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한국적 심상

2024.12.31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한국적 심상

소녀, 치마저고리, 새, 족두리, 꽃, 물고기, 날개, 정자, 나비, 등잔. 교집합은 아름다움이고, 합집합은 명상이다. 전체집합은 한국적 심상이다.

‘새벽’, 2010, Acrylic on canvas, 80.0×116.5cm
갑사 색동저고리와 두록색 명주 치마.
살굿빛 명주 저고리.
생쪽 생명주 저고리와 연분홍 생명주 치마.
연분홍 갑사 저고리와 가지색 명주 치마.
소색 명주 저고리와 쪽빛 은조사 치마.
날염한 아사 실크 원단으로 만든 티셔츠.

YONDER

When the wind blows far away,
My soul of serenity on the horizon of
Vanishing memory,
that barely endured
Harsh winter yet forming no icicles.

In the twilight
when memory flashes back
of a young lad,
Whose eyes still
shed
tears momentarily,
Though wiping them
time after time.

In the end
failing to find any good cause
nor excuse in my blurred vision,
I curl up my sleeve,
and point younder of nowhere.

─ Hangryul Park

‘기다림’, 2021, Acrylic on canvas, 72.7×60.6cm
도토리로 염색한 모시 저고리와 숯으로 염색한 옥사 치마.
송화색 생명주 저고리.
황토로 염색한 무명 저고리와 검정 무명 치마.
검정콩으로 염색한 명주 저고리와 검정 무명 치마.
깃에 금박을 입힌 은행색 생고사 장옷.
호박단 색동저고리와 검정 무명 치마.
소목색 명주 저고리와 검정 무명 치마.
노란 꽃 장식을 더한 갑사 저고리와 보랏빛 은조사 치마.
날염한 아사 실크로 된 진분홍 저고리와 치마. 의상은 모두 김혜순 한복(Kimhyesoon Hanbok).

화두 話頭 TOPIC

한복 입은 소녀를 그리고 싶어 화가가 그림을 내놓은 때는 1996년이었다. 그냥 한복을 입은 소녀를 그리고 싶었다. 소녀는 아름다운 인간형이고, 한복은 그 아름다운 사람이 입을 만한 것이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 그림을 보고 한복 장인이 온통 마음을 빼앗긴 해도 그 무렵이었다. 한복을 알아서 그린 것이 아니라 한복이 좋아서 그린 남다른 조합과 형태가 좋았다. 한국화를 좋아했던 사진가가 그 그림을 보고 동양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해서 서툴러도 뜨겁게 개인 작업을 했던 때는 2018년이었다. 2020년 사진가는 한복 장인의 공간에서 운명을 맞닥뜨리듯 그 그림을 다시 만나고 선 손목의 솜털을 뉘었다. 사진가 조기석은 한복 장인 김혜순과 박항률의 작품을 화두로 몇 해간 이야기를 나눴다. 한복과 소녀, 한국적인 것,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초현실. 상상과 추상, 발견과 발전, 명상과 향토성까지. 화두는 그렇게 지평을 넓혀갔다.

경의, 존경, 감사(의 표시) 獻詞 HOMMAGE

고구려 벽화에 있는 비어를 박항률의 그림에서 보았을 때 조기석은 쓰기 싫은 표현으로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한국 소녀의 얼굴 위에 있는 붉은 비어. 상상의 날개는 그 물고기의 옆선에서 조기석의 전두엽으로 와서 솟아났다. 한복을 입은 소녀의 머리, 손, 등 위로 뻗어나가는 명상의 이미지를 당대의 미학적 기준에 가두어 다르게 찍어보고 싶었다. 조기석은 3D 프린터를 이용해 인면조, 비어, 정자 등 박항률의 30년 전 요소를 지금으 로 소환했다. 날아오르는 새와 단발머리 소녀를 당장 비상시킬 대형 날개도 제작했다. 경의는 거룩했고 헌사는 예술적이었다. 2018년부터 계속 눈앞에서 움직이던 상상의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2024년 세밑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고 가장 뜨거운 날이었다.

만날 약속, 만남 遭遇 RENDEZ-VOUS

한복 장인 김혜순의 발은 245cm다. 그런데 245헥타르다. 저녁 8시면 잠이 들고 새벽 4시에는 깨어나 마름질, 바느질, 인두질하는 소박한 일상.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매해 국가 정상급이 주최하는 해외 한복 쇼를 해온 지가 어느새 서른 몇 해다. 행사의 수, 나라의 수를 세는 데는 영 젬병인 그녀가 유일하게 눈을 밝히는 때는 예술가들과의 조우다. 국보급 영화감독, 철학가, 작가부터 지금 가장 빛나는 젊은 사진가까지. 김혜순과 함께라면 한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바로 해낼 수 있다는 말로 그녀에 대한 추앙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조기석, 그에게 김혜순은 장르도 나이도 온통 상관없는 친한 친구다. 조기석이 박항률의 그림을 보고 소름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천착했던 한국적 판타지를 설명하자 김혜순은 그길로 평창동으로 향했다. 곧 박항률은 조기석의 인스타그램을 좇으며 그의 비상한 상상력에 환호를 보냈고 조기석은 박항률의 그룹전 소식을 스케줄러에 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말을 놓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나면 반가워한다. 예술가들의 랑데부는 그랬다.

가교 架橋 BRIDGE

김혜순이 놓은 다리는 사진과 회화, 40년이라는 세대의 차이 사이에 놓은 것이 아니었다. 상상을 실제로 치환해야 하는 마술 같은 차원의 가교였다. 그녀는 박항률의 한복을 mm 단위까지 복원했다. 한복을 실제로 보고, 놓고 그린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소녀의 어느 시절, 색동이었으면 좋겠고, 봄날 철쭉빛 주단이었으면 좋겠다고 한 화가의 머릿속 옷감을 쥐고 마르고 다리고 꿰맸다. 그 시절 옷감을 수배해 그 시절 그대로 염색해 그 시절을 부르며 바느질을 마쳤다. 박항률의 색동저고리는 오로지 박항률만의 색동이었고 그것을 재현해내는 것은 차라리 놀이였다. 옷을 걸어놓고 보니 시대극 드라마 의상 팀의 행어 같았다. 어깨가 낭창하고 이마가 납작한 데다가 주근깨까지 와다다다 번져 있는 소녀가 입으니 박항률의 낮 꿈을 꾸는 그 아이가 나타났다. 조기석은 촬영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어느 스태프보다 발이 빠른 한복 장인의 기민한 움직임이었다고 말했다. 김혜순은 회화가 사진이 될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박항률이 10대의 한 허리를 내준 추억 속 소녀가 2024년 서울 한복판으로 건너올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시점 時點 VIEWPOINT

“박항률은 (중략) 정면은 1인칭이며, 45도 각도의 반측면 얼굴은 2인칭이며, 측면의 얼굴은 3인칭이라고 내게 말해줬다. 그것은 내가 너이고, 그가 나이며, 네가 바로 그일 수 있는 합일의 찰나가 아닐까 추측을 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박항률에게 객체와 주체는 경계를 잃어버리면서 그 순간에 다시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 위의 새’, 사라짐으로 하나 됨> 미술 평론가 경희대학교 교수 박신의.

오마주를 보낼 뿐, 장르를 바꾼 동어반복은 하지 않을 것이다. <보그 코리아> 편집장이 열어둔 세대와 장르의 융복합의 대장정에 붙인 조기석의 말은 멋있었다. 그런데 촬영하며 쌓이는 이미지를 한데 두고 골몰해 있다. 박항률 작품에서 길항한 에너지를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의 명상, 사유를 조기석은 시선에서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문제가 있나? 한결 가벼워진 눈빛이 먼저 말을 했다. 명상과 사유, 합일과 응시를 표현하는 데 이 구도가 가장 맞아요. 이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두어 번 끄덕이는 고개. 그렇게 따로 또 같은, 같은데 다른 이미지가 축차적으로 채집되어 화면에 나타났다.

융합 融合 FUSION

고요의 침묵, 내면의 응시. 서양화가 박항률의 오랜 친구 시인 정호승은 그의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정호승의 평을 들은 조기석은 고개를 주억거리곤 익숙한 생소함, 생소한 익숙함이라고 말했다. 더 정확히는 낯선데 익숙하고 익숙한데 낯선 그 지점이 생각을 붙잡았다고 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조기석의 말을 박항률에게 그대로 옮겼다. 박항률은 입처럼 눈도 커지는 소년 같은 웃음으로 말없이 대답했다.

화가와 사진가, 한복 장인이 있는 공간에 서먹하지 않은 적막이 끼쳤다. 박항률은 손바닥만 하게 프린트된 자신의 작품이 붙은 벽, 그림에서 오려놓은 것 같은 한복을 잠시 들여다봤다. 박항률의 그림이 가득하고 그의 그림을 그대로 쏟아 부려놓았다가 찰나의 소리로 파인더에 주저앉힌 조기석의 희미한 미소를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박항률은 조기석의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두 손으로 악수를 했고 조기석은 그렇게 붙잡힌 손에 코를 대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리드미컬한 박수 소리는 김혜순의 것이었다. 싱잉볼이 파동의 원을 겹치며 고막에 타전되고 멀리 티베트 라싸에서 왔을까 싶은 이국의 향이 공간을 메운 적 없는데도 우리는 명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항률의 명상은 자연과의 합일, 말하지 않음으로 대화하는 침묵이었다면 조기석의 명상은 천 가지 만 가지 갈래로 퍼져나가는 상상력을 단단히 부여잡는 사유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단어를 꺼내놓아 서로 짝패를 맞춰보는 것은 하지 않았다. 캔버스와 파인더에 있는 각각의 소녀와 새 등의 출처와 상징이 같은 방향에 놓여 있는지도 묻거나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림에 있던 새는 모니터로 와 퍼덕였고 가기 싫은 시집을 가는 새색시의 귀밑머리는 꽃잎보다 먼저 떨렸다. 융합,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해지거나 그렇게 만드는 일이라고 했던가! 고추장을 파스타에 버무려 퓨전이라고 말하는 것들. 예술의 융합을 목도하는 찰나는 섬광처럼 번쩍였다. 소녀와 새 모두 녹아들어 구별이 없이 하나로 합해졌다. 아무 말 하지 않으며 나누는 대화. 그 다정한 침묵, 자아와 자연이 비껴가다 이윽고 겹쳐진 합일. 좋군요! 융합의 순간의 추임새는 단 하나였다. (VK)

스페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포토그래퍼
조기석
그림
박항률
의상 디자이너
김혜순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패션 에디터
김다혜
모델
김규리, 정예담, 한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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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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