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예술계가 사랑한 건축가,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미술관

2024.12.11

예술계가 사랑한 건축가,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미술관

텅 빈 공간이지만 건축가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그가 기능을 넘어 의미와 역할까지 감지하자 전 세계 미술관이 한층 역동적인 무대로 변모했다.

팬데믹 시기 그와 연인 아우터브리지에게 소중한 피난처가 돼준 메인주의 페노브스콧만에서 아나벨레 젤도르프가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다. 뉴욕에 자리한 건축 회사에서 젤도르프는 내년 4월 개관을 목표로 프릭 컬렉션 재건축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중이다.

예술계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건축가 아나벨레 젤도르프(Annabelle Selldorf)의 최신 포트폴리오는 뉴욕의 미술관, 프릭 컬렉션이다. 젤도르프 덕분에 나는 안전모를 쓰고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공사 현장을 둘러봤다. 애당초 올 연말을 겨냥했던 재개관까지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프릭 컬렉션의 재개관 시점은 내년 4월로 미뤄졌다). 우리의 발걸음은 거대한 타원형 공간에 설치된 비계 위에 멈췄다. 이 널찍한 오디토리엄은 프릭 컬렉션이 선보이는 아주 새로운 공간이 될 것이었다. 알이 부화하기 직전,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아기 새가 된 기분이었다. “이 공간은 무채색이었으면 했어요.” 젤도르프가 입을 열었다. “흐린 하늘이 역동적인 무채색을 띤 광경이 언제 봐도 매혹적인 것처럼요.” 맨 처음 젤도르프는 인부들이 똑같은 흰색 페인트를 천장에 여러 겹 덧바르는 광경을 바라보며 일종의 ‘무(無)’와 같은 효과가 이곳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확신을 현실화하는 데는 색이 필요치 않았다. “곧바로 결단했죠. ‘좋아, 여기서 그만. 더 이상 뭔가를 하려 들지 말자.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좋아’라고 말이에요.”

그가 직접 언급한 ‘무의 효과(The Nothing Effect)’는 젤도르프 건축의 핵심이다. 바로 그것이 그를 건축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목표는 이것이다. 분명 무언가가 느껴지지만 그 이유가 눈에 띄지는 않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 <뉴욕 타임스>의 건축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Michael Kimmelman)의 표현이다. “아나벨레의 건축은 엄격하면서도 미시안(Miesian,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주창한 모더니즘 건축 사조)적 질서로 가득하며 자재에도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재료와 기술만 과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건축에는 인간적인 감수성도 엿보인다. 아나벨레는 공간을 예술로 격상시키는 오늘날의 가장 사려 깊은 건축가다.”

1960년 쾰른에서 태어난 젤도르프는 건축가인 아버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부모는 독일의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비카(Vica)에서 가구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사실 비카는 젤도르프의 할머니 루도비카(Ludovica)가 1950년대 설립한 회사다. 젤도르프는 자신이 만든 뉴욕의 어느 공간에서 ‘아나벨레 젤도르프의 비카’라는 이름으로 가구, 조명, 액세서리 등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1980년부터 뉴욕에 거주한 젤도르프는 1988년에 자신의 건축 회사를 세웠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출신의 슈퍼 컬렉터 미하엘 베르너(Michael Werner)가 그에게 뉴욕 갤러리 건축을 의뢰했다. 미술계와의 끈끈한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젤도르프는 제프 쿤스, 에릭 피슬, 에이프릴 고닉 등의 예술가를 위해 공간을 디자인했고, 데이비드 즈위너와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 등을 설계했다. 1997년에는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는데 로널드 로더(Ronald Lauder)가 뉴욕 5번가의 맨션을 자신이 이제껏 수집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표현주의 미술품을 전시할 사립 미술관으로 탈바꿈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곳이 바로 노이에 갤러리다. 젤도르프가 능력을 확실히 인정받은 계기였다. 건축가 카레와 헤이스팅스가 1914년 지은 건물을 노이에 갤러리로 완성한 이 프로젝트는 이후 카레와 헤이스팅스가 지은 또 다른 건축물인 프릭 컬렉션의 재건축을 젤도르프가 맡게 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젤도르프가 “단연코 뉴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이라 소개한 프릭 컬렉션 외에도 그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 온타리오 미술관, 워싱턴 D.C.의 허시혼 뮤지엄 등 대규모 리모델링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거나 진행 중이며, 뉴욕 브루클린 도미노 슈가 팩토리 재건축을 겨냥한 새로운 거주 타워를 비롯해 맨해튼, 롱아일랜드, 멕시코, 무스티크 등에 호화로운 저택도 지었다. 대형 클라이언트들이 젤도르프의 훌륭한 경청 능력 덕분에 그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필요할 때 망설임 없이 이견을 제시하는 편이다. 프레데릭 말이 사우샘프턴 바닷가의 사유지에 현대적인 버전의 소금 그릇형 가옥(Saltbox House, 어떤 면에서는 단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집을 가리키는 건축양식)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젤도르프가 한 말이 여전히 회자될 정도다. “절대 안 돼요! 바닷가 전망을 끼고 빛이 그런 식으로 들어오게 설계한 집은 지을 수 없어요! 창이 작은 집은 결사 반대예요!”

가족과 함께 메인에 머물며 직접 촬영한 스냅사진. 1840년대 저택이 젤도르프의 손길이 닿자 아늑한 보금자리로 탈바꿈했다.

젤도르프는 보르도 근처에 저명한 와이너리 샤토 오 브리옹의 새로운 양조장을 짓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기 직전에는 연인 톰 아우터브리지(Tom Outerbridge)와 함께 머물 요량으로 메인주 페노브스콧만의 외딴섬에 자리한 ‘아주아주 소박한’ 1840년대 가옥을 보수하는 작업을 마쳤다. 톰의 가족이 대대로 여름을 보낸 추억이 깃든 의미 있는 장소였다. “톰은 그 섬을 정말 사랑해요.” 젤도르프가 증언했다. “우리 관계가 꽤 오래 이어진 뒤에야 그 섬에 저를 초대할 정도였으니까요. 만약 제가 그 섬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우리 연애에 큰 위기가 닥쳤을 거예요.”

젤도르프와 민간 재활용 수거업체를 운영하는 아우터브리지, 그리고 웰시코기와 래브라도리트리버 믹스인 열두 살 주시(Jussi)는 팬데믹 기간에 그 섬에서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젤도르프가 프릭 컬렉션의 오디토리엄에서 형용한 ‘무’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장소였다. 건축의 도움 없이 하늘과 바다의 움직임만으로 그 섬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길도, 선착장도, 상점도, 시장도 없이 오직 집 몇 채가 이루는 풍경이 전부인 섬에는 팬데믹 직전인 2019년, 지금 돌아보면 딱 필요한 순간에 비로소 인터넷이 보급됐다. 재택근무가 빠르게 보편화된 세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젤도르프와 아우터브리지는 비로소 자신들의 안식처에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살던 어떤 도시에서보다 섬에서 우린 훨씬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건축에서 아주 중요한 설계, 비율, 축척 같은 것들을 컴퓨터 스크린으로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했죠.” 젤도르프가 털어놓았다. “연필(0.9mm짜리 노란색 펜텔)을 잡고 일해요. 컴퓨터로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기 힘들거든요.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건 아주 큰 제약이었어요.” 젤도르프는 아주 재능 있고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약 70명의 동료와 일하는데 그중 몇몇과는 벌써 20년 넘게 함께했다.

연인과 함께 섬에 머무는 동안 젤도르프 건축 사무소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허시혼 뮤지엄 프로젝트로 건축상을 받았다. 내셔널 갤러리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세인즈버리 윙의 입구 안팎을 손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젤도르프의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인 데니스 스콧 브라운(Denise Scott Brown) 같은 유명 건축가들의 공공연한 비판을 몰고 왔다. 스콧 브라운의 회사가 1991년에 내셔널 갤러리를 설계하고 완공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비판에는 더 무게가 실렸다. “젤도르프가 근사한 건축물을 발레 스커트를 입은 서커스 광대처럼 만들고 있어요.” 스콧 브라운은 2022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물론 젤도르프가 스콧 브라운의 적대적인 반응을 산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스콧 브라운이 동업자인 그의 남편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와 함께 1996년 재건축한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의 보수 및 확장 공사를 젤도르프가 맡게 됐을 때 스콧 브라운은 70여 명의 건축가, 비평가, 사적 보존 운동가를 만나 ‘끔찍한 실수’를 중단하라는 항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미술관은 2022년 재개관했다.)

젤도르프는 내셔널 갤러리 커미션 작업을 맡게 됐을 때 가장 먼저 스콧 브라운을 찾아갔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서로 화해하고 비로소 괜찮은 관계를 맺게 될 거라 여겼어요.” 젤도르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재건축을 단념할 거라는 어이없는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예정된 운명이었어요. 세인즈버리 윙의 상태가 온전치 않았거든요. 중앙 출입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죠.” 회전문과 복잡한 창문은 미술관 출입구를 혼잡하고 정신없게 만들고 있었다. 젤도르프는 그런 공간을 정돈하고 단순화했으며 외부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 미술관 관람 경험이 더 수월하고 일관성 있게 확장되도록 유도했다. 언론에 보도된 모든 비판과 불만을 충분히 검토한 끝에 웨스트민스터 시의회는 젤도르프에게 끝내 청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새로운 윙은 2025년 5월 관객을 맞이하게 된다. “앞으로도 내셔널 갤러리는 스콧 브라운의 건축물로 기억될 뿐이지 제 건축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거예요.” 젤도르프가 이야기했다. “그게 맞다고 봐요.”

내가 처음 <보그>에 젤도르프에 관한 기사를 쓴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젤도르프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그는 세계기념물기금(WMF), 바드 칼리지 큐레이터 연구 센터, 마파의 차이나티 재단, 미국 문예 아카데미 등 역사적인 건축을 관리하는 중요한 그룹에서 이사회 일원으로 선임되었고, 자신의 임무와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성과와 무관하게 젤도르프는 여전히 공공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오가는 일상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유니언 스퀘어 마켓에서 주로 생선 같은 식료품을 사와 간단하게 완성한 요리를 톰과 함께 음미하며 일상적 대화를 주고받는 삶을 말이다.

하나의 거대한 조각 작품 같은 프릭 컬렉션의 새로운 오디토리엄을 두 가지 각도에서 다르게 감상했다. 젤도르프 건축 사무소가 맡은 미술관 재건축의 핵심이 되는 공간이다.

고집하는 뚜렷한 건축 스타일도 없고, 스타 건축가로 이름을 날린 것도 아니지만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에 미묘하지만 강렬한 현대적 색채를 더하는 일을 젤도르프보다 더 잘하는 건축가는 없다. 특히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프릭 컬렉션의 오디토리엄은 건축가로서 젤도르프의 개성을 가장 웅장하게 드러낸 건축물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두고 벌인 건축가 70여 명과의 경쟁에서 젤도르프는 당당히 기회를 움켜쥐었다. 프릭 컬렉션의 디렉터이자 큐레이터 이안 워드로퍼(Ian Wardropper)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나벨레는 역사적인 건축물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예리한 감각으로 죽어버린 건물의 영혼을 되살리는 데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건축가입니다. 스스로에게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과거와 잘 융화시키죠. 프릭 컬렉션 재건축을 맡게 된 아나벨레가 과거의 유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새 공간을 찾는 방문객이 오디토리엄에 서서 어떤 것이 오래된 것이며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인지 가늠해보는 시간을 누리길 바랍니다.” 젤도르프의 지휘 아래 기존에 사랑받던 음악실은 철거되었다. 상설 전시장과 연결되면서도 특별 전시의 무대가 될 공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젤도르프의 그런 선택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워드로퍼는 말한다. “발전을 위해서는 때로 이전에 있었던 것을 없애야 하는 경우가 생기죠. 음악실은 언제나 공간의 목적에 비해 너무 협소했고, 음향 시설도 열악했어요.” 조각 작품처럼 매끄럽게 재단한 220석 규모의 오디토리엄에서는 앞으로 콘서트와 강연, 퍼포먼스 등이 펼쳐진다. 이곳의 새 이름은 미국 사업가 스티븐 A. 슈워츠먼(Stephen A. Schwarzman) 재단의 기부를 기리며 스티븐 A. 슈워츠먼 오디토리엄으로 지었다.

하지만 젤도르프의 가장 독특한 프로젝트는 페사크의 보르도 마을에 설계한 샤토 오 브리옹 와인 양조장일 것이다.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대한 와인 양조장의 수장은 룩셈부르크의 로버트 왕자로, 공교롭게도 그와 젤도르프의 연인 아우터브리지는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메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며 친구가 되었다.) 로버트 왕자는 젤도르프와도 죽이 잘 맞는 사이인데 이들이 양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버트 왕자는 완벽한 탄소 중립적인 구조를 갖춘 최신식 복합 와인 제조 기계를 원했다. 또한 박물관이 딸린 안내소를 통해 방문객에게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오 브리옹의 오랜 역사를 알리고 싶어 했다. “아나벨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가 브루클린의 선셋 파크에 재활용 시설을 지은 다음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짓는 만능 건축가라는 것이에요.” 로버트 왕자가 설명했다. “바로 그런 점을 보고 아나벨레라면 샤토 오 브리옹의 위용을 깊이 이해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게다가 아나벨레의 성격과 재능은 우리 와인의 캐릭터와도 잘 어울렸죠.” 마지막 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하자 로버트 왕자가 웃으며 덧붙였다. “우선, 샤토 오 브리옹 와인은 절제미가 가장 큰 매력이에요. 깊이 있고, 우아하죠. 지적이라고 할까요? 아나벨레도 마찬가지예요. 고요하게 흐르는 깊은 호수 같은 사람이죠. 시간을 들여 깊이 고민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기 위해 일하지 않아요. 그는 늘 신중하게 말하고 특정한 질문이나 문제에 정확하게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죠. 그런 사려 깊은 성정과 절제미가 우리 프로젝트에 시너지를 낼 거라 믿었습니다.”

젤도르프는 건축자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도 오래 고심하는 편이다. 그는 새로운 양조장의 외부를 흙다짐(Rammed Earth) 공법으로 작업하기로 정했는데 흙다짐 공법이란 흙을 다져 만든 벽돌과 기타 자연 재료를 활용하는 고대 건축 방식이다. “땅이야말로 와인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젤도르프가 설명했다. “포도 농장의 토양을 건축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주 상징적이고도 중요한 일이었어요.”

기하학적 외관을 자랑하는 브루클린 도미노 공원의 주거 타워 건물(55층 높이의 건물 한 동과 39층 높이의 또 다른 한 동으로 이루어졌다)을 지으며 젤도르프는 스페인의 진줏빛 타일을 활용해 하늘에 드리운 햇빛의 변화를 매 순간 다르게 반사하는 건물을 디자인했다. “분명히 땅 위에 존재하는 건물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특히 하늘이 흐린 날이면 이 타워는 놀랍도록 아름다워요. 어마어마한 건물이죠.” 메인에서 바라본 광활한 하늘을 상상하며 작업한 것일까? “그건 아니에요”라고 그가 답한다. “하지만 무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죠. 분명 제 무의식은 하늘과 관련 있을 거예요. 그건 분명해요. 어떤 시간대에는 건물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그렇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 언제나 저를 매혹하죠.”

가족을 위한 메인의 저택은 전부 나무로 만들었다. 안쪽은 하얀색 소나무, 바깥쪽은 삼나무로 되어 있다. 맨 처음 그 집을 구입했을 때 젤도르프와 아우터브리지는 주말 혹은 짧은 휴가에만 그곳에 머물 예정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곳에 최대한 오래 머무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여전히 두 사람은 시간 여유가 생길 때마다 반려견 주시를 차에 태우고 그곳으로 향한다. 물론 젤도르프가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만 가능한 일이지만. (지난 몇 주간 젤도르프는 런던을 세 번이나 다녀왔으며 보르도와 텍사스, 파리도 방문했다. 그는 파리의 이브 생 로랑 박물관 리모델링 작업에 새롭게 착수했다.) 바쁜 삶이지만 젤도르프는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애쓴다. 주말에는 도보 여행 삼아 울창한 나무숲과 바위 해변을 돌아다니곤 한다. 때때로 랍스터 낚시 장비를 장착한 자신의 보트 위에서 아우터브리지와 점심 피크닉을 만끽한다. “도보 여행에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걷는 걸 정말 좋아하긴 해요.” 젤도르프가 이야기했다. 그와 아우터브리지는 (아나벨레의 말에 따르면 “트럭보다는 조금 작은”) 소형 SUV를 타고 길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섬을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또한 아우터브리지가 정원에서 직접 기른 라일락과 상추, 호박, 토마토 등의 채소를 따오면 젤도르프는 그걸 신선한 요리로 재탄생시키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아나벨레 젤도르프는 6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건축에 매료돼 있다. “이 일을 왜 이렇게 사랑하는지 요즘 들어 더 자주 돌아봐요.” 늦은 오후, 젤도르프는 메인 저택에 꾸민 새하얀 2층 사무실에서 내게 얘기했다. “프릭 컬렉션에서 이안과 함께 일하고 난 뒤 제가 아주 실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기준은 있지만 어떨 때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그것을 기꺼이 내려놓기도 해요. 건축가는 저에게 예술가보다는 전문직에 가깝게 느껴져요. 갖가지 이론을 건축에 창의적으로 반영해볼 순 있지만 무엇보다 공간의 본질을 면밀히 살펴야죠. 사람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활보할지, 방문객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 방법은 없는지 고려할 의무가 있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좋은 건축은 안식처이자 사회의 기능에 대한 신중한 고민을 수반해야 합니다. 건축은 예술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젊었을 때는 신선한 건축자재가 잘 어우러진 공간을 만드는 데 심취했지만 지금은 달라요. 사람들이 이 공간에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누비길 바라는지 더 많이 고민하죠. 그러니 건축에서 공간은 결국 ‘무’에 수렴되는 요소인지도 몰라요.” ‘무’의 공간은 어떤 형태인가요?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종일관 모든 것에 신경 쓰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수행하는 공간이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그 부분이 정말로 중요해요.”

젤도르프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데이비드 즈위너의 첼시 갤러리 개관식을 꼽았다.

젤도르프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데이비드 즈위너의 첼시 갤러리 개관식을 꼽았다. 올 초 유명을 달리한 추상 조각의 거장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그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이다. “리처드가 물었어요. ‘당신이 이 건물을 지었나요?’ 제가 그렇다고 하니 그가 ‘정말 훌륭해요’라고 말해주었죠. 그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을까요?” 내가 말했다.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없었군요. 당신의 프릭 컬렉션 오디토리엄처럼요.” 젤도르프가 호응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만큼요.” (VL)

    피처 에디터
    류가영
    사진
    ANNIE LEIBOVITZ
    DODIE KAZANJIAN
    COURTESY OF
    DAVID ZWI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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