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적이거나 비현실적이거나! 2024년의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해리 리드 공항에서 마주한 두 갈래 길. 한 번은 정열적인 도시 중심부로, 또 한 번은 도시 바깥의 사막으로 질주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
2008년 개봉한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에서 인생의 패배감을 맛본 두 주인공(카메론 디아즈와 애시튼 커처)은 반전을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도피를 택한다. 라스베이거스는 “골치 아픈 모든 걸 싹 잊고 무뇌아가 되는 곳”이자 “향락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하는 장면은 호텔과 쇼핑몰, 클럽, (풀)파티, 대용량 칵테일, 슬롯머신, 열정과 사랑의 향연이다. 최근 내가 경험한 라스베이거스 역시 영화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빛바랜 아름다움, 다소 공허한 환락으로 행복 지수를 끌어올리는 도시인 줄 알았던 라스베이거스는 발 빠르게 고도화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번뜩이는 선견지명으로 가득했으니까.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남서부 네바다주 남부 사막 가운데 자리한 건조한 도시다. 그러다 1931년 주 정부가 카지노 도박업을 합법화하면서 순식간에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고, 특히 전후 시기에 카지노로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호텔과 엔터테인먼트 부대시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며 미국에서 가장 큰 관광도시가 됐다(매년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관광객은 4,000만 명을 웃도는데 이는 서울보다 4배가량 높은 수치다).
월요일 저녁 8시, 라스베이거스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안착한 게이트 앞은 서로 다른 국적의 아시아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인천은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라스베이거스로 향할 때 거치는 주요 거점 지역. 팬데믹 이후 특히 2023년에는 더 많은 여행객이 몰렸고, 드디어 지난 10월 말부터 대한항공의 인천-라스베이거스 직항 노선은 매일 운항으로 증편됐다.
작열하는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인 10월 말 라스베이거스의 날씨는 쾌청했다. 상공에서부터 눈에 띈 라스베이거스의 새로운 랜드마크 스피어(Sphere)가 도심으로 향하는 택시를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이 112m, 너비 157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구체 구조물의 위용을 드러냈다. 1946년 12월 라스베이거스 중심의 스트립(Strip) 거리에 최초로 안착한 플라밍고 호텔, 화려한 분수 쇼로 여전히 사랑받는 벨라지오 호텔, 베니스의 풍경을 품은 베니션 리조트, 최근 오픈한 퐁텐블로까지, 휘황한 야경의 주체가 되는 글로벌 호텔이 건축, 문화, 레저, 미식 등 다방면에서 ‘최고’라 부름받기 위해 각자만의 매력과 스케일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처음 며칠은 고풍스러운 매력이 흐르는 패리스 호텔에서, 이후 여정은 거대한 수영장이 펼쳐져 객실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해방감이 느껴지는 리조트 월드의 힐튼 호텔에서 보냈다. 분위기는 상반됐지만 야경과 카지노만큼은 어느 호텔이든 변함없이 화려했다.
평균 수천 개 객실을 갖춘 리조트는 라스베이거스가 초국적 이벤트를 저돌적으로 개최하게 하는 지원군이다. 꾸준히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와 세계 3대 건축 전시회인 국제건축전시회(IBS)의 둥지가 돼온 라스베이거스는 최근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시상식과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F1 레이스인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도 개최했다(리사가 최근 토마토색 스카프를 두르고 참석한 F1이 바로 여기다). ‘쇼’의 도시답게 월드클래스급 공연도 매일같이 이어진다. 2020년 레이더스 미식축구 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스베이거스로 연고지를 옮기며 문을 연 6만5,000석 규모의 얼리전트 스타디움은 롤링스톤스와 메탈리카를 비롯한 록 스타와 방탄소년단, 테일러 스위프트, 블랙핑크, 비욘세 등 팝 스타의 무대가 되어 잊지 못할 밤을 선사했다. 팝콘이 아니라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로봇 ‘아우라(Aura)’와 대화하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는 공연장 스피어 역시 아이맥스와 4D 영화관을 합친 놀라운 몰입감으로 공연의 미래를 보여준다.
라스베이거스 여정이 반환점을 돌던 날 저녁,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이 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승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베이징 덕과 와규를 앞세운 퐁텐블로의 퓨전 레스토랑 코모도(Komodo)로 향하는 길에도 수많은 사람이 슬롯머신과 테이블 게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실력과 크게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탑골프(Topgolf)에서 치열한 오전을 보낸 뒤였다. 난생처음 잡아본 ‘대왕’ 골프채로 화면 속 가상현실에서 보이는 가장 가까운 홀만 노린 끝에 일행 중 최종 순위 2위를 차지했을 때, 엄청난 도파민이 치솟았다. 오후에는 스피드 베가스(Speed Vegas)에서 수많은 슈퍼 스포츠카 중 페라리 488 GTB를 골라 타고 기록 경쟁에 뛰어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레이싱을 돕는 믿음직한 인스트럭터를 믿고, 생각은 뒷좌석으로 밀어둔 채, 스피드에 몸을 맡긴 시간. 작은 승부에 집중하고 순간에 몰두하다 보니 라스베이거스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더 링크 호텔에서 경험한 ‘디스코 쇼(Disco Show)’는 예상보다 더 화끈한 시간이었다. 나는 핑크색 장미가 빼곡히 그려진 셔츠와 부츠컷 팬츠 차림이었지만, 반짝이는 스팽글 아이템을 입고 ‘Girls Night Out!’을 부르짖는 여자들과 셔츠에 경량 패딩을 덧입은 비즈니스맨, 맨투맨을 입거나 스니커즈를 신고 편안하게 즐기는 힙스터 등 드레스 코드는 자유분방했다.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는 댄서들이 완벽한 짜임새와 리더십으로 모든 관객이 주인공이 되게끔 이끌어주니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손쉽게 리듬을 탔다. 쇼가 끝난 다음에는 심박수가 꺾이기 전에 대관람차 하이 롤러(High Roller)를 바라보며 여운을 되새길 수 있는 스포츠 펍으로 향했다. 라스베이거스 도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불의 계곡(Valley of Fire)’에서 사막의 절경을 만끽하긴 했지만 도심 밖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도 라스베이거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은 무궁무진했다. 대관람차 안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며 해피 아워를 즐길 수 있고, 환상적인 야경 사이를 질주하는 레이싱 카를 바라보며 고든 램지의 그릴 요리를 맛보고, 스타디움 안에 자리한 스위트룸에서 커스텀 스시 롤을 먹으며 원하는 공연과 경기를 최전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주한 모든 사람은 언제나 순간을 더 즐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보성 멘트가 섞이긴 했지만, 그런 마음이야말로 사막 위에 기적처럼 건설된 라스베이거스가 먼지로 뒤덮이지 않고 반짝임을 유지하는 가장 큰 에너지였다. 즐거움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라스베이거스는 지금 이 시간에도 최신 업데이트 중이다.
별들의 사원
한 달 후 다시 라스베이거스 해리 리드 공항. 지난 라스베이거스 여행의 뜨거운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최대한 먼 곳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5시간쯤 달렸을까, 밤이 깊었으니 그럴 리 없건만 환한 기운이 느껴져 눈을 뜨니 총총한 은하수가 놀랄 만큼 낮게 깔려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 틈에 어느새 리버사이드, 세인트조지, 콜로라도시티, 커내브를 지나 유타주 레이크 파월 지역에 자리한 사막의 요새 아만기리(Amangiri)에 다다른 것이다. 정말이지 멀고 먼 여정이었다. 도착 시간은 밤 10시. 리조트의 형태와 스케일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사막의 새까만 밤에 모두 묻혀버렸고, 객실 테라스마다 피워둔 난로와 체크인을 도와준 호텔 직원의 다정한 음성에 의지해 인천을 떠난 지 17시간 만에 사막의 안식처에 당도한 나는 여독과 함께 첫날 밤을 맞았다.
여행지에 늦은 시간 도착하는 경우에는 다음 날 아침에 펼쳐지는 풍광에 대한 기대가 한층 솟구치기 마련이다. 푸른 하늘과 노르스름한 암석, 날카롭게 메마른 식물··· 발치의 낯선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제까지 경험한 호텔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치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테라스로 향했다. 어젯밤 직접 불을 피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벤치를 넘어 조금 더 걸어가니 리조트와 영영 멀어져 무한한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황량한 곳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일단 본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평화로운 산’이라는 뜻의 아만기리는 372ha, 112만5,300평에 걸친 부지에 단 34개의 스위트룸을 보유하고 있다. 가족 단위로 머물 수 있는 사파리 로지 형태의 파빌리온 ‘캠프 사리카(Camp Sarika)’도 새롭게 문을 연 지 5주년이 되었다. 식사가 가능한 장소는 두 곳. 매일 다른 메뉴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캠프 사리카의 레스토랑도 흥미로웠지만 언제나 내가 머문 스위트룸과 가까운 아만기리 레스토랑으로 향하곤 했다. 메뉴는 클래식하지만 맛깔스럽고 신선한 요리로 가득했다.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부터 유타 앵거스 버거, 비리야니(인도식 볶음밥) 등 다양한 국적의 요리를 시도했지만 전통 방식으로 구운 캐스트 아이언 팬케이크와 주문 오류로 맛보게 된 비건 메뉴, 로마네스코 브로콜리 스테이크가 특히 환상적이었다.
도쿄와 뉴욕 등 최근에는 도심 한가운데로도 영역을 뻗치고 있지만 아만 리조트는 은밀한 자연 속에 우아하게 안착했을 때 매력이 극대화된다. 건축이든, 풍경이든, 라이프스타일이든,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만의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만기리 역시 사막의 광활함을 직접 누빌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앞세우고 있다. 내가 선택한 투어는 나바호(북미 인디언 부족) 출신 가이드와 함께 총 세 곳의 협곡을 3시간 동안 탐방하는 ‘스리 슬롯 캐니언 투어’. 운전, 여행, 요리, 사진 등 많은 것에 능통한 가이드 ‘아몬(Ammon)’ 덕분에 사막에 대한 많은 단서를 획득한 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사진(포토그래퍼 피터 릭(Peter Lik)이 촬영한 사진으로 650만 달러에 낙찰됐다)의 배경이 된 어퍼 앤털로프 캐니언(Upper Antelope Canyon), 방울뱀처럼 얇고 구불구불한 협곡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래틀스네이크 캐니언(Rattlesnake Canyon), 신비로운 두 마리의 부엉이를 꿈처럼 마주했던 아울 캐니언(Owl Canyon)을 탐험하며 거친 땅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물론 협곡 투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아찔한 비아 페라타(Via Ferrata, 이탈리아어로 ‘쇠로 만든 길’이란 뜻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용으로 설치한 인공 보조물이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클라이밍과 날씨가 화창할수록 인기가 좋은 파월호에서의 보트와 카약, 다채로운 코스로 세심하게 짜인 하이킹, 승마, 육중한 캔암 매버릭을 몰고 사막을 질주하는 오프로드 어드벤처, 열기구와 헬리콥터까지, 아만기리에서 사막을 누비는 법은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다.
헤일리 비버와 카일리 제너, 두아 리파와 제니 등이 꾸준히 휴가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으로 이목을 끌긴 했지만 실제로 와보니 아만기리에는 여유롭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짙었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은 아만기리 레스토랑으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이곳에서는 시시때때로 토착 원주민의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구성한 러그 위빙, 드림캐처와 플루트 만들기 워크숍도 진행된다). 투숙객이 많지 않고, 다들 리조트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인상이 금세 눈에 익었다. 사막과 수영장 뷰 중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자리를 골라 앉은 사람들은 눈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체로 느리고 고요하게 식사를 만끽했다.
특유의 명상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2년 전 밀림에 둘러싸인 아만노이(Amanoi)에서도 느낀 것처럼 아만의 리조트에서는 몸의 요구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진다. 둘째 날 저녁 6시, 다른 투숙객이 하나둘 레스토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자 허기보다 꺼지지 않은 포만감과 운동 욕구를 더 강렬하게 느낀 나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처럼 아름답게 설계된 계단 끝에 자리한 그곳에서 어깨, 등, 복부, 하체를 골고루 움직이며 마감과 긴 비행으로 한층 경직된 몸을 풀어줬다. 그러자 두 발이 자연스럽게 스파와 마사지 룸, 온수 욕조와 사우나, 스팀 룸으로 이루어진 워터 파빌리온 쪽으로 향했다.
오전에 마사지와 개인 필라테스 강습을 받으며 눈도장을 찍었던 야외 욕조는 저녁이 되니 한층 신비로운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최근 제니와 손흥민의 피로 해소법으로 화제가 된 콜드 플런지에 도전했다. 차가운 욕조에 오직 나 혼자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몸을 완전히 물속에 밀어 넣기까지 열 번도 더 뛰쳐나가야 했다. 힘겨운 자기 주문 끝에 첫 1분에 다다르자 조심스럽게 찾아온 평온. 제니처럼 콜드 플런지를 통해 “삶이나 창작에서 오는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법을 깨닫는” 지경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내 몸의 충동적인 필요에 귀 기울인, 아주 사소한 것에 집중한 시간은 무형의 불안을 거둬내고, 신선한 활력을 안겨주었다.
역동적인 체험과 나만의 방식대로 누린 웰니스와 마인드풀니스, 서울보다 훨씬 느긋했던 식사로 이루어진 아만기리의 균형 잡힌 시간이 지나고 마주한 감정은 뜻밖에도 아쉬움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비현실적인 풍광에서 그만큼 몰입도 높은 안식을 누린 덕분인지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도전 욕구도 솟구쳤다. 예상한 것보다 추운 날씨에 가져간 옷을 본능적으로 껴입으며 시도한 맥시멀한 히피 룩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삶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진 채, 나는 다시 해리 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여행 동반자였던 드라이버 ‘돈(Don)’은 매년 1월 아만기리가 재정비를 위해 잠시 문을 걸어 잠그는 시즌에 맞춰 이번에는 도쿄로 향할 것이라 말했고, 우린 서로 사이좋게 ‘굿 럭’을 주고받았다. 만족스러운 2025년의 시작이었다. (VK)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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