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나쁜 남자, 낭만적 연인의 경계는 어디인가 ‘Mr. 플랑크톤’
여기 세 남자가 있다. 첫 번째 남자는 스토커다.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그에게 신원 조회는 식은 죽 먹기다. 그는 3년 전 자기가 차버린 여자 친구가 딴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식장에서 신부를 납치한다. 여자는 도망치려 한다. 몰래 신랑에게 연락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남자는 그녀의 약점을 잡아서 협박하고, 너는 그 집안 며느리 자격이 없다고 가스라이팅한다.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그녀를 풀어주고 그녀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주겠다고 회유도 한다. 분명 납치, 감금이지만 그의 심리 공격에 무너져 내린 여자는 점점 도피 의지를 잃는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나쁜 남자’의 정석이다. 그는 엄마가 되는 게 소원이라는 보육원 출신 애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리사랑 몰라?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주는 건데 우리 같은 애정 결핍 종자들이 자식한테 뭘 물려줄 수 있겠어?” 그래 놓고 여자가 떠나자 천하에 둘도 없는 순정남처럼 그녀를 그리워한다. 집요하게 들러붙어서 관계를 회복한 후에는 또 밀어내고, 울리고, 버린다. 그녀를 울린 후에는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섹시한 연상녀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나는 개놈이야”라고 자기 연민을 쏟아낸다. 남자와 연상녀 사이에는 성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남자는 이 여자에게도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고 수틀리면 따돌리거나 막말을 한다.
세 번째 남자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여덟 살 때까지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가 생물학적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시린 마음으로 홀로 세상을 떠돌던 그는 자기만큼 외로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자는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안정된 애착 관계를 회피했고, 여자는 스스로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상처를 극복하려 했다. 결국 남자는 떠나는 여자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내던 남자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친다. 의사는 그가 희귀병으로 곧 죽을 거란다. 인생의 끝에서 그가 떠올린 건 아직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그녀, 그리고 아버지다.
이게 사실은 다 한 남자다. 11월 8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며 2주 차 TV 부문 글로벌 7위까지 올라선 <Mr. 플랑크톤> 얘기다.
이 남자를 사랑해도 될까?
정자은행의 실수로 잘못 태어나버린 주인공 해조(우도환)는 시한부 판정을 받자 생부의 얼굴이나 보고 죽겠다면서 정자 기증자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혼자 곱게 가면 될 걸 구여친 조재미(이유미)를 납치해서 데리고 다닌다. 재미의 남편이 될 뻔한 어흥(오정세), 종갓집 18대 종손 어흥을 찾기 위해 어머니 범호자(김해숙)가 파견한 해결사 존 나(John Na, 알렉스 랜디), 해조가 심부름센터를 할 때 잘못 건드린 왕자파 두목 칠성(오대환)이 뒤섞이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작품의 만듦새는 훌륭하다. 재미도 있고, 여운도 있고, 가족 문제에 대한 대안적 고찰도 있다. 한국 정통 TV 드라마보다는 독립 영화에 가까운 섬세하고 마이너한 감성이다. 온도 낮은 엉뚱한 유머 감각도 적재적소에 담겼다. 시한부 환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지막은 거의 시적으로 보일 만큼 아름답고 슬프다. 캐릭터들은 작은 배역 하나까지 빠짐없이 매력적이다. 연기도 탄탄하다. 특히 이유미는 우유부단해 보일 수도 있는 인물 조재미에 깊은 뉘앙스를 부여함으로써 작품에 설득력을 더한다. 제작진의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 드라마에 쏟아지는 호평이 공감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해조의 복잡한 면모로 인해 그 의도에 따르는 게 맞나 의문이 들곤 한다.
초반 해조의 행동은 분명 범죄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남성에 의한 여성 납치, 감금, 폭력, 살해 뉴스가 줄줄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이런 소재를 보고 웃어도 되는지 꺼림칙하다. 배우 우도환의 아름다운 외모, 해조의 슬픈 사연, 해조와 재미가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는 동지라는 점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은 주인공들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여정으로만 느껴진다. 그런데 데이트 폭력범들도 자기가 잘생기고, 동정받아 마땅한 존재고, 상대가 자신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강요나 폭력이 상대를 차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해조의 ‘나쁜 남자’ 같은 면모도 앵글을 조금만 바꾸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남자와 엮이는 건 여자가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작품은 시청자들이 해조에게 연민을 품을 만한 서사를 효과적으로 섞어 넣는다. 이 로맨스 관계에 대한 호평은 타인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선량한 노력이 오히려 데이트 폭력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판단을 지연시키고 불공정한 판정을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 여자는 왜 사랑에 빠졌을까?
여주인공이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짐으로써, 해조의 위험한 행동은 일단 합리화된다. 그러나 재미의 선택은 정서적으로 취약한 여성이 나쁜 관계에 빠져드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재미는 마음 붙일 곳이 절실한 사람이다. 다른 여자라면 꺼릴 종갓집 외며느리 자리를, 심지어 남편감과 섹스 한 번 안 해보고 수락한 것도 가정을 갖고 싶어서였다. 나쁜 남자와 연애를 한 후라 “당신이 사라지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겠다”는 어흥의 확실한 태도가 좋았고, 시어머니를 엄마의 대체자로 여긴다. 그러다 조기 폐경 진단을 받자 자신은 그 집안에 속할 자격이 없다고 위축된다. 강한 선망과 낮은 자아상이 합리적 판단을 가로막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재미가 해조의 잦은 심리적 학대를 무던하게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할 터다. 또 재미는 자기 외로움에 진심이라 비슷한 외로움을 지닌 해조에게 쉽게 동조해버린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교감은 신발로 상징되는데, 초반에 재미는 어흥이 결혼 예복으로 구해준 꽃신을 애지중지한다. 해조는 그 꽃신을 빼앗아서 버리고는 구제 시장에서 수페르가 캔버스 메리제인 슈즈를 사준다. 왕자파와 대치하다가 수페르가 신발을 잃어버리고 칼에 찔린 재미는 해조가 신발을 찾아서 가져다준 것을 계기로 완전히 그에게 마음이 넘어가버린다. 그때부터는 해조가 미운 소리를 해도, 딴 여자와 있는 걸 봐도, 자기를 길바닥에 버리고 가도, 꿋꿋이 그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설명하면 사이코드라마 같지만, 그럼에도 각 인물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작품의 무서운 점이다. 예쁜 미장센과 음악이 이를 돕는다. 종갓집, 한복, 산장, 재개발 지구 내 해조의 심부름센터, 봉숙의 아파트 등 모든 공간과 의상의 개성이 뚜렷하고 디테일은 고급스럽다. 소품을 아낌없이 쓰고, 색감 배치도 과감하다. 한국 로코 특유의 유치하고 희부연 필터 대신 심도 있는 조명을 채택하고 와이드 앵글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작품에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이런 기술적 요소들이 작품에 신뢰를 불어넣고 호감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청자들은 서사의 결함으로 눈 돌릴 틈 없이 작품의 서정에 동화된다.
악덕과 미덕이 혼재하는 드라마
최근 한국 드라마는 ‘정상성’ 관념이 해체, 수정되는 현실을 즐겨 반영한다. <Mr. 플랑크톤>도 마찬가지다. <조립식 가족>이 그랬듯, 이 작품도 ‘혈연’ 판타지에 비판과 의문을 제기한다.
주요 캐릭터는 모두 혈연에 집착하고 그 때문에 상처받은 인물들이다. 자기 ‘씨’가 아니라고 해조를 배척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은 해조의 아버지, 정자 기증자들을 만나면서 아버지라는 이미지의 허상이 깨질 때마다 상처받는 해조, 늦게까지 아들을 못 낳은 죄로 남편의 혼외자들을 뒷바라지했던 종갓집 종부 호자, 종갓집 장손으로 어머니와 가문의 통제 속에서 살아온 어흥, 생모에게 버림받은 재미 등이 그렇다. 한국계 미국인 해결사 존 나 역시 모성을 찾는 인물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혈연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비혈연 관계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해조와 재미는 결혼으로 가족을 꾸릴 기회를 차버리고, 해조는 가족보다 자기를 위해주는 봉숙(이엘)을 소홀히 한다. <Mr. 플랑크톤>은 인물들이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비혈연 집단과 대안 가족을 형성하는 여정을 그린다.
범호자가 재미를 보며 “내가 진작에 이런 딸을 낳았어야 되는데 뭘 염병할 대를 잇는다고 아들 타령만 해갖고 이 개고생을…”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작품의 성격을 대변한다. 관습을 회의하되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Mr. 플랑크톤>은 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예쁜 로맨스물이라는 포장과 달리, 여러 논쟁적 요소를 품은 작품이다. 어떤 관점에서 감상하든 여운은 깊다. 보고 나면 다른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드라마다.
<Mr. 플랑크톤>은 총 10부작으로, 2024년 11월 8일 넷플릭스에서 전편이 공개되었다.
추천기사
-
엔터테인먼트
허영서는 신예은의 20대였다
2024.12.24by 손은영, 류가영
-
셀럽 뉴스
발렌시아가 캠페인에 등장한 사수 김예지
2024.12.11by 오기쁨
-
패션 뉴스
더 푸른 바다를 꿈꾸는 프라다와 포토그래퍼 엔조 바라코
2024.12.18by 안건호, Ashley Ogawa Clarke
-
리빙
2025 올해의 컬러 ‘모카 무스’
2024.12.06by 오기쁨
-
아트
예술계가 사랑한 건축가,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미술관
2024.12.11by 류가영
-
아트
고작 캔맥주 하나 때문에 아무렇지 않았던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는 일
2024.11.29by 정지혜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