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시녀의 목소리를 들어라
작금의 세계 앞에서 영화도 소설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현실의 시간과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는 예술, 현실의 재현을 자처하는 예술은 압도적인 현실의 힘 앞에 얼마간 속수무책일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이럴 때일수록 찾게 되는 것이 바로 고전(古典)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아무 이유도 찾지 않고 그저 기대고 싶어진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반복해 읽어도 좋을 만큼 힘이 있는 게 바로 고전일 테니까. 그것을 달리 말하면 고전에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한 시대의 요청과 필요에 호응할 수 있는 가능성, 너른 틈이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보편성을 숙고하면서도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모든 것을 무력화하거나 무화하지 않는 것. 단일한 힘으로 수렴되지 않는 것. 고전은 그런 것.
페미니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장편소설 <페넬로피아드>(2005, 문학동네)(참고로 올해 새로운 번역 개정판이 나왔다)는 바로 이러한 고전의 힘에 빚지되 고전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기세등등 파고든다. 애트우드가 관심을 기울인 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로 특히 1991년 펭귄 클래식판 <오디세이아>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전하고 고향 이타케 왕국으로 돌아오기까지 20년의 세월. 그 사이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의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정숙한 아내로 자리한다. <오디세이아>는 ‘꾀바른 영웅(이 표현을 둘러싼 이견을 애트우드는 놓치지 않고 책에 풀어낸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몰살하고 그들에게 겁탈당한 열두 시녀를 교수형에 처한 후 아내와 재회하는 데서 끝난다.
애트우드가 <오디세이아>에서 던지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시녀들이 교살된 까닭은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 <오디세이아>에 실린 이야기는 물샐틈없이 논리 정연하지 않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 나는 교살당한 시녀들을 줄곧 잊을 수 없었는데, <페넬로피아드>에 등장하는 페넬로페도 그들을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13쪽) 그리하여 애트우드는 이 책의 화자를 교수형에 처한 열두 명의 시녀와 페넬로페로 삼는다.
‘나는 죽고 나서 다 알게 되었다.’(14쪽) 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인 명부(冥府), 그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죽은 자 페넬로페다. 이 책은 그녀의 목소리로 시작해 진행된다.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코러스 라인은 일종의 ‘시녀들의 합창’으로 그리스 연극에서 공연했던 합창을 모방했다. 페넬로페의 회상, 소회, 진의가 담긴 증언과 구술과 시녀들의 합창이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나가는 구조다. 자신을 죽이려 한 아버지, 자신에게 냉담한 어머니, 정 붙이기 힘든 시부모, 트로이전쟁을 일으켜 남편과 생이별하게 한 원인 제공자 사촌 헬레네, 소식은 없고 온갖 어지러운 소문만 난무한 남편, 자신을 무시하는 아들, 간악한 구혼자들까지. 이 사악한 미몽의 틈바구니에서 페넬로페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사랑한 존재가 바로 열두 명의 어린 시녀들이다. 그런 시녀들, 소녀들이 죽은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그녀들을 죽인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시녀들 역시 자신의 소유물이자 재산이라는 이유로 주인의 권능을 무자비하게 휘두른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페넬로페는 시녀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페넬로페를 완전히 전복적인 캐릭터로 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얼마간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남는다. 시녀들이 죽던 학살의 순간, 페넬로페는 약삭빠른 시녀가 내준 음료를 마시고 내내 잠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그 음료에는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을 텐데 그로 인해 페넬로페는 학살 현장에서 얼마간 빠져나와 있을 수 있었다. 시녀들을 향한 죄의식이 있지만 그럼에도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에게 자신과 시녀들의 친밀한 관계를 끝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로는, 말만큼은 남편을 믿는다고 끝까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녀들은 달랐다. 시녀들은 마지막까지 오디세우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정의를 부르짖었다. 복수를 호소했다. 특히 ‘제26장 오디세우스의 재판’에서 들려오는 시녀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또렷하고 생생하다. “우리는 정의를 원합니다! 인과응보를 원합니다! 살인죄 심판을 호소합니다! 분노의 여신들께 탄원합니다!”(201쪽) 시녀들이 호소하는 대상 역시 분노와 복수의 여신들이라니. “분노의 여신들이여, 오 복수의 여신들이여, 당신들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원수를 갚아주십사 간청합니다! 살아생전에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한 우리를 옹호해주세요! 이곳이든 저곳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장하든, 누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든, 끝까지 그를 뒤쫓으세요!… 그리고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파멸당한 모습으로, 이 비참한 시체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세요! 부디 한순간도 쉬지 못하게 해주세요!”(202쪽) 이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한 외침인가. 특히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파멸당한 모습으로, 이 비참한 시체의 모습으로’라는 구절에는 울분이 깊게 서려 있다. 결코 이대로 지워질 수 없다는 시녀들의 매서운 결기마저 느껴진다. 마거릿 애트우드를 통해 고전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새롭게 읽어낸다. ‘<페넬로피아드>의 진정한 주인, 목소리는 페넬로페도 아니요, 바로 이 열두 시녀들이구나!’라고.
‘우리도 여기 있어요. 이름 없는 여자들.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여자들. 남들이 불명예를 씌운 여자들. 손가락질받는 여자들, 손장난당하는 여자들.’(211쪽) 그 누구보다 바로 이 열두 명의 여인이 여기 있음을 느낀다. 이상하고 괴이하고 망측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목소리가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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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s24,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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