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위대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 “연기는 저를 지치게 하지 않아요”

이자벨 위페르. 그 이름을 이룬 음절마다 영화의 역사가 하나하나 새겨진다. 전설의 그녀가 발렌시아가를 입고 경기도 파주의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서서 따뜻한 커피와 라면을 부탁했다. 라면이 생애 가장 우아하게 불리는 순간.

패션 화보

위대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 “연기는 저를 지치게 하지 않아요”

이자벨 위페르. 그 이름을 이룬 음절마다 영화의 역사가 하나하나 새겨진다. 전설의 그녀가 발렌시아가를 입고 경기도 파주의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서서 따뜻한 커피와 라면을 부탁했다. 라면이 생애 가장 우아하게 불리는 순간.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가 <보그 코리아> 카메라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악수를 건넬 때부터 촬영이 끝날 때까지, 모든 순간이 영화처럼 기록되었다.

연극 무대를 위해 내한한 대배우는 <보그 코리아> 화보 촬영을 위해 일정을 하루 앞당겼다. 발렌시아가는 그녀를 위한 2025 스프링 컬렉션 의상을 공수해 한국으로 보내는 수고를 자처했다.

커다란 상자에 단 한 벌씩 포장해 전달한 꾸뛰르 드레스. 검정 벨벳 소재 위로 하우스에서 지금껏 선보였던 각종 주얼리를 장식해 아이덴티티와 화려함을 동시에 갖췄다.

두꺼운 인조 모피 재킷에 검정 선글라스와 미니 드레스, 악어가죽 엠보싱을 더한 ‘로데오’ 백을 들고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하이힐 부츠를 신었다. 가장 트렌디한 발렌시아가 의상을 입고 ‘서울숲’이라 적힌 버스 정류장 표지판에 기대선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이 그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시어링 재킷을 입고 다양한 참 장식이 돋보이는 ‘로데오’ 백을 껴안은 위페르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또다시 새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몸에 달라붙는 메탈릭 드레스에 풍성한 인조 모피 재킷을 두르고 등장한 위페르에게 모두가 환호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사진에서 스토리가 느껴지는군요.” 절제된 연기로 유명한 위페르는 화보 촬영에서도 과장 없이 필요한 만큼 강약을 조절했다. 그 과정은 정적이면서도 힘이 넘쳐흘렀다.

위페르가 착용한 꾸뛰르 드레스는 상하이 푸동 미술관(Museum of Art Pudong)에서 선보인 2025 스프링 컬렉션의 클로징 룩. 하우스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으로, 10년 이상 된 분홍색 비닐봉지를 모아 제작한 재활용 드레스다. 깃털 역시 수작업으로 재단한 조각을 와이어로 연결한 것.

“발렌시아가는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도 신기하게도 단순하다는 특징이 있죠. 불필요한 디테일 없이 간결해요.” 2023년부터 발렌시아가 앰배서더로 활약 중인 위페르는 하우스 최초의 앰배서더이기도 하다.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위페르의 굳게 다문 입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나를 흥분시키고, 무엇이 내 안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매우 본능적인 수준에서 이번 컬렉션을 만들었습니다.” 뎀나(Demna)는 언제나 고음과 저음의 교묘한 충돌을 통해 좋은 맛과 나쁜 맛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거칠고 투박한 중장비 옆 아름다운 꾸뛰르 드레스를 입은 위페르처럼.

이자벨 위페르의 내한 소식에 티켓은 5분 만에 매진되었고, 90분간 홀로 무대를 가득 채운 위대한 배우의 열연은 관객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냈다. 그녀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정교한 연기로 우리를 감동시킬지 기대되는 이유. 중요한 건 그녀는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룩을 만들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2025 스프링 패션쇼를 마친 뎀나가 말했다. "그냥 그런 실루엣을 좋아하고, 그런 옷이 입고 싶고, 그렇게 입은 여성들을 보고 싶은 거죠. 그 이면에 합리적인 이유는 정말 없어요."

위페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페셔널했다. 하이힐은 물론 노출이 있거나 입기 어려운 의상까지 모두 “문제없다”고 답했다. 니삭스와 스트랩 샌들이 붙어 있는 디자인의 트롱프뢰유 슈즈까지, 그녀가 소화하지 못하는 패션은 없다.

빈티지한 워싱을 더한 봄버 재킷과 찢어진 디테일의 타이츠 팬타 슈즈, 옆에 놓인 커다란 ‘벨 에어’ 백까지.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만든 것만 같다.

“이게 훨씬 흥미로워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 일부를 가린 채 안경 너머 두 눈만 보이는 컷을 두고 위페르가 말했다. 사진을 보는 감각마저 현대적이고 위트가 넘친다.

추운 가을밤 핫 팩에 의지하며 늦은 시간까지 피곤한 내색 하나 없이 촬영을 함께 한 이자벨 위페르에게 한국식 배우 의자를 건넸다. “뭐라고 쓰였죠?” 당신 이름을 한글로 수놓은 것이라 답했다. “오! 마음에 들어요.”

위대한 이자벨 위페르.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이자벨 위페르라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데뷔 후 100편 넘는 영화에 출연했으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칸국제영화제(1978년, 2001년)와 베니스국제영화제(1988년, 1995년)에서 두 번씩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칸에서는 심사 위원장을 맡았으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수상 내역을 주저리주저리 열거하는 것보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 한 장면이면 왜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당연한지 충분히 설명된다. 그리고 그것이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라면 이자벨 위페르가 <보그> 촬영을 위해 방문한 파주로 당장 달려오고 싶을 거다.

기온이 뚝 떨어진 10월 말 저녁, 스태프 모두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긴장해 있었다. (게다가 스튜디오 한쪽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이자벨 위페르는 그와는 상반되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들어서 모두에게 악수를 청했다. 작고 매끄러운 손은 날씨 때문에 다소 차가웠다. 그녀는 워싱이 많이 들어간 청 재킷에 야구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신발은 발렌시아가 스니커즈. “걷는 걸 좋아해 운동화를 즐겨 신어요. 평소 편한 옷차림을 선호하죠.” 그녀가 라테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실제 그녀는 아메리카노와 우유를 따로 달라고 한 뒤 직접 섞어 마셨다. “저만의 비율이 있거든요.” 그리고 부탁한 특별 메뉴는 ‘라면’. 스튜디오가 외진 곳에 있는 탓에 배달하는 사이 면발이 많이 불어 안타까웠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발렌시아가 튜브 톱 드레스를 입고 야외 버스 정류장에서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그녀를 보며 코트 차림의 스태프는 걱정이 커져갔다. 10여 벌을 갈아입으며 촬영하는 동안 그녀는 한순간도 춥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온통 멋진 결과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줍게 건넨 핫 팩을 받아 들며 “세상에! 이런 멋진 물건이 있었군요”라고 감탄했지만 시선은 자신의 사진이 올라오는 모니터에 고정됐다. 분홍색 케이스의 휴대폰을 들고 한 컷 한 컷 담아내며 사진가와 의견을 나눴다. 자신이 화면에 어떻게 비칠지 잘 아는 거장이지만 한 컷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꼼꼼히 모니터링했다.

재미있는 점은 완벽주의 성향이면서도 새로운 도전에는 열려 있다는 것. “미지의 세계에 두려움이 없거든요.” 화보 촬영을 위한 스태프를 구성할 때도 <보그>에 많은 결정권을 주었는데, 그녀 입장에서 보면 신인이나 다름없는 사진가나 다른 스태프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말 멋진 작업이었어요. 모두 여러분 덕분이죠.” 그녀는 우아한 프랑스 악센트로 자주 스태프를 추켜세웠다. 거절 또한 우아하고 단호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달라는 주문에 그녀는 단번에 “아뇨, 저는 영화에서만 연기합니다”라고 했지만 세상에, 그녀의 평소 눈빛, 걸음걸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마저 영화적이다.

밤 10시, 모든 촬영을 끝낸 이자벨 위페르가 어수선한 케이터링 푸드 중 당근 스틱을 골라 먹으며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마주한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윤기 나고, 허리는 꼿꼿하다. 일정이 끝날 때까지 옹색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배우. 무슨 질문을 던지든 그녀는 가벼운 미소로 답변을 마친다. 아차산을 등반하면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 얘기를 할 때면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긴 했지만.

밤 11시. 스튜디오를 나와 논밭을 바라보며 택시가 잡히길 기다렸다. 우아한 위페르의 토끼 굴에 들어갔다 현실로 온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며칠 뒤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한국 무대에 올라 관객이 탈진할 정도의 넘치는 에너지로 속사포처럼 대사를 쏟아내는 그녀를 보자 우리의 만남이 더 아련하게 느껴졌다.

2011년 방한해 <보그 코리아>와 인터뷰를 했어요. 예술가 70여 명이 촬영한 당신의 사진전이 한국에서 열리고 있었죠.

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방한 중에 홍상수 감독을 만났기 때문이죠. 그 전에 파리에서 한번 잠깐 봤는데 제 사진전에 초청하면서 재회했죠. 이를 계기로 그의 영화에 처음 출연했어요. <다른 나라에서>란 작품이죠. 그 만남은 매우 아름다운 예술적 협업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어요.

그 전시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촬영한 사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어요. 혹시 자택에 본인 사진이 걸려 있나요?

벽에 걸어두진 않았지만 거실 어딘가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작가가 촬영한 내 사진이 있을 거예요. 그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데 능통해요. 그때 혼자 우리 집에 와서 촬영했죠. 화장도 하지 않은 나를 앞에 두고 다섯 번 정도 셔터를 눌렀는데, 결과물이 탁월했어요. 그 사진을 보여주고 싶군요. 잠시 찾아볼게요. (이자벨 위페르는 휴대폰을 뒤져 사진을 찾아냈다. 흑백사진 속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에 턱을 괸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그간 수천 번 사진 촬영을 했죠. 영상 작업과 달리 화보 작업에서 중시하는 건 뭔가요?

사진 촬영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진가와 합이 잘 맞아야 해요. 오늘은 정적이기보다 대부분 동적인 사진을 촬영했는데요, 생동감 넘치면서도 유기적인 결과물이 나왔죠. 위대한 사진가는 신기하게도 짧은 시간에 모델에게서 뭔가를 끌어내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서로 적응하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을 이룬다면 멋진 작업이 될 거예요.

오늘 촬영은 당신 입장에선 신인 사진가잖아요. 그럼에도 과감하게 응해줬죠.

그동안 패션 화보는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 같은 유명 사진가와 함께 촬영했어요. 오늘은 익숙하진 않았지만, 상대를 꼭 알아야 촬영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특히 <보그>처럼 제가 신뢰하는 잡지라면 더욱 그렇죠. 나중에야 그가 한국에서 유명한 사진가라고 들었어요.

발렌시아가의 드라마틱한 의상과 함께했어요. 가장 마음에 든 착장은 무엇인가요?

평소 잘 아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발렌시아가는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도 신기하게도 단순하다는 특징이 있죠. 불필요한 디테일 없이 간결해요. 물론 착용하기가 쉽진 않아요. 일단 머리를 통과시키는 첫 관문부터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좁은 문을 힘겹게 통과해 널찍한 방에 들어서는 것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죠. 즐거움을 위해서는 우선 좁은 문을 거쳐야 하잖아요. 이것이 발렌시아가의 매력이에요.

홍상수 감독과 작업한 세 번째 작품 <여행자의 필요>를 위해 서울에 오기 전 급하게 동네에서 영화 의상(빨간 원피스)을 구입했다고 들었어요.

무척 좋아하는 일화예요. 그 원피스는 순수하게 영화 촬영용으로 구입했죠. 알다시피 <여행자의 필요>는 홍상수 감독과 세 번째 같이 작업한 작품이에요. 우리는 촬영에 앞서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감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 배역의 옷차림을 설명했지만, 구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공항에 가기 직전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동네 옷 가게에서 그 원피스를 발견했죠. 입어본 사진을 감독님께 보냈더니 “바로 이거예요!”라는 답변이 왔어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도 전에 연기할 캐릭터와 조우한 느낌이었죠.

평소에는 어떤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나요?

무엇보다 편안함을 중시해요. 사실 하이힐을 더 자주 신고 싶지만, 많이 걸을 땐 쉽지 않은 선택이죠. 발렌시아가 스니커즈는 착화감이 편해서 즐겨 신어요. 발렌시아가의 데일리 웨어도 마찬가지고요. 뭐니 뭐니 해도 편안한 게 최고죠.

매일 책을 휴대하죠. 3년 전 한 영상에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이 가방에 들어 있었어요. 이번에는 어떤 책을 가져왔나요?

이번에도 캐리어에 <유리 동물원>을 넣어 왔어요. 이 작품을 다시 공연하거든요. 현재 네 편의 연극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요. 우선 한국에서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무대에 오릅니다. (11월 1~2일 공연 전에 인터뷰를 진행했다.)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이미 파리와 유럽 전역에서 여러 차례 공연했죠. 그다음으로는 마찬가지로 유럽 전역에서 공연한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 감독의 <베레니스(Bérénice)>가 이어지고, 1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유리 동물원>으로 무대에 세 차례 올라요. 그리고 내년 4월에는 중국의 세 도시에서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펼칩니다. 그 때문에 주로 극본이나 관련 책을 들고 다니며 읽죠.

<메리 스튜어트>는 2019년 파리 초연 이후 유럽 전역에서 공연했고, 이번이 아시아 초연이자 100번째 무대죠. 티켓은 5분 만에 매진됐어요. 당신에게 한국 공연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실 100번째 무대인지 몰랐어요. 이번 공연은 로버트 윌슨 감독과 함께하는 매우 특별한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와는 벌써 세 번째 작품이에요. 첫 번째는 30년 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일인극 <올랜도>였어요. 당시 대릴 핑크니(Darryl Pinckney) 작가가 각색했는데,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을 담은 이번 작품 또한 그가 맡았죠. 윌슨 감독과는 프랑스에서는 꽤 유명한 독일 극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의 <사중주(Quartett)>라는 작품도 함께했어요. 그는 특별한 연출가이기에 세 번째 협업이 매우 뜻깊어요.

공연까지 이틀 정도 남았어요. 어떻게 보낼 건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공연에 집중하기 위해 쉬면서 대본을 점검할 계획이에요. 순회공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다른 두 장소를 이동하며 매우 중대한 일을 해내야 한다는 거죠. <메리 스튜어트> 마지막 공연이 지난 5월 런던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re)였던지라 대본을 다시 숙지해야 하죠. 공연 전날에는 저녁 내내 리허설이 있어요. 이번 공연은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성남시에서 열리기 때문에 숙소 주변을 조금 둘러볼까 봐요. 서울도 잘 알진 못하지만, 성남은 전혀 모르거든요.

걷는 걸 좋아하니 역시 틈날 때마다 산책을 하는군요.

호텔 앞에 있는 커다란 공원을 살펴볼까 해요. 홍상수 감독과 영화 촬영할 당시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동네에 자리한 워커힐 호텔에 묵었어요. 그리고 아차산 정상까지 올라갔죠. 등산길에 여러 친절한 사람을 만나 함께 걷기도 했어요. 하산할 때쯤 해가 져버리더군요.

당신 같은 위대한 배우도 무대에 오르기 전 떨리나요?

연극은 아무래도 영화보다 더 떨리기는 해요. 영화 촬영의 경우 시작 전에 평온한 편이지만 연극은 약간의 긴장감이 있죠. 오래가진 않지만 감정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이번 공연처럼 퍼포먼스 요소가 많을 땐 더 그렇죠. 게다가 무대에 혼자 서기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하면 오롯이 내가 수습해야 하거든요.

<메리 스튜어트>는 90여 분간 펼쳐지는 일인극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무대에 홀로 서는 걸 선호한다고 했는데, 별다른 이유 가 있나요?

무대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단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편이 더 정확해요. 물론 홀로 무대에 서는 것이 싫었다면 이 작품을 하지 않았겠죠. 이 질문을 받을 때는 <베레니스>라는 일인극을 공연 중이었어요. 특히 <메리 스튜어트>는 독특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 공연이라는 점이 특징이에요. 움직임과 사운드가 두드러지고, 무대 위에 많은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인극이지만 저 혼자로만 보이지 않죠. 로버트 윌슨의 연출에서는 빛, 움직임, 사운드가 매우 중요하고, 관객 눈에는 이런 요소가 배우의 파트너처럼 느껴질 겁니다.

카메라 앞과 연극 무대에서 하는 연기는 차이가 없다고 했지만, 연극을 “산에 힘들게 올라 정상에서 아름답게 내려다보는 것”이라고 비유했죠.

연극과 영화를 비교하면, 영화는 평야와도 같아서 평지 위에서 조용히 즐기는 산책 같아요. 반면 연극은 산을 오르는 것 같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정상에 다다르면 아름다운 경치를 선물 받지요. 즉 들인 노력만큼 보상이 따르죠. 물론 영화가 선사하는 풍경도 아름다워요. 다만 그 과정이 덜 험난하다기보단 평온하다는 것이 연극과의 차이점입니다.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는다. 그저 기쁨, 슬픔, 말하기 같은 감정 상태를 연기한다”고 자주 얘기합니다. <메리 스튜어트>에서 그녀의 어떤 감정에 가장 공감했나요?

로버트 윌슨 감독의 연출은 인물 심리를 탐구해 따라가지 않아요. 관객은 대사를 들으며 메리 스튜어트의 비참한 일생을 알고, 그녀의 슬픔, 간혹은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 또한 인물 심리에 전혀 집착하지 않아요. 윌슨 감독은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인 대사보다 리듬과 빛으로 표현합니다. 특이한 것 같지만 연극을 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목소리의 리듬이나 강약의 변주를 통해서도 감정이 표현되는데, 대사를 속삭이다가도 갑자기 크게 소리 지르기도 하고, 매우 느린 움직임이 어느 순간 아주 빠르게 변하기도 합니다. 즉 몸의 언어와 목소리의 조절을 통해 감정의 별자리가 재현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접근이 아니에요. 메리 스튜어트의 연인들,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친척 엘리자베스, 그녀의 죽음, 결국 재회하지 못한 아들 등 여러 이야기가 대사로 전달되기 때문에 관객은 결국 메리 스튜어트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녀가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찡해져요. 전체 이야기 중 가장 헤어나기 힘든 부분이죠.

무대에서 모든 걸 쏟아낸 후 어떤 방법으로 심신을 충전하나요?

연기는 저를 지치게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재충전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은 없고, 공연이 끝나면 그저 잠을 자죠. 공연 전에는 긴장감 때문에 조금 피곤하지만 막상 무대에 오르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부정적인 감정을 압도하니까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공연을 못했을 거예요.

수백 명의 캐릭터와 교감해온 순간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작품 속 캐릭터는 저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본 관객에게 영향을 미칠 순 있겠죠. 제 관심의 대상은 감독들과의 만남이고, 영화 촬영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는 대부분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사회에 짓눌려 공격성이나 자기 파괴성을 보인 여성이에요. 그들을 대변해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나요?

우선 저는 그 캐릭터들이 공격적이거나 자기 파괴적이라고 보지 않아요. 캐릭터가 아니라 그들이 놓인 상황이 파괴적이었어요. 그들은 강한 의지와 결단력을 가지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죠. 이것이 그동안 연기해온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제 관점입니다.

최근까지도 작업하고 싶은 감독으로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등을 꼽았죠. 수많은 거장과 함께해왔음에도 여전히 작업해보지 못한 감독에 대한 열의가 크군요.

그분들을 언급한 이유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한국 영화가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한국 영화를 중요하게 여기고 다양성 측면에서도 뛰어나다고 평가해요. 예컨대 봉준호 감독과 홍상수 감독의 작품 사이에는 유사성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프랑스와 여타 유럽 영화에서도 이런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앞서 언급한 한국 감독들은 그야말로 거장들이죠. 각자 자신만의 방식대로 매우 훌륭한 작품을 연출했어요. 그중 홍상수 감독의 세계는 놀랍게도 너무 친숙했어요. 저는 홍 감독과 함께 작업한 세 작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연기합니다. 아마 이런 연기는 제게 유일할 거예요. 영화를 작업하며 우리가 공유한 공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죠. 앞으로도 계속 이런 만남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지난 커리어도 그렇고, 답변을 듣다 보면 두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일에서만큼은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파리에 영화관 두 곳을 소유하고 있고, 영화를 즐겨 보죠. 영화관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가족 소유로 남편과 아들이 운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영화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요. 막상 현실에서는 원하는 만큼 못 가지만, 그래도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요. 매일 영화관을 찾고 남은 인생도 그러길 희망하죠. 삶이 더 행복해지거든요. 영화관은 제게 주는 선물이자 사색하는 공간, 그리고 휴식처입니다.

12월에는 중국에서 연극 <유리 동물원> 무대에 오릅니다. 연말에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만,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나요?

한국 일정을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베레니스> 공연차 곧장 벨기에와 스페인으로 날아가야 해서 연말엔 더 바쁠 거예요. 그 사이에 영화 <여행자의 필요>가 뉴욕에서 개봉하기 때문에 들러야 하죠. 지난 10월 뉴욕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상영돼 참석했는데, 이내 다시 가는군요. 그때 뜨거운 호응을 받았어요. 파리에서는 내년 1월 말에 선보일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크리스마스 연휴는 매년 그렇듯이 잠시 쉬며 집에서 보낼 겁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어요.

밤이 늦었습니다. 짧은 방한이지만 생막걸리를 맛보길 바랍니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생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여성으로 나온다.)

오, <여행자의 필요>를 보셨군요! 저는 실제로도 그 음료를 좋아해요. (VK)

    포토그래퍼
    박배
    패션 에디터
    김다혜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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