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가 만드는 무구한 세계
조각, 회화는 물론 대규모 설치 작업을 이어온 작가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일상은 질문과 은유로 가득하다. 그들의 공간에서 금기시하는 주제는 없다.
2004년부터 공동 작업을 이어온 설치미술 작가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Gregory Maass)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작업실 겸 집으로 향했다. 내년 2월 2일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이는 전시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Paranoia Paradise)>의 설치를 막 끝낸 이튿날, 인터뷰 약속을 잡은 터라 설렘과 걱정이 오갔다. 양평으로 향하는 길, 길게 펼쳐진 강은 한없이 잠잠했고 다채로운 주제, 장르, 소재를 아우르는 작가에게 던질 질문만 복잡하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이윽고 도착한 집 앞, 주차하기에 앞서 김나영 작가가 2층 창문을 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혹여 피곤하지는 않을지, 작업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을지 걱정한 마음 모두 기우였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두 사람은 천진했고 인터뷰 질문의 안팎을 아우르는 선문답을 던지곤 했다. 이따금 명료한 대답보다 생각해봄직한 주제, 방향을 제시하며 대화 속 리듬을 만들어냈다. 인터뷰를 끝내고 그들의 집을 둘러보는 순간, 함께 나눈 대화처럼 다양한 문화와 생각, 공존하는 예술이 눈에 들었다.
이번 전시 출품작이 60점이나 되더군요. 설치를 끝내니 홀가분한가요?
그레고리 만감이 교차하죠. 그래도 이제 손을 떠났으니 후회는 없어요.
나영 그럼에도 설치가 끝나면 남의 일인 양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업하는 동안의 감각은 남아 있는데 부가적인 생각이나 걱정은 없어요.(웃음)
럭셔리 아이템으로 가득 찬 에르메스의 지하,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일상적인 물건, 키치한 오브제 등으로 만든 작품이 들어서니 이질적이더군요. ‘이런 패러독스 자체가 예술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편집증의 파라노이아, 천국의 파라다이스가 맞닿은 전시 제목부터 모순적이더군요.
그레고리 은유적인 표현 방식이라 말하고 싶어요. 사고하고 행동하는 삶 곳곳에 은유가 녹아 있죠. 예를 들어 “시간은 금이다”라는 표현처럼요. 우리는 말장난을 참 좋아해요. 어쩌면 이런 말장난 역시 창의적 작업의 일부일 수도 있겠고요.
나영 작업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피하는 편이죠. 전시를 이끈 안소연 디렉터도 전시 소개 글에 썼는데 우리가 다룬 “다양한 모티브와 재료가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방대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뭘 하는지 알기 어려워요. 삶을 규정하기 어렵듯, 우리가 하는 예술도 비슷합니다. 은유적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죠. ‘파라노이아 파라다이스’라는 타이틀은 서로 다른 주제의 충돌이자 연결이에요. 우리는 뜬금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요. 도예와 담배, 키치한 만화 피규어와 철골 프레임처럼 낯선 것들을 작품으로 연결하죠.
전시에는 해부학, 건강 관련 작품도 다수 있더군요. 보편적인 현대미술 작품이 정신, 감정을 다룬다고 보았기에 이색적이었습니다.
나영 양평으로 이주하며 친하게 지내는 분들의 연배가 높아졌어요. 은퇴한 70대 주민이 많은 동네거든요. 우리 또한 나이 들어가며 신체의 변화를 느끼고요. 우리가 속한 사회, 삶에서 영향을 받은 면도 있을 거라 봅니다. 이성과 감정은 어디서 기인할까요? 흔히 마음, 가슴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뇌라는 장기, 신경에서 출발해요. 신체 조직을 드러낸 작업 또한 이와 큰 차이가 없어요.
그레고리 해부학은 신체의 배열을 통해 인간과 동물이 가진 구조에 집중하잖아요. 현대에 들어 이런 구조적, 본래 지닌 신체보다 이상화된 외모가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고 봤어요. SNS 속 타인의 이미지를 보며 자신의 가슴, 머리카락, 얼굴형, 피부 톤 등에 불만을 품게 되죠. 과거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의심하지 않던 것과 대척되는 현상입니다.
나영 출산, 수유 등 한때 필수적이던 신체적 과업이 아웃소싱화되기도 했고요. 신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모티브를 연결한 작업들입니다. 수집한 사물과 아이디어를 일부 떼어내고 재조립해 작업을 완성하는 우리만의 ‘프랑켄슈타인화(Frankensteining)’ 기법을 확인할 수 있죠.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주제, 생각을 작업으로 이끌고 있죠. 프랑스, 독일, 일본, 아프리카 등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다 2017년 지금 이곳 양평에 안착했어요. 삶과 작업에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나영 2009년부터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어요. 어느 컬렉터의 제안으로 이 동네에 자리 잡았는데 우리가 경험한 동네 중 이곳이 가장 사람이 많지 않나 싶어요. 어느 동네에 머물든 이웃과 친밀하게 지내는 편이라 특별할 건 없어요.
그레고리 높은 빌딩이 없는 것도, 산과 강이 가까운 것도 참 좋은 동네죠. 삶이 건강해져요.
나영 집에 관해서는 영향을 받는다기보다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전시 준비로 발 디딜 틈 없이 뭔가로 가득했거든요.(웃음) 우리 손으로 꾸민 공간이기에 인테리어 스타일이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삶이 묻어난 공간이에요.
이 집이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의 거대한 작품 같아요.
나영 골조는 창고 짓는 분이, 내부는 우리가 꾸몄어요. 높은 천장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였죠. 가구는 유럽에서 가져온 것과, 줍거나 고물상에서 구입한 것이 섞였습니다. 특히 다이닝 테이블은 160년 된 독일의 테이블 다리에 한국에서 구입한 뉴질랜드 나무 상판을 연결해 그레고리가 만들었어요.
그레고리 테이블만큼 뒤에 보이는 자개장을 짜 맞춘 듯 벽체 안쪽으로 설치하는 게 힘들었어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었죠.(웃음) 손수 채우고 가꾼 집이지만 호텔처럼 여길 때도 있어요. 집에 대해 애착을 갖기보다 언제든 전 세계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거든요.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개장이 아름다워요. 집 안에도, 작품에도 오래된 사물을 곁들였죠. 쓸모를 다한 물건에서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있나요?
그레고리 사물이 생산되는 데는 필연적 이유, 필요가 뒤따르잖아요.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이 퇴색되곤 합니다. 시간은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시간의 루프를 재정의하는 거예요. 개인의 선택에 따라 물건이나 작품 수명이 늘기도 하니까요. 꽤 역설적이고 복잡한 생각이죠.
나영 “일상적 오브제를 작품에 자주 사용하나?”라는 물음을 가끔씩 받아요. 돌, 나무처럼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소재도 매력적이지만, 물건이야말로 동시대적인 물질이라고 느껴요. 과거 한국에서 소나무가 많으니 그것으로 집을 지어왔듯 말이에요. 특별히 뜻을 두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자 행동이에요.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가는 개방적인 태도군요.
나영 선구적 메시지, 큰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작업을 합니다.(웃음) 거대한 메타포, 정형화된 작업 방식을 취하지 않아요. 작업할 때조차 협업이라기보다 각자 잘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도맡아 진행합니다. 이를테면 전시작 중 수놓기는 제가, 서예는 그레고리가 담당하는 식이죠. 어떤 작업은 한 사람이 쭉 이끌고 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럼 한 사람의 결과물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같이 나눈 대화, 질문, 생각이 그 속에 녹아 있거든요.
두 분의 작업과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곳에서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나요?
나영 둘 다 종일 작업을 해요. 미술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작품을 수집하거나 좋아하는 도록을 보기도 하고요.
그레고리 작업실에 마련한 거대한 책장에서 소설책을 꺼내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하죠.
나영 집 자체를 즐기는 시간도 가져요. 어려서부터 ‘집’이라는 공간을 좋아해서 친구네 집에도 자주 놀러 갔죠. 집집마다 녹아 있는 문화, 생활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반려묘 세 마리와 나른한 시간을 보내는 순간도 즐깁니다.
연말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나영 전시 준비로 너무 바빴기에 숨을 돌려야겠죠. 그런데 큰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글쎄요… 그저 매일 작업을 하겠죠.
그레고리 We don’t have Sundays, holidays!(웃음) (VL)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사진
- 박나희
- 글
- 유승현(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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