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신드롬과 NPC의 역습, ‘트렁크’
넷플릭스 신작 <트렁크>는 미스터리 멜로를 표방한 사이코드라마다. 호수에 떠오른 수트케이스나 스토킹 살인범 얘기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뒤틀린 자, 상처받은 자, 구원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린다는 게 이 드라마의 진짜 매력이다. 고요하고 느린 것 같지만 심리에 집중하면 결코 정보 값이 적은 드라마는 아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지독한 사랑 얘기를 선호하는 관객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김려령의 동명 소설(창비, 2015)을 <화랑>(KBS2, 2016)의 박은영 작가가 각색했다.
김규태 감독은 <우리들의 블루스>(tvN, 2022), <괜찮아, 사랑이야>(SBS, 2014), <그 겨울, 바람이 분다>(SBS, 2013)를 연출했다. 워낙 분위기와 심리 묘사에 능한 감독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한결 건조하고 절제된 느낌이다. 후반부에서 갑자기 톤이 달라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늘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남주인공 한정원(공유)은 이혼한 아내 이서연(정윤하)의 요구로 NM(New Marriage) 서비스를 수락한다. 한시적 계약 결혼 서비스다. 여주인공 노인지(서현진)는 NM 직원이다. 인지에게 정원은 다섯 번째 결혼 상대다. 정원과 인지는 서로에게 끌린다. 그들을 붙여준 서연은 당황한다.
멜로보다 독특한 심리극이라는 데 집중하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정윤하가 연기하는 ‘이서연’이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들을 함정에 몰아넣는 악당이다. 하지만 가장 뒤틀린 인물이고, 극의 추동력이다.
서연은 사마귀나 거미처럼 짝짓기 상대를 물어 죽이는 이상한 여자다. 심지어 출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이 낳기는 거부한다. 그게 정원과의 갈등이 폭발한 원인이었다. 서연은 그저 상대를 괴롭히고 통제하고 시험하는 게 습성인 사람이다.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팜므 파탈 같지만, 실상은 한시라도 사랑을 확인받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애처로운 인물이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한단 말 대신 차갑게 대하는 걸 알잖아’라는 노랫말의 현신 같기도 하다. 그에게 사랑이란 자기애뿐이다.
그녀, 이서연은 제 손바닥 안에 있는 줄 알았던 남편 한정원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임신부인 자신보다 태아를 염려하자 정원에게 심리적 보복을 시작한다. 그래서 선택한 게 NM이다. 그건 정원에게 주는 벌이자, 시험이자 또 한 번의 기회였다. ‘그에겐 나밖에 없다’는 걸 정원과 자신에게 재확인시키는 과정이다. 서연이 정원을 버리는 대신 기회를 준 건 그만큼 서연에게도 정원이 중요해서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다. 서연이 의식불명인 정원의 아버지를 때려놓고 “내가 가끔 사람 기함시키잖아”라며 정원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은, 서연이 오랫동안 정원을 자극하고 그럼에도 변치 않는 헌신을 확신함으로써 자기애를 충족해왔음을 암시한다.
서연은 정원을 통제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약물을 사용한다. 정원을 다른 여자와 붙여준 후에는 집에 감시 카메라를 달고 지켜본다. 정원이 지인을 밀어내면 만족하고, 정원이 지인에게 다가가면 분노한다. 이런 변태적인 악당 캐릭터가 대중 멜로에서 설득력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서연의 존재감이 확실하다. 그냥 ‘미친 X’, ‘나쁜 X’ 욕하고 말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릿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다음 장면에선 또 어떤 얍삽한 짓을 할까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인물이다. 배우 개인의 매력도 크게 작용한다. 그 덕에 서연이 설계한 프로그램에서 탈출하려는 주인공들의 몸부림에도 설득력이 생겼다.
‘주인공 신드롬(Main Character Syndrome)’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타인을 게임 속 NPC(Non Player Character) 정도로 인식하는 것을 일컫는다. 서연은 ‘주인공 신드롬’의 완벽한 예다. 그에게 한정원과 노인지도 NPC였다. 그런데 이 NPC들이 갑자기 자아를 갖고 움직이면서 자기 게임을 펼치기 시작한다. 서연은 버그를 바로잡거나 게임을 종료하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노인지 때문이다.
극 중 NM 서비스는 부자들이 시간, 감정, 관계, 성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돈 주고 사서 정서를 충족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노인지가 한시적 매매혼을 허락한 데는 가난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양성애자와 결혼하려고 했다. 자기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 과신했고, 결혼이라는 사회의 공식 승인에 집착했다. 그 결혼이 파경에 이르고 나서 인지는 자기가 집착한 ‘제도’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배제된 계약 결혼에 뛰어들었다. 인지 역시 나름대로 자신을 벌주고 시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성 간 결합의 또 다른 변수인 ‘사랑’이 끼어들면서 인지의 프로페셔널리즘에 균열이 생기고 개인적 자아가 발현되기 시작한다.
상처받은 영혼의 구원 서사나 멜로에 집중하는 관객들은 물론 남녀 주인공인 한정원과 노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애틋하고 관심이 갈 것이다. 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사랑꾼이자 가족, 연인에게 피해만 받고 살아온 한정원은 극적으로 새로울 게 없는 캐릭터다. 두 여자의 사이코드라마에 집중하자면 정원은 일종의 트로피다. 서연은 타인을 지배하려 들고, 성적 매력을 과시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음침하다. 반면 인지는 타인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섹스에 미친 것 같지도 않고 외부의 자극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자기 상처는 스스로 돌보고, 타인의 상처는 감싸안는다. 지인은 서연과 스토커로부터 정원을 보호하고, 계약 결혼 중 임신을 해서 곤경에 처한 동료를 비롯해 자기만큼이나 한 많은 이웃, 친구들을 사려 깊게 보살핀다. 정원은 그런 지인의 입맞춤으로 오래 갇혀 있던 서연이라는 감옥에서 깨어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자,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두 여자의 사랑 중 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심판관이다.
불온한 소재와 서늘한 분위기에 비해 작품의 결말은 건전하고 따뜻하다. 제작진이 장르 실험과 대중 멜로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미스터리, 멜로, 사이코드라마, 무엇을 기대하건 조금씩은 서걱거리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건 제각각의 요소가 모두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당신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공유와 서현진인가, 서현진과 정윤하인가? 어느 쪽이건, 생생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발견하고 낯선 삶을 들여다보는 기쁨은 남을 것이다.
<트렁크>는 총 8부작으로, 2024년 11월 29일 넷플릭스에 전편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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