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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신성하다고 믿기로 했다

2024.12.09

일은 신성하다고 믿기로 했다

일은 신성하다. 일하고 또 일하고 만들고 또 만들어야··· 일하기 싫어서 미친 게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기 시작했다.

Mak2, ’Out of Body Experience’, 2018, Vinyl, PC computer, screens, rock salt, light, tissues, two digital videos. HDV 2:37 DE SARTHE

노동 클래스

쾅쾅쾅. 호텔 객실 문이 울렸다. 노크 수준이 아니라 불이라도 난 것처럼 긴박한 소리여서 깜짝 놀라 나가다 미끄러졌다. 손과 엉덩이가 축축했다. 욕조에서 넘친 물이 문밖까지 흐르고 있었다. 놀라서 문을 여니 서너 명의 룸 어텐던트가 ‘이제야 나온 거야?’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가서 수도꼭지부터 잠가’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다급한 손짓이 욕조를 가리켰다.

당시 나는 업무 관련 카톡을 하던 중이었다. 짜증이 치솟는 일이었는데 2주가 지나니 떠오르지 않는다. 뭐가 그리 괴로웠는지 궁금해 카톡 창을 다시 열었는데 세상에, 별거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취소된 촬영을 다시 성사시켜야 했고, 이 때문에 관련 스태프에게 볼멘소리를 듣던 중이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풀이해?’ 이 마음이 주변을 노이즈 캔슬링했다.

직원들과 함께 객실 청소를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요.” 연신 사과하면서도 ‘내 탓만은 아니라고요’ 속으로는 울컥하며 1시간여간 물을 닦아냈다. 무거워진 젖은 수건을 옮겨 담으니 세 자루가 넘었다. 잠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쯤 해도 돼요, 우리가 할게요’란 소리를 하지 않아 서운하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닦아낸 후 뜨거운 공기를 요란스럽게 뿜는 기계로 카펫을 말렸다. 주변 객실도 시끄러웠을 테니 정말 민폐였다. 결국 청소 비용 200유로를 냈다. 나 때문에 불려온 직원들에겐 한 푼도 가지 않았을 거다.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방이 한강이 된 것도 몰랐잖아요”라고 아까 카톡 하던 스태프에게 칭얼댔지만 그는 눈물 흘리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 “너도 참 너다.” 다른 동료에게 얘기해도 이런 반응이었다. 입김이 나오는 프라하의 밤, 물비린내 나는 방의 창을 열고 심호흡하며 중얼거렸다.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지난 20년간 7번 퇴사했다. 8년 전 <보그> 입사를 위한 최종 면접에서 나온 질문은 “자네는 왜 이리 자주 옮겼나?”였다. 당시 나보다 더 많이 이직한 면접자가 있었으니, 운이 따랐다. 7번 퇴사는 때려치우든가를 7번 실천한 것인데, 이유는 갖가지였다. 과로사 할 거 같아서, 상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병이 나서, 그냥 여행 가고 싶어서 등. 나도 <보그>에 이렇게 오래 다닐 줄 몰랐는데, 그것은 매체에 대한 애정(보고 계시죠?)도 있지만, 직장 생활의 사이클을 어느 정도 이해해서다. 죽을 것 같던 일도 이 또한 흘러갔고, 괴로운 상사는 어디에나 있으며, 그는 직장 생활이 만들어낸 가여운 캐릭터라는, 나도 누군가에게 씹히고 있다는 등의 깨달음과 체념이다.

그리고 월급이 들어온다. 보통 사람처럼 먹고살게 해주는 월급이 얼마나 귀한지. 100만원을 받아도 맘 편히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싶다던 동료의 말에 공감한 적 있지만, 맥도날드도 직장 생활의 허들이 있다. 식당을 개업한 친구는 불특정 타인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고 토로한다. 그래서 나는 ‘럭키하다?’는 오만이고, 그저 이 상태에 감사하기로 한 것이 생애 최장기 근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욕조 사건’처럼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긴다는 억울함,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불안감, 이게 맞나 싶은 허망함 등이 꾸준히 찾아왔다.

이런저런 마음이 얽히는 와중에도 출퇴근한다. 경기도 광명에서 서울 논현동으로, 그리고 다시 광명으로. 때때로 흡족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 때 같은 드물고 희귀한. 또한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대출금은 어찌 내고 부동산 시장이 바닥인 지금 아파트를 팔고 귀농이라도 할 건가. 앞으로 뭐 먹고 살 건데? 프리랜서 시장이 얼마나 추운지 아니? 요즘 개업하면 열에 여덟은 문 닫는다. 대학 졸업 후 쭉 내 입에 내가 밥숟가락을 넣는 노동자의 운명을 순간의 기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그 밑천도 떨어져가니까.

초라해지던 차에 우연히 릭 오웬스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어깨까지 매끈하게 내려온 검은 생머리, 정돈된 눈썹, 늘 그렇듯 단순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일하라고 반복한다. “내 일이 내 삶이에요. 구분이 없어요. 언제나 이렇게 일했어요. 정직하고 진실하고 순수하게 되거든요. (중략)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만들고 또 만들다 보면 좋든 나쁘든 그게 뭐든 당신의 정체성, 성격, 비전이 드러나요. 일하고 일하고 충분히 많이 만들면 그중 하나를 골라 편집할 기회가 생기고 그게 곧 ‘나 자신’이 될 거예요.”

멋지다. 그의 컬렉션처럼, 머릿결처럼. 근데 나도 열심히 일했는데? 뭔가 타고나야 릭 오웬스가 되지 않나. 하지만 그의 말 어디에도 ‘성공’이란 단어는 없다. 그는 일하는 동안 진실하고 순수해지며,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이 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오는 것이 성공이든 돈이든, 인정이든 상관없다.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블이 회자한다. ‘Work-Life Blending’의 준말로 일과 삶을 적절히 섞는다는 의미다. 워라하(Work-Life Harmony, 일과 삶의 하모니), 워라인(Work-Life Integration, 일과 삶의 통합)도 있다. 다 비슷한 뜻으로 일과 여가를 분리하려 애쓰지 말고,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혹시 직원을 편히 부리려고 기업에서 퍼뜨리는 용어 아닌가 싶지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워라밸에 진심이었거든? 퇴근 후 개인 시간만 기다렸지. 야근이라도 하면 진짜 화났어. 그러다 보니 24시간 중에 일하는 최소 8시간은 불행했어.”

1년에 한 번 가는 여행만 바라보기보다 평상시 만족해야 행복 다수결에서 이기듯이, 나도 하루 3분의 1을 차지하는 불행의 시간을 바꾸고 싶다. 여전히 불합리한 직장 생활이지만 ‘적어도 일은 신성하다’는 마음으로.

인간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강력하다. 영국 서식스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캐서린 베일리(Catherine Bailey)와 그리니치 대학교 조직 행동학과 강사 아드리안 매든(Adrian Madden)이 10개 직군의 종사자 135명을 연구한 결과, 일의 의미에 관한 특징은 다섯 가지다. 첫째, 우리는 타인과 환경에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 일을 의미 있게 느낀다. 둘째, 행복한 순간 말고도 고통스럽고 도전적일 때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일은 때때로 뜻깊게 다가오지, 지속적이지 않다. 넷째, 일할 때 의미를 느끼기보단 나중에 회상하면서 가치를 인식한다. 다섯째, 일의 의미는 개인의 삶과 연관되지, 관리자나 조직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다. 결국 상사의 입바른 칭찬이 아니라 자기만족이 중요하다.

나도 한때는 상사의 인정을 바란 적 있다. 인간에게 인정 욕구는 그 무엇보다 강하니까. 그래서 독자나 내가 아니라 상사를 위한 기사를 쓴 적도 많다. 세상에, 한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 일한다니 우습다. 내가 인류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특정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 합격점을 받고 싶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어요.” 젊은 뮤지션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종종 이런 목표를 얘기한다. 그들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해외여행을 가면 가판대에 널린 잡지가 유독 작아 보인다. 오늘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한 여행에서 잡지는 무용하기까지 하다. 물론 잡지에 실린 정보로 누군가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내 칼럼을 읽으며 5분 정도 공감했다면 엄청난 성취일 거다. 하지만 지금은 릭 오웬스처럼 일의 성취를 나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라디오 프로듀서인 친구는 매일 소리로 사라지는 것을 만들다 보니 허망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누군가 순간이나마 재밌어하면 됐고, 무엇보다 제1 청취자인 내가 좋으면 돼.”

그리고 위로되는 말, 일의 의미는 단편적으로 때때로 오며, 힘들고 도전적이고 슬프기까지 한 경험에서도 비롯된다지 않나. 종일 활기차게 넘치는 의욕으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직장인 대상 설문에서 일하며 가장 행복한 때로 ‘월급날’이 꼽히곤 하는데, 적어도 다른 때도 기쁨이 찾아오길 바란다. 그러려면 릭 오웬스처럼 일해야겠지? 일하고 또 일하고, 일하면서 내가 순수하게 되며···

칼 라거펠트의 이 말도 의지가 됐다. “저 자신을 세계적인 유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노동자 클래스죠. 클래스 있게 노동하잖아요?”

그래, 칼 라거펠트도 릭 오웬스도 나도 고결한 노동자야. 나를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올려도 죄책감 없다. 매일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 일과 ‘씨름’하는 노동자는 존경받아 마땅하니까. 이제 내 목표는 클래스 있는 노동자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COURTESY OF
DE SARTHE, ©Ma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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