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 시상식 룩과 작가코어
작가로서 대성취를 이뤘는데 또 여자라고 옷 얘기냐, 하는 사람들은 가라. 존경이 넘친 나머지 영혼의 포장지라도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불안정한 시국 때문에 금세 사그라든 ‘텍스트 힙’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안간힘이라 봐도 좋다.
노벨 시상식 이벤트 내내 한강 작가는 블랙 셔츠, 재킷, 드레스 등을 착용했다. 메이크업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꾸준히 소설로 추모해온 한국 근현대사의 피해자들을 기린다거나, 또다시 사망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모국의 민주주의를 애도하는 뜻은 아닐 게다. 아니, 아닌 게 아닌가? 하여간 이 룩은 유행의 중심에는 설 수 없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어떤 감성을 상기시킨다. 이른바 ‘작가코어(Writercore)’다.
만일 당신이 나이보다 일찍 세어버린 듯한 흰머리를 틀어올리고 핏 좋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린 채 형형한 눈빛을 한 중년 여성을 마주치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글 잘 쓰시게 생겼다.’ 이런 게 작가코어다.
핀터레스트에서 작가코어를 검색하면 스크린이 세피아 톤으로 변한다. 이 키워드에는 그만큼 클래식하고 아날로그한 성질이 담겨 있다. 작가란 자신의 표현욕이 동인이고 독자의 신뢰와 관심이 연료인 직업이다. 그래서 그들을 대표하는 아이템이 셔츠다. 클래식함, 지성미, 성숙미, 서재의 아늑함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아이템이다. 시대에 뒤처진 듯 보일 염려도 없다. 셔츠는 작가들에게 꽤 실용적인 아이템이기도 하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목 위로 끌어당겨 입고 벗는 옷이 귀찮기 마련이다. 차라리 단추 여밈이 편하다. 다림질이 필요한 드레스 셔츠보다는 오래 앉아 있어도 구김이 안 가거나 설령 구김이 가도 자연스러운 소재여야 한다.
역시나 클래식함과 아늑함을 강조하는 질 좋은 니트와 카디건, 어쩌다 한 번씩 있는 대외 활동에 항상 입고 다녀도 상대의 기억에 깊이 남지 않는 검정 재킷 역시 유용하다. 색감의 어울림을 고민할 필요 없는 무채색, 자연색이 그들을 대표한다. 그래서 작가코어는 캡슐 워드로브(Capsule Wardrobe)를 꿈꾸는 사람들이 눈여겨볼 스타일이기도 하다.
<슬픔이여 안녕>(아르테(arte)),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민음사)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작가코어의 대표 아이콘이다. 그는 편안한 셔츠, 슬랙스, 블랙 니트, 스트라이프 티셔츠, 화이트 티셔츠 등 기본 아이템만으로 숱한 불멸의 이미지를 남겼다. 그의 셔츠 컬렉션은 특히 인상 깊은데, 무채색이나 스트라이프뿐 아니라 체크나 호피 무늬도 자주 활용했다. 이후 프랑수아즈 사강의 스타일은 숱한 여성 작가들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노멀 피플>(아르테(arte))을 쓴 샐리 루니는 ‘MZ 세대 대표 작가’로 불린다. ‘스냅챗 세대의 샐린저’, ‘더블린의 프랑수아즈 사강’이란 별명도 있다. 그런 그도 인터뷰나 공식 석상에서 셔츠를 즐겨 입는다.
<타인의 고통>(이후)에서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예리하게 통찰한 수전 손택은 그 자신의 포트레이트 사진들로 원했건 원치 않았건 강렬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었다.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담대하고 지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모든 지성인의 이상과도 같은 오라다.
<어둠의 왼손>(시공사)을 쓴 SF, 판타지계의 레전드 어슐러 르 귄은 데뷔 초인 30대부터 말년인 80대 후반까지 일관되게 무채색 셔츠와 니트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가 실제로 뭘 입고 다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주로 그랬다.
작가들은 평소에는 알록달록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코를 후비거나, 책을 탈고할 때마다 핑크 슬립을 입고 섹시 댄스를 추며 자축을 하거나, 집에 택배 상자가 쌓여 있는 쇼핑광일지라도 공식 석상에 나설 때는 셔츠와 재킷을 입고 싶어지는 이상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X세대의 패션 바이블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에서 마침내 섹스 칼럼집을 출판하게 된 캐리 브래드쇼는 표지 사진 문제로 사만다와 다툰다. 캐리는 사만다가 골라준 분홍색 깃털 달린 비키니 의상이 창녀 같다고 불평한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옳은 선택을 하는 건 대체로 사만다지만 이번만은 캐리가 옳다. 결국 그들은 블랙 재킷과 하의 실종 룩으로 타협을 보고 만족한다. 전통의 작가코어를 섹시하게 변형한 의상이다. 섹스 칼럼이건 뭐건 간에, 작가라면 모름지기 똑똑하고 권위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게 작가에게 세상이 기대하는 이미지기도 하다.
<블러드차일드>(비채)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자신의 어두운 피부색에 잘 어울리는 알록달록한 옷을 자주 입었다. ‘아프로 퓨처리즘’의 선구자답게 아프리카 토속 문양도 애용했다. 그러나 국내 출간된 책 중 그의 포트레이트를 표지로 쓴 유일한 책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마음산책)은 무난한 화이트 폴로 셔츠 차림을 담고 있다.
영화 <추락의 해부>(2023)와 <룸 넥스트 도어>(2024)에는 모두 여성 작가가 등장한다. 전자는 눈 덮인 겨울 산장에서 소설가의 남편이 추락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주인공 산드라 휠러의 의상은 모호한 사건의 전말만큼이나 채도가 낮다. 카키색이나 남색 셔츠, 아가일 스웨터 등 여성 작가라면 떠올릴 법한 이미지를 충실히 재현했다. 반면 <룸 넥스트 도어>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취향으로 작가코어를 재해석했다. 셔츠, 스웨터 등 베이식 아이템을 활용한 건 마찬가지인데 색감이 과감하다.
수전 손택의 말마따나 이미지와 실재는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 작가 대부분은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거북목, 디스크, 복부비만, 하지정맥류에 시달리면서 원고를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스타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석변개하는 유행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는 그 이미지가 유독 그립다.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고 세상 모든 것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현자의 눈은 우리가 갖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서 스타일 한 조각쯤 훔쳐내는 건 괜찮지 않겠는가.
- 포토
- Getty Images, 영화 '추락의 해부', '룸 넥스트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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