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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하디드가 서울에서 보낸 어느 평범한 하루

2024.11.22

지지 하디드가 서울에서 보낸 어느 평범한 하루

지지 하디드는 우리 모두 지구를 잠시 방문한 ‘손님’이라고 말한다. 가을이 한창인 11월 어느 날, 지지와 게스트 인 레지던스라는 손님이 서울을 찾았다.

게스트 인 레지던스 팝업이 시작되기 전, 지지는 한국의 명소를 탐방하며 관광을 즐겼다. 광화문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슈퍼모델’ 그 자체다.

“지지 하디드(Gigi Hadid)가 서울에 온다고 합니다!” 편집장을 찾아가 이토록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하자, 일순간 유리방(편집장 집무실을 에디터들은 이렇게 지칭한다)의 공기가 바뀌는 걸 느꼈다. ‘슈퍼모델’을 취재할 기회, 심지어 뉴욕과 파리가 아니라 서울에서 주어졌으니 말이다. 촬영과 인터뷰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뒤 내 자리로 돌아오며, 파리 패션 위크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지가 런웨이에 등장할 때마다(베트멍! 베컴! 라반!), 쇼장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전 세계 에디터들은 전투 준비라도 하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지지의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칠까 봐 분주히 손의 각도를 조정했다. 지지는 언제 어디서든 ‘메인 이벤트’다.

8,000만 명에 육박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지닌 모델이지만, 지지는 자신의 커리어가 유한하다는 것을 잘 안다. 2년 전, 뉴욕에서 열린 ‘Vogue Forces of Fashion’에 연사로 나선 그녀는 “모델 일을 영원히 할 수는 없다”고 말한 적 있다. 2020년 9월 태어난 딸 카이(Khai)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덧붙인 지지는 좀 더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고, 삶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니트웨어 브랜드 ‘게스트 인 레지던스(Guest in Residence, GIR)’를 론칭했다.

GIR은 브랜드 설립 목적이 명확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만큼 품질이 견고하고, 시간이 지나도 그 매력은 변함없을 캐시미어 아이템을 만드는 것이다. 2013년, 지지는 본격적인 모델 활동을 위해 고향 캘리포니아를 떠나 뉴욕에 살기로 결정했다. 그 유명한 욜란다 하디드(Yolanda Hadid)는 그런 딸에게 오래된 캐시미어 스웨터 몇 벌을 선물했고, 지지는 아직도 그 스웨터를 간직하고 있다(미래에는 카이 역시 지지가 입던 GIR 옷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11월 4일, 지지 하디드가 서울에 왔다. 슈퍼모델이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 자격이다. 편집숍 톰그레이하운드(Tom Greyhound) 도산점에서 GIR을 처음 선보이기 위해 나타난 그녀는 영락없는 ‘멋쟁이 비즈니스 우먼’의 모습이었다. 광화문과 경복궁, DDP 그리고 편의점 음식까지 밀도 있게 즐기고 간 지지는 <보그>에 특별한 사진을 보내왔고, <보그>는 지지에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삶에 대해 질문했다.

DDP 앞에서 포즈를 취한 지지 하디드. 게스트 인 레지던스 특유의 쨍한 컬러감이 맑은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린다.

‘서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나?

언젠가 꼭 와보고 싶은 도시였다. 마침내 꿈이 이뤄졌다는 생각에 무척 설렜지만, 동시에 일정이 너무 짧아 아쉽기도 했다. 하루 만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식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서울의 여러 명소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도시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었다! 언젠가 다시 방문하고 싶다.

‘관광객 지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그림이다. 어딜 가든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쉽지 않은 일이다. 런웨이에 서고 브랜드도 운영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암스테르담에 있을 때는 최대한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관광을 즐기려고 한다. 엄마가 네덜란드 출신이기도 하고,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갔기 때문에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주로 어디를 방문했나?

좁은 골목길 탐방에, 광화문과 전통 한옥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장한 고층 건물에 깜짝 놀랐다. 서울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도시다. 톰그레이하운드에서 팝업 일정이 끝난 뒤에는 한국가구박물관에서 프라이빗 디너를 주최했다. 국가 차원에서 전통과 유산을 보존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통, 디자인, 혁신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서울 사람들의 스타일도 눈여겨봤을 듯하다. 뉴욕이나 파리 거리에서 본 스타일과 무엇이 달랐나?

여러 도시의 패션, 문화, 음식, 역사를 체험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번 여행 역시 짧았지만 자극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본 ‘서울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웨어가 혼재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화려하고 실험적인 스타일링을 즐기고, 또 누구는 미니멀하고 정제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레이어링, 텍스처, 실루엣을 건축적이거나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인상적이었다.

런웨이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모습과 달리, 지지는 캐주얼하면서도 편안한 스타일링을 즐긴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GIR의 팝업이었다. 모델로 한창 활동하던 중 개인 브랜드를 론칭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가 궁금하다.

집안 가보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올 수 있는 옷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2022년 브랜드를 론칭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또 엄마가 자기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옷 말이다. GIR은 캐시미어를 주력으로 다루는 니트웨어 브랜드다. 누구나 니트 한 벌쯤은 갖고 있지 않나. 클래식한 디자인, 오래 입을 수 있는 빼어난 소재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옷을 만들고 있다. 캐시미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캐시미어가 극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소재라고 여긴다. GIR의 캐시미어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약간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다채롭다.

브랜드명이 흥미롭다.

우리는 모두 손님이다. 지구를 방문한 손님,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을 잠시 점거하고 있는 손님. 옷도 마찬가지다. 잘 만든 옷은 여러 세대를 거쳐 전승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옷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단지 ‘장기 투숙 중인 손님(Guest in Residence)’일 뿐이다.

이번 행사는 GIR이 아시아에서 개최하는 첫 팝업이다. 많고 많은 도시 중 서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GIR의 DNA에는 늘 한국이 존재했다. 헤드 디자이너, 시저(Sijeo)가 부산 태생이다. 누구보다 멋스럽고, 브랜드에 독창성과 창의성을 주입하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시저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 건 아니다. 한국 고객은 딸과 아들에게도 물려줄 가치가 있는, 좋은 품질의 옷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녔다. 한국이야말로 GIR의 팝업을 선보이기에 적격인 장소라고 여겼다.

GIR을 디자인할 때는 어디서 힌트를 얻나?

나를 둘러싼 세상! 여행길에서의 경험부터 쇼핑, 특별한 식사 자리,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험까지 무엇이든 영감이 된다. 어린 시절 추억, 그리고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사할 무렵 부모님이 주신 스웨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있다. 각자의 역사와 개성, 체취를 지닌 빈티지 스웨터를 연구하는 일을 좋아한다. 오래된 스웨터는 단지 낡은 것이 아니다. 흘러간 시간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하나의 징표다.

게스트 인 레지던스 옷에서도 패션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팝업 현장에는 2024 가을/겨울 컬렉션이 진열되어 있었다.

1990년대에 스키 여행 떠나는 풍경을 상상했다. 스키장으로 향하는 길, 슬로프 위, 불을 땐 오두막 안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GIR의 코드인 밝은 컬러와 캐시미어를 활용해 빈티지와 모던한 감성을 혼합했다. 지금은 물론 30년 뒤에도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컬렉션이다.

슈퍼모델로 활동하며 경험한 일이 디자인 철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패션계의 다양한 면면을 경험할 수 있어 감사하다. 모델로서 커리어를 쌓으며 나만의 관점을 갖게 됐고, 재능 넘치는 아티스트들과 친분을 쌓았다. 직접 브랜드를 경영하는 입장이 되니 많은 것이 달리 보인다.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아름다운 디자인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할까? 내가 배운 모든 것을 GIR에 적용해, 옷 하나하나에 메시지는 물론 사랑을 담으려 애쓴다.

서울에도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가 개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지만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무엇보다도 진정성을 잃지 말 것. 나 자신, 그리고 비전과 열정을 대할 때는 진실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브랜드를 운영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순간도 생기지만, 성공적인 브랜드 대부분은 디자이너가 개인적인 이야기나 가치관을 숨김없이 내보인다. 패션계의 규범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해야 독창적인 결과물이 나오니까.

한국 고객에게 잘 어울릴 GIR의 아이템을 추천한다면?

캐시미어라면 뭐든! 거의 모든 아이템이 100% 캐시미어인 GIR은 한국의 추운 겨울에 더없이 적합하다. 팝업에 참석하며 내가 입었던 ‘그리즐리(Grizzly)’ 코트부터 봄버 재킷, 카디건, 크루넥, 롱 슬리브까지 전부 다양한 방식으로 스타일링할 수 있다는 것도 GIR만의 장점이다. 이리저리 겹쳐 입고 다양한 컬러에 도전하다 보면 재미를 찾을 수 있다.

GIR이 한 편의 영화라면 어떤 곡이 주제가가 될까?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의 ‘Our House’. (VK)

포토그래퍼
Keaton Manning, Michael Elmquist
에디터
안건호
헤어
이에녹
메이크업
캐롤리나 곤잘레스(Carolina Gonzal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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