좀 더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원하는 만큼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논픽션의 더 베이지와 더 그레이에서 머스크는 기둥 역할을 합니다. 향이 오래 지속되게 하면서 부드러움을 주죠. 나는 항상 부드러움을 추구합니다. 그게 내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내가 만든 향은 관능적이고 편안하면서 어떤 면에서 본질에 가깝죠. 나는 향수가 메시지라고 여겨요. 메시지는 분명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하죠. 이번 작업은 머스크의 부드러움을 통해 사람들과의 이어짐을 추구했습니다.
하나의 브랜드를 위해 머스크를 공통분모로 두 가지 서로 다른 향을 만들었습니다. 조향사로서 이 두 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MR 더 베이지는 더 투명하고, 꽃 향이 나고, 10대들처럼 젊습니다. 부드럽죠. 반면 더 그레이는 대담하고 성숙해요. 육감적이고, 어둡습니다. 향으로 설명하자면 살짝 스모키하고 가죽 향도 약간 느껴져요. 시프리올(Cypriol)이라는 원료 때문인데요. 인도에서 유래한 원료로 오우드(Oud)와 비슷해요. 인센스 스틱을 피울 때 나는 향과도 유사하죠.
차혜영 대표는 무슈 루셀에게 전달한 브리프에 어떤 내용을 담았나요?
CHA HAEYOUNG(CHY) 너무 구체적인 가이드나 제한을 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논픽션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를 구성했죠. 이름에 담긴 의미와 불규칙한 반점 패턴이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빛을 상징한다는 것, 빛과 그림자의 대조, 페터 춤토르의 발스 온천에서의 휴식 등등. 처음부터 두 가지 서로 다른 머스크를 구상했고 더 베이지의 키워드로 빛, 자연스러움, 밝음, 가벼움을, 더 그레이는 빛과 대조되는 그림자라는 단어를 사용해 좀 더 강렬한 향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무슈 루셀은 페르소나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합니다.
MR 마담 샤와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는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그 단어를 듣고 내가 떠올린 건 한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두 자아였죠.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요. 기분은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고,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기분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슬픈 날도 있고, 어떨 땐 공격적이지만 친절할 때도 있고. 하지만 여전히 같은 사람이죠. 이중인격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다른 인격을 표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보통 브리프를 향수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MR 대부분의 브리프는 의뢰한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 적힌 한 장의 종이입니다. 사실 향수를 단어로 표현하는 건 어려워요. 그래서 거기 적힌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죠. 향수는 그 자체로 말을 합니다. 그 향을 맡는 사람의 영혼과 육체와 마음과 직접 소통하죠. 향수를 맡은 사람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혹은 그 향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전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브리프를 받으면 혼자 작업실에 앉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며칠이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향으로 구체화한 다음 포뮬러를 작성하죠. 작성한 포뮬러에 따라 제조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합니다. 어떨 땐 금방 되기도 하지만 어떨 땐 오래 걸리기도 하죠.
금방은 얼마나 짧은 시간이고, 오래 걸린 건 얼마나 긴 시간인가요?
MR 빠를 땐 30분 만에 해치운 적도 있어요! 내 기억에 가장 길 때는 5, 6년까지 걸린 적도 있죠. 30분이 걸렸을 땐 의뢰한 고객을 빠른 시간 안에 만족시켜야 했을 때입니다. 디올이나 샤넬 같은 큰 회사와 일할 때도 오래 걸리는 편이죠. 오, 에르메스는 정말 오래 걸려요! 논픽션과의 작업은 브리프를 받고 최종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1년에서 1년 반 정도 걸렸답니다.
그렇다면 논픽션의 이전 향수와 비교하면 빠른 편인가요, 오래 걸린 편인가요? 결과물에 대한 평가도 궁금합니다.
CHY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훨씬 더 짧은 기간 내에 출시한 향도 있고, 3년 전에 시작했는데 미완성인 작업도 있어요. 더 베이지의 경우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화이트 머스크를 표현했다고 봐요. 아무래도 머스크가 묵직하게 느껴지다 보니, 플로럴 향을 미세하고 은은하게 가미하면서 균형을 잡는 과정이 쉽지 않았죠. 포기하지 않고 출시를 6개월가량 미루면서 이뤄낸 결과물이라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듭니다. 무슈 루셀도 본인 작업 중 걸작이라고 언급할 정도니 시간이 지나도 오래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이제 개인적인 질문을 해볼게요. 무슈 루셀은 화학자 출신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향수 제조에 관심이 없었죠.
MR 맞아요. 얘기하자면 꽤 긴데, 난 항상 과학에 매력을 느꼈어요. 물리학, 천문학, 핵물리학 등 빛의 속도나 우주의 크기,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유기화학에서 화학물 합성을 연구하게 됐어요. 의약품이나 향수 제조에 필요한 화합물을 만드는 일이죠. 원료를 분리해내는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라는 분야에 특화돼 있었고, 1973년 당시에는 이 기술이 향수 제조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군 제대 후 스물세 살 때 조향사 앙리 로베르에게 채용돼 샤넬의 화학 연구실에서 그 기술을 향수 제조에 활용하면서 처음 발을 들였죠.
그 전까지 향수에 대한 경험이라곤 열네 살 때 산 디올 ‘오 소바주(Eau Sauvage)’ 정도가 전부였어요. 그땐 다들 그 향수를 사용했고 나도 그 향을 좋아했지만, 여자애랑 키스할 때 매력적으로 보이려는 것 외에 큰 의미는 없었죠. 그래서 샤넬에 처음 입사했을 때도 사람들이 작은 종이 조각을 코에 대고 킁킁대는 걸 보면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저게 가능한 건가?’라고 생각했답니다.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호기심이 생겼고,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특별한 기분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독학으로 향수 제조하는 법도 익히게 됐고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전문 기관에서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직접 발견하고 알아낸 건 쉽게 잊지 않는다는 거예요. 글이나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과 달리 말입니다.
자신이 만든 향수에 본인의 캐릭터가 반영되어 있나요?
MR 기본적으로 내가 만든 모든 향수에 내 캐릭터가 반영돼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없다면 창의적일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격 수양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격을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바뀐다면 내 노트도 바뀔 겁니다. 향수를 만든 사람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면 그 사람이 만든 향수도 흥미롭지 않겠죠. 그리고 흥미로운 향수를 만들기 위해 그 향수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 아이디어를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화학구조에 대해 고민합니다. 기술적인 과정이고, 필요한 과정이에요. 내가 원하는 정도의 우아함을 향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그 기술이 필요하니까요. 패션과 다르지 않아요. 무슈 디올과 무슈 생 로랑이 만든 옷이 서로 다른 것처럼 내가 만든 향수에는 남과 다른 내가 담겨 있죠.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요?
MR 예전에 과일 향이 나는 향수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과일 향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튼 사과 향이 나는 ‘비 딜리셔스(2004년에 론칭한 DKNY의 아이코닉한 향수)’를 만들었죠. 왜 사과였느냐면, 당시 난 뉴욕에 머물고 있었고 뉴욕의 별명이 빅애플이거든요. 하지만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 대신 나의 프렌치적 취향으로 표현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을 정도로 대담한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죠. ‘구찌 엔비’도 떠오르는군요. 샹파뉴 지방에 갔을 때 포도나무에 열린 아주아주 작고 섬세한 꽃에서 영감을 얻은 향수입니다. 단 며칠 동안 꽃을 피워서 개화 시기를 잘 맞춰야만 보고 맡을 수 있죠. 그 꽃을 발견하고선 정말 흥분했어요. 기술이나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감성과 후각에 의지해 만든 향수로, 내 캐릭터가 잘 반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슈 루셀, 마지막으로 향과 관련된 가장 로맨틱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세요.
MR 내 아내가 떠오르게 하는 향이죠. 지금은 더 베이지예요. 사용한 지 1년 정도 됐을까? 그러니까 지금은 더 베이지를 맡을 때 내 아내 그리고 마담 샤를 떠올리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논픽션의 다음 향수 프로젝트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나요?
CHY 사실 다음 조향사와 만나기 위해 며칠 뒤에 프랑스로 향합니다.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프로젝트죠. 그 이상은 비밀이에요.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진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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