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 세계 미식가들이 주목하는 나라, 아르메니아의 여성 셰프 5인
언젠가 ‘아르메니아 요리 맛집’을 검색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미 전 세계 미식가들에게 새로운 테이블로 각광받기 시작한, 지금 가장 뜨거운 아르메니아 여성 셰프 5인을 소개한다.
최근 러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에 낀 나라, 조지아의 음식이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한 것을 알고 있나? (빵 한가운데를 찢어 종이배처럼 보이게 하고, 안은 치즈로 가득 채웠으며, 마지막으로 탐스러운 날달걀을 얹은 아자룰리 하차푸리(Adjaruli Khachapuri)가 좋은 예다.) 이번에는 이웃 나라 아르메니아와 그곳 식문화에 대한 전 세계 미식가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조지아, 튀르키예, 이란,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여 있으며, 하와이 정도 크기인 코카서스 남부의 작은 국가다. 과거 국가적인 어려움에 시달렸고, 여전히 주변 국가와 긴장 관계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자국에 찾아온 모든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한다.
아르메니아는 극진한 환대의 나라다. 어느 빵집에 가더라도 흔쾌히 빵 3개 정도는 덤으로 줄 것이고, 하이킹 도중 피크닉 즐기는 무리를 만나게 된다면 반가운 손짓을 건네며 아르메니아식 바비큐인 호로바츠(Khorovats)를 나눠 먹자는 초대를 건넬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는 보드카를 몇 잔 하면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에겐 음식이라는 만국 공통의 언어가 있으니까.
인도의 난이 연상되는 아르메니아 전통 빵 라바시(Lavash)부터, 그 안을 40여 가지 허브로 채워 산뜻한 풍미를 극대화한 진갈로브 하츠(Jingalov Hats), 버터 향이 진하게 배어나는 가타(Gata) 커피 케이크까지, 아르메니아 음식은 그곳의 유서 깊은 문화와 풍부한 유산, 자연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사와 다름없다. 1년에 300일 이상 지속되는 맑은 날씨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담수호인 세반호(Lake Sevan)가 이룬 자연환경 덕분에 세계에서 맛 좋기로 손꼽히는 과일과 채소의 생산지로 정평이 나 있다.
기원전 13세기 무렵 활동한 우라르투(Urartu)의 후손인 아르메니아에서는 아르메니아 음식의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점점 더 많은 셰프와 식품업계, 생산자들이 합심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이 요리를 맡아왔기 때문일까? 차흐쿤크 레스토랑 앤 글하툰(Tsaghkunk Restaurant & Glkhatun)의 아레비크 마르티로샨(Arevik Martirosyan) 같은 여성 셰프들이 아르메니아 전통 음식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의 아레니 1(Areni-1)이라는 동굴에 인류 최초의 와인 양조장이 있을 만큼 아르메니아는 와인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와인 바 인 비노(In Vino)의 공동 소유주 마리암 사가텔얀(Mariam Saghatelyan)은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는 내추럴 와인을 비롯해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신선하고 맛 좋은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마르티로샨과 사가텔얀을 비롯해 현재 아르메니아 요식의 선봉에서 새로운 재료와 요리법으로 아르메니아 미식 지도를 대범하게 확장 중인 요리 연구가 다섯 명을 만났다.
Arevik Martirosyan 아레비크 마르티로샨
차흐쿤크 레스토랑 앤 글하툰은 실은 엄청난 핫 플레이스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북쪽으로 차로 1시간가량 달려야 닿을 수 있는 해발 약 2,000m의 작은 마을 차흐쿤크로 수많은 미식가의 발걸음을 유도할 만큼 말이다. 광활한 산맥이 사방에 펼쳐져 있고, 소와 양 떼가 길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이곳이 바로 아레비크 마르티로샨 셰프가 전통을 기반으로 정교하게 재창조한 아르메니아 레시피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마르티로샨의 노력 덕분에 한때 러시아 농장 인부들의 구내식당으로 활약한 이곳은 모던한 아르메니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안식처로 변모했다. “메뉴 대부분은 전통 레시피를 제 나름대로 해석했조. 그러면서도 클래식한 풍미가 살아 있는 요리로 구성했어요.” 그렇게 과일과 호두, 야생 소렐(Sorrel)을 곁들인 라바시, 바삭하게 튀긴 아르메니아 전통 체칠 치즈와 버터밀크 요리, 세반호에서 잡은 백송어에 밝은 오렌지색 열매가 열리는 산자나무를 곁들인 메뉴가 탄생했다. “예를 들어 돌마(Dolma, 생선 요리) 자체는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음식이지만 거기에 곁들이는 소스는 재해석한 레시피예요.” 레스토랑 옆에는 토니르(아르메니아의 전통 진흙 화덕)가 자리한 몇 안 되는 11세기 석조 주택 글하툰이 있는데, 여기서 탄탄한 실력의 제빵사 고하르 가레지냔(Gohar Gareginyan)과 안나 예사얀(Anna Yesayan)이 라바시를 구우며 고대 아르메니아 식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예레반에서 조리 훈련을 받은 마르티로샨은 전통 요리와 새로운 레시피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뤘을까? “일단 정성을 다하는 것이 기본이고요. 또 다른 원칙은 음식에 현대적인 터치를 더하더라도 반드시 현지 식재료로 만드는 거죠.” 농부인 남편이 매일같이 제철 유기농 과일, 채소, 곡물, 콩을 레스토랑으로 조달해준다. 마르티로샨에 따르면 높은 고도에서 재배된 식재료는 맛이 더욱 진하다. 차흐쿤크 레스토랑은 지역 농촌 경관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인 ‘가가린 프로젝트(Gagarin Project)’에도 참여하고 있다. 차흐쿤크 레스토랑이 맨 처음 국제적으로 조명된 것은 코펜하겐의 유명 레스토랑 노마(Noma)의 공동 창립자 마스 레프스룬(Mads Refslund)이 이곳에 팝업 레스토랑을 열면서부터였지만, 이곳이 아르메니아의 요리 명소로 거듭난 것은 아르메니아 최고의 식재료와 문화를 빛내고자 애써온 마르티로샨과 현지 셰프 팀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Marina Shaqaryan-Mikayelyan 마리나 사카랸 미카옐얀
마리나 사카랸 미카옐얀(Marina Shaqaryan-Mikayelyan)이 복잡한 수도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단순한 삶을 꿈꾸기 시작한 순간, 미카옐얀 가족 농장(Mikayelyan Family Farm)의 비전이 현실화되었다. 현재 사카랸 미카옐얀은 세반호에서 멀지 않은 아르츠바카르(Artsvakar)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르메니아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수공예 치즈 생산 공장의 수석 치즈 메이커로 일한다. 그는 포도나무 잎으로 감싼 치즈, 석류 시럽에 절인 치즈, 아라라트 브랜디(Ararat Brandy) 코냑을 매일같이 조심스럽게 덧발라 2년 동안 숙성한 치즈 등 개성 있는 라인업을 갖췄다. “마리나는 치즈 휠만 보고도 그게 어떤 치즈인지 바로 알아요.” 함께 사업을 이끄는 그의 남편 아르만(Arman)의 증언이다.
로리(Lori)와 차나흐(Chanakh)가 오랜 시간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치즈로 꾸준히 사랑받았지만 사카랸 미카옐얀은 새로운 시도를 원했다. 과거 생화학자였던 그는 치즈와 관련된 온갖 서적과 수많은 실험을 통해 치즈 지식을 축적했다. 현재 이곳의 치즈 컬렉션에는 10종의 치즈가 리스트에 올라 있는데, 선보일 수 없는 버전까지 합치면 그간 만든 치즈는 50종이 넘는다. 하지만 사카랸 미카옐얀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 과정의 일부니까요.” 아르만이 거들었다. “좋은 결과보다 실패를 마주할 때가 훨씬 많아요.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죠.”
온 일가가 부부의 비전에 동참했다. 산지에서 직접 키우는 소에서 짜낸 우유를 성실히 공급하는 친척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카옐얀의 치즈는 수출용이 아니다. 이 치즈를 맛보려면 예레반에 있는 몇몇 레스토랑을 방문하거나 농장으로 직접 투어를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과 와인을 사랑하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늘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도시가 우리를 찾아온다며 마리나와 우스갯소리를 나누곤 한답니다.”
Ani Haroutiunian 아니 하루티우니안
2019년 아니 하루티우니안(Ani Haroutiunian)은 딜리잔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현지 식재료의 실험적인 조리법을 연구하는 스튜디오 암 푸드 랩(Arm Food Lab)을 열었다. “아르메니아 요리가 세계적으로 유행해서만은 아니었어요. 이런 궁금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죠. ‘아르메니아가 전 세계로부터 고립될 경우 우린 뭘 먹고 살아가게 될까?’ 같은 의문이요.” 곧바로 미술사학자에서 식량 연구가로 변신한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생물 다양성을 보유한 아르메니아의 식문화 유산과 이곳 생태계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깊이 탐구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 어떤 레시피를 발전시켜왔으며, 어떤 식재료를 사용하는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암 푸드 랩에 방문한 이들은 테스트 조리실로 인도되어 아르메니아 식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된다. 조리실의 테이블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올라간다. 산에서 자라는 허브를 곁들여 구운 가지에 아르메니아 발효 고추를 얹은 요리, 독성 때문에 생으로 먹으면 위험하지만 데쳐서 딸기 식초를 뿌려 먹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씁쓸한 감칠맛이 살아나는 신드리크(Sindrik) 같은 것 말이다.
늘 새로운 식재료를 탐구하는 하루티우니안은 2015년부터 재래종 곡물로 빵을 만들기 시작해, 아르메니아에서 사워도우 열풍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2021년에는 딜리잔에 우텔리에 베이커리(Ootelie Bakery)를 열었는데 이곳에서 직접 밀가루를 만들고, 주변 지역에서 공수한 아르메니아 밀과 호밀, 에머 밀(Emmer Wheat, 주로 가축 사료로 쓰이는 밀의 종류) 등으로 빵을 만든다. 최근 하루티우니안은 아르메니아 베이커리 지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빵 종류와 레시피에 필요한 곡물과 오븐의 유형, 지역별로 가장 유명한 제빵사의 기술 등 모든 정보를 담아낼 계획이다.
Mariam Saghatelyan 마리암 사가텔얀
2012년 예레반 최초의 와인 바, 인 비노가 문을 열었을 때 그 지역 일대에는 분명 새바람이 불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자매 레스토랑 타파스탄(Tapastan)이 생겼고, 어느덧 이 거리는 사랸가(Saryan Street)라는 이름보다 ‘와인 거리’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됐으니까. 또한 예레반에서 펼쳐지는 연례행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예레반 와인 데이즈(Yerevan Wine Days) 역시 이곳에서 열린다. “처음 오픈했을 땐 가게에서 소개하는 아르메니아산 와인이 10종 정도밖에 안 됐어요. 지금은 600종이 넘죠.” 인 비노의 공동 소유주인 마리암 사가텔얀의 말이다. “그 전까진 아무도 와인을 마시지 않았어요. 모두 보드카만 마셨죠.”
6000년이 넘는 와인 생산 역사를 보유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는 소련이 붕괴된 후 많은 포도밭이 사유화되면서 밀밭과 채소밭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다시 포도 재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일고 있어요. 좋은 일이죠.” 아르메니아 EVN 와인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가텔얀은 인 비노에서 와인 테이스팅을 주관하거나 와인 교육을 실시한다. 직접 와인을 만들기도 하는데, 바요츠조르주(Vayots Dzor Province) 고산지대에 자리한 유서 깊은 아레니 1 와인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트리니티 캐니언 빈야즈(Trinity Canyon Vineyards)에서 와인을 생산한다. 트리니티 캐니언 빈야즈는 아르메니아에서 처음으로 유기농 인증을 받은 포도원이다.
아르메니아인 부모 아래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가텔얀은 이제 예레반을 떠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예레반은 어떤 형태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새하얀 빵 반죽 같아요.” 그가 예레반의 식문화를 두고 한 말이다. 최근에는 예레반 외곽에 와인 바 겸 테이스팅 룸 ‘6100’을 열고 흥미로운 시음 프로그램 기획에 매진하고 있다.
Varda Avetisyan 바르다 아베티샨
아르메니아의 미식 수도로 꼽히는 딜리잔(Dilijan)은 아르메니아 북부에 자리한 동명의 국립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컬러풀한 의상으로 레스토랑에 활기를 돋우는 바르다 아베티샨(Varda Avetisyan)은 호평받는 두 레스토랑, 크추치(Kchuch)와 타바(Tava)를 이끈다. 예레반에서 태어난 그는 시카고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딜리잔과 사랑에 빠져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딜리잔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다양성 넘치는 도시예요. 국제적인 대학 UWC 딜리잔 칼리지를 중심으로 바쁜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모여든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멋진 공동체를 이루고 있거든요.” 아베티샨은 아르메니아 북부에서 흔히 사용되는 벽돌 오븐으로 요리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메뉴로는 지역 특산품인 야생 버섯처럼 딜리잔 주변 숲에서 나오는 제철 식재료를 전통적인 진흙 냄비와 무쇠 팬에 조리한 것이 돋보인다. 타바에서는 여기에 ‘아주 오래되고 단순한 아르메니아 요리’ 하실(Khasil)을 더하는데, 구운 밀과 캐러멜라이징한 양파, 정제 버터, 요구르트를 소금에 절여 말린 다음 물을 넣고 섞어 만드는 초라탄(Choratan)으로 구성한 요리다. “그걸 약간 우리식으로 변형했어요. 소스에 힘을 더 주고, 벽돌 오븐에서 구웠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베티샨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타 파이도 재해석했다. 가타 파이는 전통적으로 버터, 설탕, 때에 따라 견과류를 섞어 속을 든든하게 채운 파이로 섬세한 장식을 올려 완성한다. 그러나 아베티샨의 창의적인 버전은 소만 있고, 위에 빵을 덮지 않는다. 게다가 블루베리와 레몬, 치즈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요리에 자주 활용하는 허브 타라곤(Tarragon)을 더해 예상치 못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제게 음식은 지역적인 것, 전통처럼 오래된 것, 거기에 새롭고 창의적인 것을 더해 다채로운 문화와 음식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예요.”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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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사진 & 글
- JESSICA JUNGB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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