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물에서 발견하는 우리 이야기, ‘구본창: 사물의 초상’

2024.12.14

사물에서 발견하는 우리 이야기, ‘구본창: 사물의 초상’

광주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에서 내년 3월 30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개인전 <구본창: 사물의 초상>을 보면서 사물이야말로 취향과 역사, 일상과 서사를 품은 완벽한 그릇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어떤 피사체든 그 물성과 내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데서 작업을 시작하고 끝맺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이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어떤 사물이든 사람의 손에서 태어나 제 쓸모를 다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기 마련이죠. 구본창의 뷰파인더는 사물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까지 담아냅니다. 마치 초상 사진이 어느 한 사람의 얼굴에 난 시간의 길을 기록하듯, 사물에 새겨진 다채로운 시간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구본창, ‘비무장지대 04’,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반복 재생, 박외연, 101세, 6·25 당시 아들 전사, 전쟁기념관.

이번 전시는 인류 문화 예술의 틀을 바꾼 아시아 현대미술의 거장을 소개하는 2024 ACC 포커스 기획전의 첫 주자입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진의 선구자’ 구본창의 대표작을 연대별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주제 혹은 소재별로 단정히 구획해 보여줌으로써, 작가 작업 세계에 한결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이끕니다. 덕분에 구본창이라는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유물 혹은 사진을 찍었는가가 아니라, 이 사물들의 어떤 이야기에, 왜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6·25 당시 사용된 전쟁기념관의 소장품을 찍은 ‘비무장지대’ 연작에는 애틋한 사연이, ‘인테리어’ 연작에는 텅 빈 공간에 남은 기운과 온기가 가득합니다. 유명 대표작인 ‘백자’ 연작이나 ‘청화’ 연작뿐 아니라 프랑스 고건축양식의 특징적 요소인 샤스루나 쓰다 남은 비누를 찍은 연작 등은 구본창의 세계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구본창, ‘백자 BM 04 BW’, 2006, 마(麻)에 프린트, 173×131cm, 백자 달 항아리, 조선시대, 영국미술관.
구본창, ‘샤스루 54’, 2003,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79×63cm.

<사물의 초상>은 구본창의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한 흔적이 돋보이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대형 영상 설치 작품으로 진화한 ‘비무장지대’ 연작은 사진이 영화 이상의 감흥을 선사할 수 있음을 일깨우고, ‘황금’ 연작은 라이트박스에 담긴 채 바닥에 설치되어 마치 진짜 유물을 발굴하는 듯한 흥미로운 순간을 선사합니다. 그 위에는 5.5m 길이의 거대한 천에 프린트해 대형 족자 형태로 선보이는 ‘백자’ 연작이 바람처럼 나부끼며 공감각적 경험을 만들고, 최초로 공개된 <코리아 판타지> 영상은 전통 단청의 이미지를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한국적인 색과 해학성을 재해석합니다. 탈을 쓴 춤꾼들을 정직하게 포착한 ‘탈’ 연작과 장례 문화에서 사용하던 꼭두를 따뜻한 색을 배경으로 담은 ‘꼭두’ 연작이 가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행위와 사유 모두 적극적으로 변모해 생기를 띱니다.

구본창, ‘황금 KR 045’, 2023, 사진 라이트박스 설치, 187×148×12cm, 금령총 금관(金鈴塚 金冠), 삼국시대(신라), 국립중앙박물관.
구본창, ‘코리아 판타지’, 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반복 재생.
구본창, ‘구본창의 사물들’, 1998~2003, ‘탈’ 시리즈, 대형 카메라 폴라로이드.

형식미와 내용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본창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매 순간 새로운 걸 찾아 나선 작가의 시도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해당 사물 하나하나를 향한 지극한 애정이 느껴지더군요. 아마 그건 작가가 관람객에게 자신의 시선을 기꺼이 공유하기 때문일 겁니다. 작가의 권한을 부여받은 저를 비롯한 관람객들은 이 사물에 내재된 역사와 드러나는 형태, 거대 서사와 미시 서사를 차근차근 발굴해냅니다. 그 자리에서 발견한 건 바로 사물과 함께 삶을 꾸려온 우리의 초상이었습니다. 사물의 이야기는 곧 이를 사용했던 이들의 이야기이고, 둘의 관계는 사진이라는 예술로 기억됨으로써 다시 태어납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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