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가 100년간 종이 신문에 매료된 까닭
미우미우의 2025 봄/여름 컬렉션은 신문 공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서 펼쳐졌습니다. 천장에는 갓 뽑아낸 듯한 인쇄물이 레일을 따라 끝 모르게 늘어섰고, 모든 게스트의 좌석에는 신문이 놓여 있었죠.
신문의 헤드라인은 ‘The Truthless Times’, 즉 ‘진실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신문에는 여러 개의 QR 코드가 새겨졌는데요. 그중에는 슈몬 바사르(Shumon Basar)의 에세이 ‘우리는 엔드코어의 시대에 살고 있다(We’re in the Endcore Now)’가 링크되어 있었습니다. 바사르는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여기던 것들은 거짓이 됐고, 이제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종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며 ‘엔드코어’의 개념을 설명했죠. 미우치아 프라다가 게스트에게 신문을 나눠준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미디어인 신문을 활용해, 거짓 정보가 난무하는 현세를 꼬집은 거죠. 일종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2025 봄/여름 컬렉션에도 신문을 액세서리처럼 활용한 룩이 연달아 등장했죠. 오프닝을 장식한 모델은 반으로 접은 신문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몇 모델은 톱 핸들 백 위에 신문을 올려둔 채 런웨이를 걸었고요. ‘더 스텔라 타임스(The Stella Times)’에는 환경보호를 위해 스텔라 맥카트니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패션은 반드시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문을 활용했죠. 그녀가 공개한 2024 겨울 캠페인의 타이틀이 ‘It’s About Fucking Time(이제 그럴 때도 됐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밀라노 패션 위크에도 신문이 등장했습니다. 주인공은 모스키노였죠. 미우치아 프라다와 스텔라 맥카트니가 신문으로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운 반면, 아드리안 아피올라자는 신문을 위트 넘치는 소품처럼 활용했습니다. 신문 1면에는 클로징을 장식한 모델의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고, 사진 속 그녀의 눈은 동그랗게 파여 있었죠. 하우스의 DNA와도 같은 ‘캠프’ 미학의 정수였습니다. 수전 손택이 에세이 ‘캠프에 대한 단상’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위적인 동시에 진지했죠.
이쯤 되면 눈치챘겠죠. 패션쇼에 신문이 등장하는 것은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근 있었던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런던 패션 위크의 떠오르는 문제아, 딜라라 핀디코글루의 2024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도 신문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헤드라인은 ‘OMG Dilara is Doing a Satanic Orgy at a London Church(딜라라가 런던의 교회에서 악마적인 파티를 열었어)’였죠. 한때 맥퀸 하우스의 적임자로 거론된 런던의 앙팡 테리블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조나단 앤더슨은 신문의 본질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중에게 최신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역할이죠. 로에베의 2021 가을/겨울 쇼 당일,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 <르 몽드>, 스페인 신문 <엘 문도>, 영국 신문 <타임스>의 독자들은 신문 한 부를 받았습니다. 1면에는 “로에베 쇼가 취소되었다”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죠.
신문과 협업한 브랜드도 있습니다. 2018년 8월 13일 <뉴욕 포스트> 1면과 맨 뒷면에는 슈프림의 상징적인 박스 로고만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타블로이드 신문과 뼛속까지 반항적인 슈프림의 만남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죠. 이날 <뉴욕 포스트>는 발행 부수 모두 완판되었으며, 이 ‘슈프림 에디션’은 한동안 10배가 넘는 리셀가(약 12달러)에 거래됐습니다.
때로 신문은 디자인을 위한 영감이 되기도 합니다. ‘뉴스페이퍼 프린트(신문을 무늬로 활용하는)’는 그 자체로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패턴이죠.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존 갈리아노입니다. 그는 디올에서 ‘부랑자(Clochard)’라는 타이틀의 2000 봄/여름 꾸뛰르 컬렉션을 선보였는데요. 다소 괴기스러운 비주얼로 화제를 모았던 쇼에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지면을 인쇄한 팬츠가 등장했죠(전설적인 패션 평론가, 수지 멘키스가 재직하던 당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어느 매체보다 패션을 깊이 있게 다뤘습니다). 갈리아노는 “신문지를 덮고 센 강변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를 위한 헌사”라고 컬렉션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는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쇼가 끝난 직후, 프랑스 ‘노숙자 위원회(Comité des Sans Logis)’ 소속 노숙자들이 디올 본사 앞에 모여 시위를 했죠. 물론 갈리아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보란 듯이 뉴스페이퍼 프린트 룩을 런웨이에 올렸거든요.
1960년대 아이콘 트위기 역시 신원 미상의 디자이너가 제작한 신문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적 있습니다. 1935년에는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자신의 기사가 나온 신문으로 드레스를 만들었고요. 그녀는 자서전에서 덴마크 여행길에 신문으로 만든 모자를 쓴 낚시꾼을 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뉴스페이퍼 프린트의 기원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사실 존 갈리아노 이후 이 프린트를 자신의 시그니처로 삼은 디자이너는 없다시피 합니다. 펑키하고 위트 넘치는 미학을 추구하던 제레미 스캇 같은 디자이너가 간간이 그 명맥을 이을 뿐이었죠. 패션계와 점점 멀어지는 줄 알았던 신문이 최근 런웨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자이너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문은 최신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신문 사업이 사양산업으로 꼽히지만, 커다란 회색 종이에 적힌 활자의 무게감은 여전하죠. 우리는 늘 신문에 인쇄된 정보를 신뢰했습니다. 미우미우와 스텔라 맥카트니는 이 고전적인 미디어를 활용해 각자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한 거죠. 자금 부족으로 1년 만에 쇼를 선보인 딜라라 핀디코글루는 신문이라는 매체가 지닌 상징성에 기댔습니다. 신문에는 결코 인쇄될 일 없는 외설스러운 문구를 ‘대서특필’하며 자신의 귀환을 공식화했죠.
종이 신문이 완전히 없어지는 먼 미래에도, 런웨이에서는 신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때도 분명 디자이너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고, 그들 중 몇몇은 수백 년간 정보를 전달했던 신문을 선택할 테죠.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뉴스페이퍼 프린트가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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