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너머 세상에 빛이 있는가, ‘한나 허: 8’
여러분은 미술 작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평소에는 관심 없었던,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었던 것들에 대해 골똘히 돌아보는 시간을 미술을 통해 얻습니다. 이를테면 조각을 살피다 보면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궁금해집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외부, 볼 수 없는 내부 중 그 조각을 설명하는 건 무엇일까요? 외부인 형태 혹은 재료일까요, 내부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조각 내부는 비어 있을까요, 꽉 차 있을까요. 이 작품의 가치는 외부 요소에서 기인할까요, 내부의 지점에서 올까요. 이런 답도 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무언가가 풍부해지는 느낌인데요. 이번에 두산갤러리에서 한나 허의 회화를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작가의 추상적인 그림이 던지는 선문답은 오직 전시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5년생인 한나 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입니다. 비영리 미술 기관인 두산갤러리는 한국 국적의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고 지지해왔는데요, 이번에 ‘한국 작가’의 의미를 한국계 디아스포라 예술가로까지 확장했습니다. 뉴욕 기반 큐레토리얼 오피스 C/O의 설립자 크리스토퍼 Y. 류가 공동 기획으로 참여했다는 것도 기존 두산갤러리 전시와 조금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여러모로 다소 특별한 의미를 띤 전시에, 한나 허의 경계적 작업은 매우 잘 어울립니다. 한나 허는 회화와 설치를 통해 우리의 시지각 체계를 시험하는 화면을 구성하고, 현실 너머의 정신적 세계에 다다르기 위한 작업을 해오고 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회화의 표면 아래 자신만의 초월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작가라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전시 제목 ‘한나 허: 8’에서 8이라는 숫자는 이번에 소개되는 회화의 수를 의미합니다. 작가는 기자 간담회에서 “8은 아름다운 숫자”라고 말했는데요. 꽉 찬 듯 비어 있는 이 숫자의 의미를, 작가는 설치를 통해 구현합니다. 네 벽을 둥글게 세우고, 벽의 앞뒤 혹은 안팎에 8점의 회화를 건 것이죠. 구조물의 외부에 놓인 작품들은 유동적인 형태의 모티브가 어두운 캔버스를 장식하고, 내부에 걸린 작품들은 가느다란 선과 까만 점, 붉거나 흰색의 배경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들은 붉은 부분과 흰 부분이 각기 다른 비율로 다른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이 작품들의 제목이 모두 ‘Threshold’, 즉 문턱 혹은 한계라는 점, “관객이 작품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넘어야 할 인식의 한계 영역을 은유한다”는 자료 속 문장을 떠올려보면, 이런 추상의 표현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매번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대면하는 문턱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이 구조물은 관객의 동선을 다양하게, 비전형적으로 이끕니다. 구조물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서 바깥쪽의 어두운 그림을 먼저 본 후, 안쪽에 놓인 작품을 볼 수도 있고요, 서로 나란히 등을 맞댄 두 작품을 번갈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구조물 내부에 놓인 작품이 인간 신체의 안쪽 혹은 내면의 정신을, 바깥쪽 작품이 신체의 바깥 혹은 우리가 사는 외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문제의 붉은색을 두고 “육체가 불에 타는 듯한 폭력성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말은 그렇다면 어두운색의 그림은 다 타고 남은 재 혹은 그 같은 상태를 표현한 걸까요? 두산갤러리 윈도우에 설치된, 한나 허가 초청한 동료 작가 나미라의 설치 작품은 붉은 공간과 까만색 점, 그리고 이 현실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을 재료로 삼아 전시장에서 본 한나 허의 회화 작품을 조각으로 연동시키고, 세상으로 확장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필연적인 ‘문턱’에서 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숨겨진 것을 보여주고 탐구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오래된 열망을 다시 확인합니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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