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 전민철 “제 춤이 치유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전민철이 날아올랐다.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던 소년에서 마린스키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비상한 그의 발아래가 점점 아득해진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 6시, 발레리노 전민철이 토슈즈를 신고 몸을 풀기 시작한다. 4시간 넘게 화보 촬영을 진행한 뒤였지만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고요하고 민첩하다. (일요일이었으나 전민철은 촬영 직전까지 발레 연습에 매진한 후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촬영장에 도착했다.) 귀가를 서두르던 스태프들도 그의 공간에 잠입한 듯 숨죽여 전민철의 움직임을 좇는다. 184cm의 큰 키에 유난히 가냘픈 팔다리로 자아내는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몸짓. ‘이것이 스무 살의 나이에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월드클래스 무용수의 움직임이구나.’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여름, 러시아에서 한때 ‘황실 마린스키 극장’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전민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오를까. 섣부른 예상을 멈춘 것은 상상력의 한계 탓이다. 전막(하나의 극을 이루는 모든 막) 발레 데뷔 공연에서 남자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세계 5대 발레단인 마린스키 발레단에 군무 단원이 아닌 솔리스트로 바로 합류하는 등 올 한 해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한 전민철의 행보는 모두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으니까. 아득한 미래를 상상하다 마음이 붕 뜬 내게 그가 “땅을 밟고 현재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최선을 다해 어제의 실수를 아쉬워하고, 현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만이 불투명한 미래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하게 쓸모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케이!” “나이스!” “브라보!” <보그> 디지털 촬영을 물 흐르듯 완수한 전민철이 이윽고 화이트 티셔츠와 데님 팬츠 차림에 골든구스 스니커즈로 갈아 신고 인터뷰를 위해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는 듯이.
28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수많은 발레 팬을 들뜨게 했습니다. 러시아로 가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았죠? 지금은 발레단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나요?
구체적인 입단 시기를 논의하고 있어요. 현재 마린스키 소속인 김기민 선배님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에는 공개 오디션이 없죠. 마린스키 발레단 최초의 동양인 수석 무용수인 김기민의 추천이 당신의 발레단 합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이 특히 행복하게 느껴진 이유는 김기민 발레리노 때문이었어요. 김기민 발레리노와 함께 생활하며 그분의 발레와 마음가짐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영광으로 느껴졌거든요. 형이 오랜만에 <라 바야데르>로 한국 무대에 선다고 했을 때도 무대를 정말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최근 김기민과 전민철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주인공 ‘솔로르’를 연기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형이 많은 조언을 주셨죠.
“손 하나를 뻗어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 말인가요?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그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숨은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어요.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는 사랑과 권력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사입니다. 당신이 연기한 솔로르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무희 ‘니키야(유니버설발레단은 니키야, 국립발레단은 니키아로 표기한다)’를 정말 사랑하기에, 그 사실을 아무리 감춘다 한들 상대를 보면 어쩔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이 묻어나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2막에서 약혼자 ‘감자티’와 어쩔 수 없는 결혼식을 올린 후 니키야의 독무가 이어지는데 그 춤을 바라보며 솔로르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죠. 이제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 저와 가장 다른 인물이었기에 디테일한 감정을 많이 연구했어요. 새로운 춤에도 도전했고요.
어떤 춤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전사들의 북춤이요. 무대 뒤에서 감자티와의 파드되(2인무)를 준비할 때 나오는 춤인데 시작하는 순간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지거든요. 몸 전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 나오죠.
전막 발레 첫 주연의 자리에서 4분 만에 2,200여 석 전석 매진을 기록했어요. 공연하며 관객의 뜨거운 관심을 느꼈나요?
너무나요! 오페라 극장에서의 첫 무대였는데 넓은 공간에서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꽉 찬 관객석을 보며 공연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물론 부담되기도 했죠.
인생 첫 <라 바야데르>를 어떻게 자평하나요?
학생 신분(전민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3학년에 재학 중이다)에 전막 발레 주연의 기회를 얻는 건 엄청난 일이에요. 나이가 아니라 기량을 높이 봐주셨다는 뜻이기에 감사했죠. 그만큼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런 부담이 독이 된 것 같아요. 1막에서 파트너를 잡다가 손으로 땅을 짚는 실수를 했거든요. 거기서부터 집중력이 흐려졌어요. 다행히 2막과 3막에서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했기에 큰 후회는 없지만 순간을 즐겼다면 더 나은 무대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아요.
시간이 지나 솔로르를 다시 연기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제 첫 솔로르 연기는 분명 어리숙했어요. 하지만 이런 풋풋한 연기는 지금밖에는 못 보여주겠죠. 지금 전성기 무용수들이 17~18세에 전막 발레 무대에 선 영상을 보면 연기도 어색하고 서툴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매력이 있거든요. 저 역시 몇 년 뒤에 솔로르를 연기한다면 분명 지금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지금 나이에만 느껴지는 매력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요. 그런 희소성 때문에 티켓도 매진된 게 아닐까요?
최근 뉴스 인터뷰에 출연해 수트 차림으로 발레를 선보인 것도 화제가 됐어요. 발레에서 의상과 춤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어떤 무대의상을 선호하나요?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소재나 디자인에 따라 굉장히 다른 효과를 낼 수 있어요. 대개는 안무가의 의도에 따라 의상이 결정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필립이 입는 몸에 꼭 맞는 왕자 옷과 ‘로미오’의 시그니처 복장인 로맨틱한 블라우스에 타이츠 차림을 좋아해요.
인기에 힘입어 열세 살에 출연한 SBS <영재 발굴단>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 역할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도 회자되고 있어요. 한국무용, 태권도, 뮤지컬 등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움직임에 도전했는데 그중 발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춤추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맨 처음엔 발레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오기 때문이었죠. 어떤 동작이 잘 안되면 죽을 때까지 연습해서 가능하게 하고 싶은 승부욕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한 동작씩 도전하며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어요. 발레를 정말 사랑할 수 있게 된 건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예요. 오로지 내 몸과 무대에 집중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죠.
처음으로 배운 발레 동작은 무엇이었나요?
플리에(Plié)나 포앵트(Pointe) 아닐까요? 발레 수업에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기초 동작이니까요.
맨 처음 인정받은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도 절 지도해주시는 조주현 교수님을 처음 만났는데 저보다도 더 제 미래를 궁금해하고 기대하셨어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성장이 빨라진 것 같아요. 그 만남이 제게 중요한 타이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은 당신을 발레리나보다 더 아름다운 발레리노라고 해요. 그리고 그 비결은 아름다운 체형 때문이라고요. 이런 평가에 대한 생각은?
여태껏 한국 발레계에서 보지 못한 무용수라는 평가로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섬세한 표현에 많이 신경 쓰다 보니 가벼운 표현이 잘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데 좋은 무용수는 표현을 자유자재로 바꿔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땐 좀 더 무겁고 단단한 표현에 주력하죠.
춤을 대하는 남성과 여성의 접근은 달라야 한다고 믿나요? 평소 남녀 무용수 모두에게 영감을 받는지도 궁금합니다.
모든 무용수의 춤을 많이 봐요. 여성 무용수인 실비 길렘(Sylvie Guillem)의 춤을 꾸준히 찾아보는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요. 발레리노로서 제가 바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 최고를 서포트해주면서도, 고유한 라인과 리듬을 지닌 무용수가 되는 거예요.
육체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나 몸을 변화시키기 위해 특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코어 운동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근육을 키우는 다른 운동도 많이 필요하고요. 어렸을 땐 날카로운 포앵트를 만들기 위해 발가락을 앞으로 꺾고 걸어 다니기도 했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 발로 보일 정도죠.
움직임을 통해 기쁨을 느끼나요? 발레가 당신에게 자유와 해방감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발레 할 때 해방감을 느끼진 못해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끈질기게 스스로와 싸워야 하거든요. 창작 발레는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는데 클래식 발레에서는 불가능해요. 정말 많이 생각하고, 때론 그 생각이 지나치고, 어떨 때는 과도하게 예민해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느끼는 클래식 발레의 가장 큰 매력은 뭔가요? 클래식 발레를 동경하는 입장에서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3대 클래식 발레를 초연한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 소식을 더 뜻깊게 여겼을 것 같기도 합니다.
춤추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클래식 발레는 도전할수록 어렵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될 때도 많아요. 동작은 완벽한데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서 애를 먹기도 하죠.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풀어가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고 의미 있어요. 특히 지금은 클래식 발레로 실력을 더 연마할 때라고 느껴요.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으로 기대하는 삶의 변화는?
러시아가 예술을 정말 사랑하는 나라라고 친구들에게 들었어요.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이 기대돼요. 발레뿐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클래식과 고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린스키 다음은 뭘까요? 춤으로 어떤 것을 이루고 싶나요?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얘기인데 제 춤이 치유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많은 이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요. 더 나아가서는 교육에 대한 꿈도 갖고 있고요.
2024년을 부쩍 많이 성장한 해라고 표현했어요. 모든 시간을 통과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올해의 모든 경험이 저에겐 새로웠어요. 생각이 깊어지고, 시야도 넓어졌고요. 그만큼 앞으로 더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아져서 감사하지만 저는 그것과 상관없이 제 삶을 잘 이어가야죠. 항상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저만의 춤에 집중해서 앞으로의 시간도 잘 보내고 싶습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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